버클리의 퍼즐이란 무엇인가?: 캠벨과 카삼의 『버클리의 퍼즐』 제1장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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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 이화여자대학교 윤보석 교수님의 '언어와 존재' 수업 발제문을 올려봅니다.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캠벨(J. Campbell)은 현재의 지각철학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무어(G. E. Moore)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일종의 직접적 실재론을 제시하는 철학자인데, 저는 캠벨의 입장에 상당 부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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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버클리의 퍼즐

존 캠벨은 ‘버클리의 퍼즐(Berkeley’s Puzzle)’이라는 문제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마음 독립적 대상에 대해 알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는 강, 바위, 산과 같은 다양한 대상이 존재한다. 각각의 대상들은 우리의 마음에 대해 독립적이다. “인간이 존재한 적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존재하였을 것이다.”(Campbell, 2014: 1) 그러나 우리가 감각 경험을 통해 마음 독립적 대상을 파악한다는 사실이 문제를 발생시킨다. 감각 경험에 대해 얼핏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생각들을 받아들일 경우 우리가 마음 독립적 대상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 부정되고 만다. 캠벨은 버클리의 퍼즐을 발생시키는 생각들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요약한다.

(1) 우리는 감각 경험을 통해 주변 환경에 대한 지식을 가진다. “감각 경험은 사물이 이러저러하게 존재한다는 우리 지식의 토대이자, 우리의 환경 속에 어떠한 사물과 속성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우리 지식의 토대이다.”(Campbell, 2014: 1)

(2) 감각 경험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감각 경험 자체에 대한 지식밖에 없다. “만일 우리가 감각 경험이 우리 지식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면, 그 대답은 오직 감각 경험이 감각 경험 자신에 대한 지식을 제공한다는 것일 뿐이다.”(Campbell, 2014: 1)

두 가지 생각을 모두 받아들이는 입장은 마음 독립적 대상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감각 경험이 ‘우리 주변 환경에 대한 지식(knowledge of our surroundings)’을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감각 경험을 토대로 성립한 모든 지식이란 결국 ‘감각 경험 자체에 대한 지식(knowledge of sensory experience itself)’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생각은 우리가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고작 감각 경험 자신이라는 사실을 함의한다. 우리는 마음 독립적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Campbell, 2014: 2)

특별히, 이러한 문제는 수리물리학의 발전이 일어난 17세기에 부각되었다. 우리의 일상적 감각 경험(our ordinary sensory experience)에 의해 제공된 세계 그림과 수리물리학(mathematical physics)에 의해 제공된 세계 그림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 수리물리학이 보여주는 과학적 세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현시적 세계와는 맞지 않는 것으로 종종 드러난다. “수리물리학은 우리에게 ‘물질(matter)’이라는 확고한 개념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이 개념은 우리의 주위 환경을 감각 경험 속의 어떠한 것과도 같지 않다는 것으로 밝혀주는 것처럼 보였다.”(Campbell, 2014: 2) 따라서 과연 감각 경험이 우리의 주변 환경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줄 수 있는지가 문제시된다. “어떻게 경험이 우리의 주변 환경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하는데 있어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수 있는가?”(Campbell, 2014: 2)

여기서 핵심은 감각 경험이 ‘우리의 주변 환경에 대한 지식의 토대’로 여겨지면서도 ‘우리의 주변 환경에 대한 총체적 진리’와는 어긋난다는 사실이다. 즉, 물리 현상이 우리의 머릿속에 감각 경험을 밀어 넣는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이러한 생각에 근거하여 감각 경험이 우리의 주변 환경에 대한 지식의 토대라고 믿는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감각 경험으로 파악한 세계는 수리물리학이 보여주는 세계와 너무나 다르다. ‘우리의 감각 경험의 질적 성격(qualitative character of our sensory experience)’과 ‘우리의 주변 환경의 질적 성격(qualitative character of our surroundings)’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만일 수리물리학이 우리의 주변 환경에 대한 총체적 진리라면, 우리의 감각 경험의 질적 성격은 우리의 주변 환경의 질적 성격과 거의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Campbell, 2014: 2) 따라서 감각 경험이 우리의 주변 환경에 대한 지식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의문이 제기된다. “우리 주위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데 있어 감각 경험을 위해서는 무슨 역할이 존재하는가?”(Campbell, 2014: 2)

