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죽음 개념: 국내외 연구자들의 견해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대표적인 하이데거 해설서들을 하나하나 뒤져서 '죽음'과 관련된 부분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 내용을 여기에도 공유하고 싶어서 또 다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같은 주제에 대해 연속해서 글을 올리는 것이 저의 히스테리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다소 부끄럽지만, 이번 기회에 저도 이 주제를 철저하게 정리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사실, 이런 '텍스트 주석'은 철학적 문제와 직접 연결되지는 않다 보니, 저에게는 그동안 부차적인 관심사였습니다. 대중 서적이나 유튜브 영상 등에서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오독하는 것을 보고서도 그냥 속으로 불만을 가질 뿐이었지, 이 문제를 제가 직접 다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 보니, 다음에 이 주제로 학술지 논문을 써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 입장을 여기서도 다시 요약합니다. 즉, 하이데거는 생물학적 죽음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죽음'이란 (육체의 소멸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 삶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부정될 가능성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 삶을 보증해 줄 영원한 형이상학적 본질이나 토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죽음'입니다. 더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우리의 존재 방식 속에는 '무성(Nichtigkeit)'이 항상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언제나 '무(Nicht)'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무화(Nichten)'의 가능성이 죽음입니다. 따라서 죽음이란 (미래에 일어날 육체의 소멸이 아니라)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현존재가 떠맡는 그런 존재함의 한 방식"(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329쪽.)이라는 것이 제 일관된 주장입니다. 이제 이 입장을 뒷받침해주는 다른 연구들을 인용해보겠습니다.

(1) 정기철,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에 대한 비판적 고찰」, 『범한철학』, 범한철학회, 2007, 205-227.

이번에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과 관련된 자료들을 조사하면서 처음 알게 된 논문입니다. 이 논문의 제2장이 정확히 제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 중 두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그[하이데거]는 경험적 탐구로 설명되는 죽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죽음을 자연적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자연과학적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이데거처럼 죽음을 통한 인간의 존재 전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낯설 수 있다.(정기철,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에 대한 비판적 고찰」, 『범한철학』, 범한철학회, 2007, 209 인용자 강조)

사실 근대철학사까지 죽음은 논의의 핵심주제가 아니었다가 하이데거에 이르러야 죽음 개념이 논의의 중심개념으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하이데거 사상 속에는 생물학적 죽음이 주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생물학적—의학적 죽음 규정은 사망, 곧 “끝나버림” 그 이상을 말해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음의 본질”을 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객관적인 사건으로서의 죽음을 아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죽음 자체에 대한 해명에도 관심두지 않았다. 하이데거가 관심가지는 죽음은 현존재의 전체성을 의미 규정하는 존재양식이다. 하이데거가 죽음에 대한 이해를 통해 밝히고자 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가지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 단순한 생리적 감각이나 심리적 정서 그리고 대상 없는 느낌의 흐름이 아니라, 대상 없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현존재를 느끼고 발견하는 존재론적인 방식이다. 하이데거의 의도를 그대로 옮기자면, 그는 “현존재의 종말을 향한 존재의 존재론적 구조를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정기철,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에 대한 비판적 고찰」, 209-210 인용자 강조)

(2) 이수정 『하이데거: 그의 물음들을 묻는다』, 생각의나무, 2010, 120-123(=이수정, 박찬국, 『하이데거: 그의 생애와 사상』,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185-188).

제가 이전 글의 단락 (2)에서 강조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단독적으로 등장하는 개념이 아니라, 현존재의 전체성에 대한 논의 맥락에서 등장하는 개념이라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하이데거는 죽음 개념을 통해 현존재가 언제나 '미완'의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 해설에서도 죽음은 단순히 생명이 떠나는 현상과 구별되고 있습니다.

(2.1) 죽음은 현존재의 전체성에 대한 논의 맥락에서 등장한다.

'전체존재(Ganzsein)'란 무엇인가?
'전체'란 '현존재의 '처음'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를 의미하며, 이 점에서 '출생과 죽음 사이의 존재인 '일상성'과 구별된다. […] 즉 현존재는 '죽음에 있어서 종말에 달하며, 이렇게 해서 이 존재자는 전체존재에 이른다. 현존재에게는 '부단한 미완결성'이 있으며, 이 '미완'에는 '죽음'이라는 '종말'이 '속하여' 있어서, 이것이 '현존재의 그때그때 가능한 전체성'을 경계지어 규정하고 있다.(이수정 『하이데거: 그의 물음들을 묻는다』, 생각의나무, 2010, 120-121쪽; 이수정, 박찬국, 『하이데거: 그의 생애와 사상』,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185)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죽음에 대한 논의는 현존재가 '미완'의 형태로 '종말'에 이르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제시됩니다. 현존재는 완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그래서 어떤 것도 현존재의 '본질'이라고 말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2.2) 죽음은 생명의 종료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다.