애초에 물리 현상이 우리 머릿속에 감각 경험을 밀어 넣는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인 것으로 지적될 수도 있다. 우리는 머릿속에 내재화된 감각 경험을 기술할 만한 ‘특권적 어휘(proprietary vocabulary)’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감각 경험’이 물리 현상으로부터 내재화된다는 생각 자체가 정합적으로 성립하는지 의문스럽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우리가 ‘머리에 내재한’ 어떤 것으로서의 감각 경험 자체에 대한 정합적 개념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국, 우리는 감각 경험의 ‘내재화’―물리 현상이 감각 경험을 머리에 넣는 방식―에 저항해야 한다.”(Campbell, 2014: 3) 가령, 실재가 ‘다양한 수준에서(at many levels)’ 기술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물론, 물리학은 우리의 주변 환경에 대한 근본적 기술을 제공한다. 그러나 물리학으로 단순히 환원되지 않는 다른 많은 기술도 존재한다. 가령, 심리학, 동물학, 경제학 등 특수 과학은 물리학과는 구별된다. 또한 의식 현상도 물리 현상으로 쉽게 환원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 감각 경험이 기술하는 세계와 물리학이 기술하는 세계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감각 경험은 물리학이 기술하는 세계를 우리 머릿속에 밀어 넣어야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감각 경험은 물리학과는 ‘다른 수준에서(at a different level)’ 우리의 주위 환경을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캠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에서 만나는 질적 세계를―색깔과 모양, 모래 위의 비치 볼 등을―특징짓는 것이, 단지 사물들이 물리학자에 의해 사용되는 기술의 수준과는 ‘다른 수준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말하는 문제일 가능성을 드러낸다. 그러한 성질과 대상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마음 의존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 경험의 질적 성격과 물리학자에 의해 기술되는 세계의 질적 성격 사이의 불일치는 단지 한 수준의 기술에서 다른 수준의 기술로의 우리의 전환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우리는 감각 경험의 질적 성격이 우리 주위의 사물과 속성의 질적 성격에 의해 구성된다는, 감각 경험의 인식적 역할에 대한 우리의 자연적 이해를 유지할 수 있다.(Campbell, 2014: 3)

캠벨은 제1장에서 감각 경험과 우리의 주변 환경에 대한 지식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감각 경험’을 중심으로 삼아 결국 의식의 문제를 다룬다고도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감각 경험의 문제가 전통적 심신 문제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각 경험과 우리의 주변 환경의 관계에 대한 모델을 발전시키는 것은 […] 심신 문제에 착수하는 것에 틀림없이 선행한다.”(Campbell, 2014: 4) 우리 주위의 환경에 대한 지식이 감각 경험에 의존하는지(감각 경험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 이루어질 때에야 비로소 의식 현상이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되는지(심신 문제)에 대한 탐구가 우리 주위의 환경에 대한 지식에 근거하여 수행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로크: 규칙적 원인에 대한 기호로서의 관념

로크는 우리의 주위 환경과 감각 경험 사이의 관계를 원인과 결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즉, 그에 따르면, 물리적 현상은 우리의 머릿속에 감각 경험을 밀어 넣는다. 물리적 현상은 원인이고, 감각 경험은 결과이다. 이때 감각의 인식적 가치는 감각이 물리적 현상으로부터 야기된 결과라는 사실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감각 경험의 인식적 역할은 감각 경험의 현상적 성격이 지닌 외적인 원인 및 결과와 관계가 있다. 당신의 다양한 감각 경험의 구체적인 현상적 성격은 그것들의 인식적 가치와 관련이 없다. 중요한 것은 단지 그것들의 특징적인 원인과 결과이다.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로크는 색에 대한 우리의 감각 경험의 원인에 대해 이러한 종류의 관점을 옹호한다.”(Campbell, 2014: 4)

여기서 결과로서의 감각 경험은 원인으로서의 대상에 대한 일종의 ‘기호(sign)’라고 여겨져야 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감각 경험을 통해 서로 다른 종류의 원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로크의 요점은, 감각적 자각의 인식적 가치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감각의 한 가지 역할이 그들의 규칙적 원인에 대한 기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감각 경험의 고유한 특징은 서로 다른 규칙적 원인을 가진 감각을 구별하는 방식으로서만 중요하다.”(Campbell, 2014: 4-5) 물론, 동일한 물리 현상에 대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감각 경험을 가질 수는 있다. 감각 경험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상황 자체에는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색깔 감각을 가진 경우에는 그들 중 어느 쪽에도 표상적 오류나 ‘거짓의 전가’가 존재하지 않는다.”(Campbell, 2014: 5) 다만, 이러한 차이조차 여전히 동일한 대상에 대한 규칙적인 반응이다. 두 사람이 지닌 감각 경험의 고유한 성격이 다르더라도,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감각 경험을 기호로 삼아 동일한 대상을 자신들의 감각 경험에 대한 원인으로 가리켜 보일 수 있다. “한 사람의 마음속 색 감각의 파레트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 색 감각과의 고유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규칙적 원인의 정확하게 동일한 패턴에 대해 여전히 반응하고 있을 수 있다.”(Campbell, 2014: 5) 따라서 원인이 동일한 상황에서는 결과가 규칙적으로 야기된다. 캠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감각적 자각의 인식적 가치에 대한 한 가지 기초적 유형의 설명을 제공한다. 서로 다른 유형의 지각적 감각은 서로 다른 성격의 원인을 가지며, 감각은 그러므로 그들의 규칙적 원인에 대한 기호로서 기능한다. 감각적 자각―이러한 분석에서, ‘감각’―은 환경 속에서 규칙적 원인을 가지는 것으로서만 발생하고 있다.(Campbell, 2014: 5)

그러나 로크의 설명은 감각 경험의 독특한 역할을 약화시킨다. 규칙적 원인을 가리켜 보이는 신빙성 있는 기호가 반드시 감각 경험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가령, 신경 활동 역시 신빙성 있는 기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외부의 규칙적 원인에 대한 반응이 신경 활동에서 의식과 상관없이 체계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감각 경험이 외부의 규칙적 원인에 대한 기호로서 인식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입장은 이러한 신경 활동 역시 인식적 가치를 지닌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아무런 특유한 인식적 역할도 의식을 위하여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그림에서, 세계에 대한 동일한 지식을 의식 없이도 지닐 수 있다.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 감각이 환경 속에 있는 현상에 대해 그러한 인과적 관계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감각에게 독특하지 않다.”(Campbell, 2014: 6)

감각 경험이 세계를 우리의 주관 속으로 데려온다고 보는 입장은 감각 경험과 신경 활동이 모두 동일하게 ‘기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반발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입장은 감각 경험이 신경 활동과는 달리 우리의 주관적 삶과 긴밀한 연관을 맺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만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서 감각 경험을 위한 역할이 존재한다면, 그 역할은 경험이 지각자의 주관적 삶 ‘안으로 세계를 데려온다는’ 생각과 어떠한 관계가 있어야만 한다.”(Campbell, 2014: 6)라는 지적은 설득력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로크의 설명에서는 감각이 세계를 지각자의 ‘주관적 삶 안으로 데려오는’ 역할을 수행한다 사실이 제대로 이야기될 수 없다. 감각은 단지 외적 대상과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다. “감각이 외적 현상에 대한 인과적 관계에 위치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저절로 그러한 외적 현상이 지각자의 ‘주관적 삶으로 데려와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비록 감각이, 말하자면, 지각자의 주관적 삶에 비자발적으로 존재하더라도, 어떻게 외적 세계가 지각자의 주관적 삶으로 데려와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Campbell, 2014: 6)

마찬가지로, 감각이 단순히 외부 대상을 통해 야기된 ‘결과’가 아니라 사유나 욕망을 야기시키는 ‘원인’이라고 보는 입장은 여전히 감각의 독특한 역할을 강조하려 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입장은 감각이 주체의 정신적 삶의 측면을 야기한다는 주장으로 로크의 설명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역시 감각의 역할은 신경 집합의 역할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 “예를 들면, 당신은 세계의 외적 측면에 의해 야기된 신경 집합을 마치 감각이 그런 것처럼 특징지을 수 있으며, 또한 당신은 그러한 신경 집합과 지각자의 믿음 사이의 인과적 관계를 특징지을 수 있다.”(Campbell, 2014: 7) 감각에만 고유한 인식적 역할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캠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따라서 로크의 설명이 외부 세계 및 주체의 정신적 삶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올바른 종류의 인과적 관계에 위치해 있는 사물로서의 감각에 호소한다는 사실은, 감각적 자각이 우리의 주변 환경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데 있어 무슨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실제로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우리의 외부 환경에 대한 정확하게 동일한 지식을 감각 경험을 가지지 않고서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여지를 남겨둔다.(Campbell, 2014: 7)

바로 이러한 문제가 버클리의 퍼즐이 지닌 한 가지 기초를 이룬다. 즉, 로크의 설명에서는 ‘감각 경험(sensory experience)’이 인과적 작용의 결과인 ‘감각(sensation)’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감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진다는 것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 단순히 인과적 과정에 위치해 있는 감각이 어떻게 세계를 지각자의 주관적 삶 속으로 데려오는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감각은 우리가 감각 경험을 통해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고유한 역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로크의 설명에서 근본 문제는 어떻게 감각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사유가 가능하도록 만드는지에 대한 설명에서 감각을 의식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무런 작동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Campbell, 2014: 7)

오히려 로크는 감각의 독특한 지위를 완전히 약화시킨 나머지 감각과 감각 아닌 것 사이의 차이를 없애버리고 말았다. “로크 자신의 논증에 의해, 이제 색 감각의 완전한 부재가 대상의 색에 대해 사유하는 당신의 능력에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않을 것만 같다.”(Campbell, 2014: 7) 가령, 색맹으로 태어난 아이에게 대상의 색에 신빙성 있게 반응할 수 있도록 두뇌 회로를 심는다고 해보자. 아이는 이제 두뇌 회로의 작용을 통해 (감각 경험과는 무관하게) 대상의 색을 정확히 추측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실제로는 검정과 하양밖에 경험하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아이가 대상의 색을 진정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로크의 설명에서는 아이가 대상의 색을 알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로크의 설명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캠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러한 주체[두뇌 회로를 지닌 아이]가, 완전히 색맹으로 태어난 (즉, 색에 대한 정확한 언어적 보고를 가능하게 하는, 의식과는 거리가 먼, 회로조차 지니지 않은) 사람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색 언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명백하다고 보인다. 만약 그것이 옳다면, 우리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서 감각적 자각의 역할을, 그것이 감각―규칙적 원인의 기호―의 문제라고 말함으로써 분명하게 이야기한 적이 없다. 감각 경험은 우리의 주변 환경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서 본질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이며, 만일 로크의 설명이 여기서 멈춘다면, 그는 그 생각의 힘을 인정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Campbell, 2014: 8)