그[하이데거]에 따르면 '죽음'이란 단지 '생명이 있을 뿐인 자가 세계 밖으로 떠나는 것' 즉 '종료Verenden'와는 구별된다. 따라서 '죽음'이 현존재에게 적합하게 '존재'하는 것은 '죽음을 향한 실존적 존재'에서뿐이다. 요컨대 '죽음'이라는 '종말'은 '현존재가 종말에 달하여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라는 이 존재자의 종말을 향한 존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현존재가 받아들인는 하나의 존재방식'이다.(이수정 『하이데거: 그의 물음들을 묻는다』, 121쪽; 이수정, 박찬국, 『하이데거: 그의 생애와 사상』, 185쪽)

(2.3) 존재의 방식으로서의 죽음이란 곧 우리 자신의 미완성적 성격을 의미한다.

이러한 '죽음'은 '현존재가 그것에로 태도를 취하는 어떤 것'으로서의 '가장 극단적인 미완'이라는 성격을 가지며, 최소한으로까지 감수된 '최후의 미완'도 아니며, 오히려 하나의 '절박함Bevorstand'이라고 성격지어진다.(이수정 『하이데거: 그의 물음들을 묻는다』, 121쪽; 이수정, 박찬국, 『하이데거: 그의 생애와 사상』, 186쪽)

(3) 권터 피갈, 『하이데거』, 김재철 옮김, 인간사랑, 2008.

독일 하이데거 학회의 회장이었던 권터 피갈은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죽음의 문제가 '무규정성'의 문제를 말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즉, 우리 자신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미완의 존재라는 사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이 하이데거가 '죽음'이라는 용어로 말하고자 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런 무규정성의 문제가 "많고 적은 연령의 상태" 같은 실제 생물학적 상황과 무관하게 "삶의 모든 계기"에 놓여 있다고 강조하면서 말입니다.

하이데거가 발전시킨 "죽음으로의 선구"에 대한 분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하이데거는 이 문제를 다른 숙고들과 연결시켜 아주 독특하게 기술하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하이데거가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것은 고유하게 앞서 있는 존재의 명시적이고 근원적인 경험, 즉 이해의 형식에 놓여 있는 열어 밝혀져 있음의 명시적이고, 근원적인 경험이 자신의 죽음의 확실성과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유하게 앞서 있는 존재의 무규정성은 내가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과 함께 제시된다. 그리고 이 근본적인 무규정성은 흔히 생각하듯 많고 적은 연령의 상태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계기에 놓여 있다.(권터 피갈, 『하이데거』, 김재철 옮김, 인간사랑, 2008, 105 인용자 강조)

재미있는 사실은, 피갈이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아주 위태로운 상황"에 대한 경험과 엄격하게 분리시킨다는 점입니다. 즉, 하이데거가 말하는 것은 (Martin님이 주장한 것과는 달리) "실존적 사생결단을 압박받는 순간"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규정성'(저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본질 없음')의 경험이지, '사생결단'의 경험이 아닌 것입니다.

그[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진정한 "죽음으로으 선구"는 앞서 있는 존재의 무규정성으로 향하는 "선구"이며, 아주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 경험은 극단적으로 고양될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중시하는 경험은 앞서 있는 것이 극단적으로 표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그때에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이때 고유하게 앞서 있는 존재를 무규정성에서 이해하게 된다. 나아가 사람들은 규정된 모든 기획, 규정된 모든 계획, 모든 표상이 항상 바로 이 무규정성에 대한 대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권터 피갈, 『하이데거』, 107쪽 인용자 강조.)

(4) 이기상, 『쉽게 풀어 쓴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 영향』, 누멘, 2010.

이기상은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의 사건을 중심으로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설명합니다. 앞의 해설들과 달리, 이기상은 실제 육체의 죽음 문제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하이데거 해설조차 결국 '육체의 죽음' 자체에 강조점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까지의 삶이 완전히 죽음으로 끝났다는 것"이라는 사건을 말하기 위해 육체의 죽음을 예시로 들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키르케고르가 즐겨 쓰는 표현으로 '전율과 환희'를 살펴보자. 하이데거는 죽음을 본 사람은 자기가 일생 동안 마음을 쏟았던 것들, 즉 존재자에 대해 초연해진다고 한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은 이제 존재자를 떠나 존재로 향하게 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회개를 가지고도 설명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전에 사울이라는 사람이었다.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장님이 된다. 사도 바울은 사울로 살았을 때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 사울이 장님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삶이 완전히 죽음으로 끝났다는 것, 존재자가 무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를 키르케고르 식으로 말하면 전율이라 할 수 있다. 장님이 된 사울은 모든 것이 끝이라는 전율을 느끼지만 그리스도를 만나 사도 바울로 다시 눈을 뜨게 되었을 때, 그는 이제 환희 속에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며 새로운 삶을 살아 나갈 것을 다짐하게 된다. 이전의 사울로서의 삶과 사도 바울로서의 삶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새로운 눈은 새로운 존재 이해이다. 이제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게 되고, 이것이 환희이다. 존재자에게 빼앗긴 나의 삶을 되찾을 때, 인간은 새로운 세계에서 환희를 느끼게 된다.(이기상, 『쉽게 풀어 쓴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 영향』, 누멘, 2010, 191 인용자 강조)

즉, 사울의 다마스쿠스 경험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가 확실하다고 믿었던 모든 토대들을 '무'로 돌려버리는 경험이 바로 그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의 죽음은 하이데거의 요점을 어긋나게 만듭니다.) 기껏해야, 육체의 죽음에 대한 명상은 우리가 존재론적-실존론적 죽음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드는 하나의 계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권터 피갈이 "아주 위태로운 상황" 자체가 하이데거의 요점이 아니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5) 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그린비, 2014.