3. 로크: 유사물

그러나 로크의 설명은 감각 경험이 규칙적 원인에 대한 ‘기호’라는 관점 이외에도 외적 물리 속성에 대한 ‘유사물(resemble)’이라는 관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즉, 그에 따르면, 감각 경험 중에서 모양, 크기, 운동 등과 같은 ‘1차 성질(primary quality)’은 외적 대상에 대한 유사물이고, 색, 냄새, 맛 등과 같은 ‘2차 성질(secondary quality)’은 외적 대상에 대한 유사물이 아니다. 두 경우에서 감각 경험의 인식적 역할에는 차이가 있다. “1차 성질의 관념은 외적 대상의 속성에 대해 2차 성질은 제공할 수 없는 일종의 지식을 제공한다.”(Campbell, 2014: 8) 이러한 설명에서는 감각 경험이 고유한 인식적 역할을 부여받는다. 적어도, 1차 성질로서의 감각 경험은 단순한 기호로 환원되지 않고서 주변 환경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캠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a) 감각적 의식에 특징적인 것은, 지각적 인식 일반과는 대립하는 것으로서, (일반적 원인에 대한 신빙성 있는 기호라는 의미에서의) 단순한 지각적 표상이 아니라, 감각을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b) 만일 그러한 것으로서의 감각적 자각이 당신에게 당신의 주변 환경의 본성에 대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과적 의미에서의) 지각이 가지는 단순한 표상적 내용이 아니라, 감각 자체의 어떠한 특징 덕분이어야 한다.

(Campbell, 2014: 9)

여기서 감각 경험은 외적 대상처럼 일종의 ‘특징(characteristic)’을 지닐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외적 대상이 모양이나 색을 지니는 것처럼 감각 경험 역시 모양이나 색을 지닐 수 있다. “감각 경험은 머릿속으로 주입되었다. 그러나 감각 경험 자체는 말 그대로 모양이나 색 같은 특징을 가진다.”(Campbell, 2014: 9) 물론, 감각 경험이 가지는 특성이 언제나 외적 대상과 유사하지는 않다. 모양과 같은 1차 성질은 외적 대상에 대한 유사물이더라도, 색깔과 같은 2차 성질은 외적 대상에 대한 유사물이 아니다. “비록 당신의 감각 경험이, 모양 특징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색 특징을 가질 수 있더라도, 모양이나 그 밖의 경우와 달리, 대상 자체에서 경험의 그러한 특징과 유사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Campbell, 2014: 10) 따라서 1차 성질은 외적 대상의 성질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고, 2차 성질은 외적 대상의 성질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로크의 설명이 지닌 매력은 ‘안내 섬광(phosphene)’이라는 현상을 둘러싼 철학적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드러날 수 있다. 즉, 눈을 감고서 눈꺼풀을 지그시 누를 경우 일종의 시각적 현상이 생겨난다. 이때 우리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빛과 상관없이 ‘별을 보는’ 듯한 환영을 경험한다. 우리는 시각 피질에 전기 자극을 가하여 안내 섬광을 어느 정도 조종할 수 있기도 하다. 이제 우리가 노랗고, 사각형이고, 움직이는 안내 섬광을 경험하였다고 하자. 여기서 논쟁은 “노랗고, 사각형이고, 움직이는 어떤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Campbell, 2014: 10)를 물음을 두고서 벌어진다. 캠벨은 물음에 대해 가능한 두 가지 대답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노랗고, 사각형이고, 움직이는 것이란 우리의 경험이다. “그것은 주체가 경험하고 있는 것을 기술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어휘일 뿐이다.”(Campbell, 2014: 10)

(2) 노랗고, 사각형이고,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모든 공간과 시간을 탐색할 수 있으며, 어디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가진 공간을 말 그대로 점유하고 있는 어떤 것도, 혹은 여하간 관련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Campbell, 2014: 10)

한 입장은 우리가 안내 섬광을 경험하면서 노란 어떤 것을 표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노란 어떤 것에 대한 표상이 노란 경험과 무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안내 섬광의 경우에, 당신은 노란 어떤 것의 현전을 표상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은 노란 어떤 것의 현전을 당신의 경험에 대해 아무런 노란 것도 없이 표상할 수 있다.”(Campbell, 2014: 11) 가령, 바나나의 노랑임을 표상하는 글이 그 자체로 노란색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노란색이지 않은 글도 바나나의 노랑임을 잘 표상할 수 있다. 노랑임의 현전에 대한 표상과 노란 안내 섬광 자체의 현전은 구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을 받아들일 경우 우리는 시각 경험이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색을 표상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시각 경험을 통한 표상과 글을 통한 표상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종종 시각이 색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각은 색을 현전시킨다.”(Campbell, 2014: 11) 따라서 시각 경험이 자신은 노랗지 않으면서도 노란 어떤 것을 표상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시각 경험과 글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시각 경험이 말 그대로 노랗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입장은 ‘시각적 감각’이나 ‘정신적 물감’이 전문 용어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의 정신에 우리의 주변 환경을 그리는 일종의 ‘정신적 물감(mental paint)’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될 수 있다. 정신적 물감이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인정될 수 있다. 다만, 정신적 물감이 ‘노랑임’, ‘사각형임’, ‘움직임’ 같은 특징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신적 물감의 특징은 전문 용어를 통해서만 해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안내 섬광의 문제를 해결한다기보다는 단순히 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을 뿐이다. “정신적 물감 이론은 단지 안내 섬광에 대한 문제에 착수하지 않는다. 안내 섬광이 x13, y44, z103이라는 특징을 가진다고 말해지는 것은, […] 안내 섬광이 노랗고, 사각형이고, 움직인다고 말하는 것이 말 그대로 옳다는 의미를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Campbell, 2014: 11)

또 다른 입장은 안내 섬광이 노란 것이 아니라 노랗게 보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노랗다(is yellow)’와 ‘노랗게 보인다(looks yellow)’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여기서 문제는 당신이 왜 그러한 조심스러운 공식[‘노랗다/노랗게 보인다’의 구분]을 사용할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 사물은 명백하게, 생생하게, 틀림없이 노랗다. 그 사물이 결국 보라색이나 격자무늬가 될지도 모르는가? 그런 게 아니라면, ‘노랗게 보인다’라고 말하는 것의 요점은 무엇인가?”(Campbell, 2014: 11) 설령, 우리가 노랗다고 말한 대상이 ‘저기 바깥에’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가능성이 노란 대상이 노랗지 않은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 사물은 말 그대로 노랗고, 사각형이고, 움직이며, 비록 그것이 어떤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Campbell, 2014: 12)

여기서 핵심은 감각 경험이 외적 대상과 유사한 특징을 지닌다는 로크의 설명이 감각 경험의 인식적 역할을 보장한다는 사실이다. 즉, 감각 경험의 ‘현상적 특징(phenomenal character)’과 외적 대상 사이에 성립하는 유사성은 (글과 같은) 다른 비경험적 표상을 통해 대체될 수 없다. 감각 경험은 다른 비경험적 표상과 달리 외적 대상의 성질을 그 자체로 지니는 방식으로 외적 대상을 기술하기 때문이다. “지각에서 비경험적인 어떤 것이 그러한 [감각 경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제안은 존재하지 않는다.”(Campbell, 2014: 12) 따라서 감각 경험에는 고유한 인식적 역할이 부여된다. 우리는 감각 경험의 현상적 특징과 외적 대상 사이의 유사성을 통해 다른 표상들로는 얻을 수 없는 외적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특별히 감각 경험의 인식적 가치를 설명하기 위한 시도를 갖는다.”(Campbell, 2014: 12)

주의해야 할 점은 감각 경험이 제공하는 지식이 단순한 ‘표상(representation)’이나 ‘명제의 진리에 대한 지식(knowledge of the truth of propositions)’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선, 감각 경험이 제공하는 지식은 표상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로크는 여기서 표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Campbell, 2014: 13) 감각 경험이 지닌 현상적 특징은 (글과 같은) 비경험적 표상과는 달리 그 자체로 외부 대상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강조점은, ‘표상’에 대한 담화에서 더 나아가, ‘관념이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담화에서 더 나아가, 감각 경험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다른 더 근본적인 종류의 세계에 대한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색에 대한 경험의 맥락에서는 아니지만 모양에 대한 경험의 맥락에서는 말이다.”(Campbell, 2014: 13) 또한 감각 경험이 제공하는 지식은 명제의 진리에 대한 지식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고 있는 종류의 지식이 명제의 진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라.”(Campbell, 2014: 13) 감각 경험은 비명제적 성격을 지닌 일종의 의식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유사물이 제공하는 것은 명제의 진리에 대한 앎의 문제가 아닌 종류의 지식이며, 특별히 의식의 현상이다. 우리가 사각형임에 대한 경험이 사각형의 속성에 대한 유사물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때, 우리는 사각형임 자체의 속성이 무엇과 같은지에 대한 비명제적 지식을, 곧 명제의 진리에 대한 지식을 넘어서는, 그래서 특별히 의식의 현상인 지식을 획득한다”(Campbell, 2014: 13-14)

4. 버클리: 개념 형성의 감각적 기초

버클리는 감각 경험이 외적 대상에 대한 유사물이라는 로크의 설명을 비판한다. 그는 우리의 관념이 지닌 ‘F임’이라는 속성을 통해 물질적 대상이 ‘F’라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외적 대상이 ‘F’라는 사실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감각 경험의 속성 ‘F임’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크의 그림은 당신의 관념의 F임이 당신에게 물질적 대상이 F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당신의 지식을 제공한다는 것이다(cf. Jacovides 1999). 버클리의 요점은 관념과 외적 대상에 의해 문자적으로 공유되는 어떠한 속성도, ‘F’를 위한 어떠한 대체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Campbell, 2014: 14)

이러한 버클리의 비판은 감각 경험이 오직 감각 경험 자신에 대한 지식만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제기된다. 즉, 로크는 우리가 외적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우선 감각 경험에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감각 경험에 대한 지식은 외적 대상에 대한 지식에 선행한다. “유사성에 관한 로크의 분석은 우리의 고유한 감각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먼저 와야 하고,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선행하는 지식을 물질적 세계로 확장시키도록 허락하는 것은 바로 감각과 물리적 대상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라는 사실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Campbell, 2014: 15) 문제는 특정한 속성에 대한 감각 경험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지식이 “그러한 속성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과 같은지”(Campbell, 2014: 15)에 대한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세계가 ‘F’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F임’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경험의 인식적 역할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우선 경험이 오직 경험 자신에 대한 지식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강제된다.”(Campbell, 2014: 15) 오히려 외적 대상에 대한 시각 경험에서는 정작 시각 경험 자체의 내적 특징이 강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캠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우리의 시각 경험을 반성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직 우리가 보고 있는 대상의 속성에 주목한다. 당신이 보고 있는 외적 대상의 빨강임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빨강임’의 어떠한 내적 특징에 주목하는 것은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Harman 1990, Tye 2013). 시각 경험의 이러한 ‘투명성’은 언뜻 보기에 우리의 시각적 감각 자체의 특징에 대한 지식을 우선 가지고, 오직 결과적으로 그것을 우리가 관찰하는 물질적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 확장시키는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Campbell, 2014: 15)

더 나아가, 버클리는 감각 경험과 마음 독립적 세계가 유사하다는 가정을 비판한다. 가령, 우리는 우리의 시각 경험이 지닌 질적 성격과 우리의 주변 환경이 지닌 질적 성격이 서로 다를 수 있는 가능성을 얼마든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각 경험은 사실 우리의 주변 환경과 무관하게 구성되었을지도 모른다. “즉, 당신의 시각 경험은, 당신의 주변 환경에 무엇이 있든지 간에, 지금 그것이 가지고 있는 것과 아주 동일한 질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Campbell, 2014: 15) 따라서 감각 경험의 질적 성격과 외적 대상의 질적 성격 사이에 유사성이 성립한다는 생각이 미리부터 가정될 수는 없다. “버클리의 요점은, 이러한 ‘내재주의적(internalist)’ 용어로 사유되는 시각 경험의 질적 성격이 마음 독립적 세계에 대한 생각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Campbell, 2014: 16) 캠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일단 이러한 용어로 서술되고 나면, 버클리의 요점은 절대적으로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상적 사물과 그들의 속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서 보장된다. 하지만 당신은 마음 독립적 대상에 대한 생각을 지각적 경험의 질적 성격에서 보장할 수는 없다. 만일 지각적 경험의 질적 성격이 ‘내재주의적’ 용어로 사유된다면 말이다.(Campbell, 2014: 16)

만일 감각 경험의 비표상적인 질적 성격이 ‘내재주의적’ 용어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명백하게 마음 독립적 세계와 관련된 사유와 지식을 보장할 수 없다.(Campbell, 2014: 16)

여기서 ‘감각적 상상(sensory imagination)’을 통해 마음 독립적 대상에 대한 개념을 보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도는 경험으로부터 시작하여 상상을 통해 지각되지 않지만 존재하는 대상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버클리는 감각적 상상이 마음 독립적 세계를 보증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감각적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 자체가 마음 독립적 대상과는 무관하다고 이미 지적되었기 때문이다. “버클리의 첫 번째 요점은 상상이 일상적 지각 경험 자체에서 지금까지 이용할 수 없었던 개념 형성과 관련된 어떤 것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감각적 상상이 가져오는 것은, 핏기 없는 사유는 말할 것도 없고, 무엇이든지 이미 지각적 경험 안에 있었다.”(Campbell, 2014: 17) 감각적 상상조차 감각 경험에 의존한 상태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캠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1) 경험이 우리에게 무엇이 가능한지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감각적) 상상을 가르치는 방식을 통해서이다.

(2) 감각적 상상은 무엇이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Campbell, 2014: 18)

이러한 버클리의 비판은 감각 경험의 인식적 역할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명백하게 만든다. 즉, 우리는 감각 경험을 통해 오직 정신적 상태에 대한 지식만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경험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모든 것은 정신적 상태를 상상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이 즉각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Campbell, 2014: 18) 그러나 우리는 감각 경험이 정신적 상태에 대한 지식을 넘어서 마음 독립적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인식적 역할을 지닌다고 주장해야 한다. 따라서 “버클리의 퍼즐은 이것이다. 감각 경험의 설명적 역할을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이 경험이라는 결론으로 빠지는 일 없이 기술하는 것”(Campbell, 2014: 18)

5. 경험에 대한 G. E. 무어의 관계적 관점

무어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 감각 경험(sensory experience)이 아니라 일상적 대상과 속성(ordinary objects and properties)이라고 강조한다. “무어의 요점은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전혀 감각 경험과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상적 지각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은 일상적 대상과 속성이다.”(Campbell, 2014: 19) 가령, 무어가‘ 감각 경험’과 ‘일상적 대상’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대상에 의해 반사된 빛’과 ‘대상 자체’ 사이의 관계를 통해 비유해 보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것은 ‘대상에 의해 반사된 빛’이 아니라 ‘대상 자체’이다. 대상이 아니라 대상에 의해 반사된 빛만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생각은 대단히 이상하다. 이러한 생각은 기껏해야 물리학적 설명이 요구되는 특수한 맥락에서만 유의미할 뿐이다. 캠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물리학을 조금 배운 사람들은 종종 우리가 지금까지 시야에서 만난 모든 것이 빛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대상과 속성을 정말로 보지는 않는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은 그것들에 의해 반사된 빛이다. 이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사실 우리가 결코 일상적 시야에서 빛을 만나지 않는다는 것 같다. 우리가 항상 보는 모든 것은 일상적 사물과 속성 자체이다. ‘빛’은 왜 우리가 어떤 때는 사물을 보고 어떤 때는 보지 못하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이론적 구성물이다.(Campbell, 2014: 19)

마음 독립적 대상은 우리와 관계를 맺을 때에야 비로소 정신적 사실이 된다. 가령, 무어의 입장에서는 파랑임이 우리의 마음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파랑임은 그 자체로 마음 독립적인 속성이라고 인정될 수 있다. “우리는 파랑임 자체가, 물리적 외부 환경에 의해 발생되어, 마음에 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무어의 요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파랑임이 그 자체로 마음 독립적이라는 것이다.”(Campbell, 2014: 19) 다만, 파랑임은 우리가 그 속성을 보는 상황에서 우리의 정신적 사실로 존재한다. “‘파랑에 대한 감각을 정신적 사실로 만들어주는 것’은 파랑임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색의 외적 현상에 대하여 위치해 있는 관계이다.”(Campbell, 2014: 19) 문을 파란 페인트로 칠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여기서 파랑임은 우리의 경험이 지닌 속성이 아니라 문이 지닌 속성이다. 이러한 마음 독립적 속성은 우리가 ‘봄’을 통해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즉, “파랑임은 당신이 인과적으로 변형시키고 있는 문 자체의 특징이다. 파랑임은 하나의 사물이고, 파랑임에 대한 당신의 봄은 당신과 파랑임 사이의 관계이다. 정신적 사실의 존재를 만드는 것은 파랑임에 대한 당신의 이다.”(Campbell, 2014: 20)

따라서 무어의 입장은 ‘경험의 투명성(transparency of experience)’을 강조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경험은 너무나 투명해서 우리가 경험 자체에 주목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령, 퍼레이드를 바라보면서 전화로 친구에게 “나는 트럼본 연주자와 베이스 드럼을 보고 있어.”라고 말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이때 우리는 정신에서 일어나는 봄의 경험 자체에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투명한 경험을 통과하여) 트럼본 연주자와 베이스 드럼 같은 외적 대상에 주목한다. “무어의 요점은 이러한 보고를 하는 데 있어, 당신이 트럼본 연주자와 베이스 드럼 자체에 대한 감각적 주목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당신의 경험에 대한 당신의 보고는 외적인 마음 독립적 환경에 대한 당신의 주목에 의존한다.”(Campbell, 2014: 20) 감각 경험은 외적 대상에 대해 보고하고 있는 것이지 자기 자신에 대해 보고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입장을 통해 감각 경험이 일종의 투사를 바탕으로 성립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극복할 수 있다. 즉, 마음을 일종의 ‘투사 기관(projection apparatus)’으로 상정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 서로 다른 관점을 바탕으로 성립한다. 한 관점은 우리의 머릿속 (‘여기에 있는’) 경험의 질적 성격을 외적 대상에 투사하고자 하고, 다른 관점은 경험의 질적 성격과 무관하게 (‘저기에 있는’) 대상을 경험의 질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표상하고자 한다. 그러나 두 가지 관점은 각각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1) 우리는 종종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색에 대한 ‘시각 경험’이나 ‘시각적 감각’이 물리적 대상에 투사된다고 여긴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에 애매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한편으로, 우리는 시각적 감각을 마치 우리가 더 나은 설명적 작업을 위해 개발하거나 발전시킬 수 있는 이론적 존재물처럼 생각한다. “만약 감각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사고가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시각 경험을 기술하는 어휘를 발전시키려는,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이 시각적 경험에 영향을 주는지를 체계적으로 진술하려는 시도를 기대해야 할 것이다”(Campbell, 2014: 21)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시각적 감각이 이론적 존재물과는 달리 개발하거나 발전시킬 수 없는 것으로도 생각한다. “그 생각은 시각적 경험 자체가 이러한 존재물의 본성 및 행동에 대하여 우리가 가질 수 있거나 필요한 모든 지식을 제공한다는 것처럼 보인다.”(Campbell, 2014: 21) 두 생각이 서로 화해될 수 없는 이상, ‘시각적 경험’이나 ‘시각적 감각’은 “구제할 수 없을 만큼 불분명한”(Campbell) 개념일 뿐이다.

(2) 우리는 종종 바깥의 세계가 질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가 세계를 질적 성격이 있는 것으로 표상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의 문제는 한 사물이 다른 사물을 표상하고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설명이, 한 방식으로든지 다른 방식으로든지, 인과적 설명이라는 사실이다.”(Campbell, 2014: 22) 가령, 우리는 표상되어야 하는 ‘색깔’이라는 질적 성질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감각 경험은 애매함을 지니는 것으로 드러났고, 외부 세계에 있는 인과적 질서에는 질적 성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이러한 질적 색깔이 발견되는가? ‘여기에서’는 아닌데, 왜냐하면 우리가 불분명함을 이유로 ‘감각’에 대한 담화를 버렸기 때문이다. ‘저기에서’도 아닌데, 왜냐하면 저기에 있는 모든 것은 기초적인 물리적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시각적 체계가 사물의 색깔을 ‘표상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말할 방법이 없다.”(Campbell, 2014: 22)

따라서 마음이 일종의 ‘투사 기관’이라는 생각은 총체적으로 포기되어야 한다. ‘여기에 있는’ 감각 경험의 질적 성격을 세계에 투사하려는 입장은 애매함을 지닌다고 비판받았다. ‘저기에 있는’ 외적 대상을 감각 경험의 질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표상하려는 입장은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되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주변 환경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가정에 의존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감각 경험을 통해 마음 독립적 대상과 만난다는 무어의 입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캠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만일 ‘여기에 있는’ 색 감각에 대한 담화가 구제할 수 없을 만큼 불분명하다면, 그리고 색 표상에 대한 담화는 표상적 체계가 인과적으로 반응하는 질적 색깔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그렇다면 올바른 대응이란 확실히 ‘투사 기관’으로서의 마음에 대한 총체적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마음이 단지, 시각 경험에서, 대상의 질적 색깔을 만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질적 색깔이란 ‘마음의 투사’가 아니며, 그것들은 단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의 고차 수준의 특징이다. […] 일단 당신이 이러한 종류의 생각을 받아들이면, 질적 색깔이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의 근본적으로 마음 독립적인 고차 수준의 특징이라고 상정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특별한 문제도 없다. 그리고 그렇다면, 주체와 관찰된 사물 사이에서 지속되는 의식의 일반적 관계의 측면에서, 무어가 경험의 질적 성격을 특징짓는 것을 방해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Campbell, 2014: 22)

여기서 관념론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발견된다. 감각 경험은 ‘투사’라고 여겨질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제 우리는 정신적 대상에 대한 경험이 물질적 대상에 대한 경험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다. “무어의 분석에 의하면, 관념론자가 범한 실수는 지각자와 순전하게 정신적인 대상―잔상(after-image)과 같은 내적 경험―사이의 관계가 ‘x는 지각적으로 y를 의식한다’라는 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사례이며, 지각자와 물질적 대상 사이의 경험적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러한 더 기초적 사례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고 상정한 것이다.”(Campbell, 2014: 23) 즉, (a) 지각자가 (풀잎 같은) 물질적 대상과 맺는 관계와 (b) 지각자가 (잔상이나 환각 경험 같은) 정신적 대상과 맺는 관계는 동등하게 근본적이다. 캠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일단 경험의 관계적 성격이 적절하게 인정되면, 우리는 우리가 자각하는 것이 내적인 정신적 대상인 경우에 대해, 우리가 자각하는 것이 마음 독립적 대상인 경우보다도 우선성을 부여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잔상에 대한 자각이 나에게 잔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이유를 준다면, 정확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마음 독립적 대상에 대한 자각은 나에게 그 대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이유를 준다. 일단 우리가 감각의 모나드적 속성이라는 관점에서의 경험의 질적 성격에 대한 사유로부터, 우리 자신과 우리가 만나는 대상 및 속성 사이의 일반적 관계로서의 경험에 대한 사유로 전환을 이루고 나면, 관념론의 사례는 무너진다.(Campbell, 2014: 24)

참고

Campbell, J., “The Historical Background”, J. Campbell & C. Quassim, Berkeley’s Puzzle: What Does Experience Teach U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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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세미나에서 매주 쓰는 짧은 글쓰기 할 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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