박찬국도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이 현존재의 전체성에 대한 논의 맥락에서 제시된다고 지적합니다. 박찬국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은 하이데거의 용어로 하이데거의 철학을 해설하기 때문에 사실 『존재와 시간』에 대한 저자의 고유한 견해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동안 지적한 요소들을 이 책 속에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5.1) 죽음은 현존재의 전체성에 대한 논의 맥락에서 등장한다.

이렇게 해서 이제 현존재를 전체로서 '예지' 속에서 확보한다는 과제가 생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존재자가 도대체 전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전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으면서 자신이 실현해야 할 가능성을 기투하는 현존재에게는 그가 존재하고 있는 한, 장차 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직 남아 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이 부분에는 현존재의 종말, 즉 죽음이 속한다. 이 종말과 함께 현존재의 전체성이 성립하게 된다.(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그린비, 2014, 314)

(5.2) 죽음은 생명의 종료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다.

제가 이전 글의 단락 (3)에서 '아직-아님'과 '종말'이라는 개념을 가지고서 설명한 내용을 박찬국도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책 본문에서 이 내용들은 모두 볼드체로 되어 있습니다.)

현존재는 존재하는 한 항상 자신의 '아직 완료되지 않음'으로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존재는 이미 언제나 자신의 종말로 존재하기도 한다. 현존재의 존재는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다.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인수하게 되는 하나의 존재방식이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기에 충분할 만큼 늙어 있다. 그러나 이는 현존재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고, 현존재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재의 죽음은 현존재의 삶의 마지막에서야 나타나고 그때에야 비로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현존재는 죽음에서 회피하는 방식으로든 그것과 적극적으로 대면하는 방식으로든 자신의 죽음과 항쌍 대결하고 있다.(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329쪽.)

솔직히, 저는 박찬국이 "존재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태도를 취할 수 있다"라고 한 부분이 썩 좋은 해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해설은 마치 '진정한 죽음'이 따로 어딘가에 있고,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은 진정한 죽음이 아니라 단지 '진정한 죽음에 대한 태도'인 것처럼 오도하게 만들 여지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핵심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은 일종의 '존재방식'이라는 것이 박찬국도 강조하는 사실입니다.

(5.3) Sterben과 Ableben은 구별되어야 한다.

이건 이전 글에서도 인용한 내용입니다.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죽음이란 '사망(Sterben)'이지, 생물학적 '종명(끝나버림, Ableben)'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현존재의 죽음을 종명(Ableben)이라고 부른다. 이는 현존재가 실제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존재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태도를 취하며 현존재에게만 특유한 이런 종류의 죽음을 하이데거는 사망(Sterben)이라고 부른다. 현존재는 사망하지 단순히 하나의 생명체처럼 끝장나는 것은 아니다. 현존재가 단순히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 종명할 수 있는 것도 오직 그가 사망할 수 있는 존재인 한에서이다.(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330)

(6) 박찬국,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동녘, 2004.

앞의 책보다 좀 더 박찬국의 해석이 강하게 들어간 책입니다. 앞선 글의 단락 (1) 말미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저는 이 글에서 박찬국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설명하는 내용에 다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박찬국이 결국 강조하고 있는 것도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무가 무화하는 사건"입니다. 즉, 하이데거가 '죽음'이라는 개념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사건이란 "우리가 그동안 집착해온 모든 것에서 의미를 박탈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죽음이 존재 전체가 자신을 알리는 통로인 한, 인간이 자신이 죽음에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기분인 불안은 죽음에 대한 불안이지만 결국은 존재 전체에 대한 불안이다. 그것은 자신이 불가해한 존재 전체에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 앞에서의 불안이다. 불안에서는 존재 전체가 무의 형태로 자신을 고지한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존재 전체가 무의 형태로 자신을 고지하는 이러한 사건을 "무가 무화한다(das Nichts nichtet)."라고 했다. […] 이렇게 무가 무화하는 사건은 우리가 그동안 집착해온 모든 것에서 의미를 박탈하는 사건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를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하다.(박찬국,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동녘, 2004, 119-120쪽 인용자 강조)

즉, 우리가 불변하고, 확실하고, 영원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항상 '무'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이 '죽음'입니다. 이때의 죽음이란 '육체의 소멸'이 아닙니다. 오히려 존재하는 모든 것의 '형이상학적 토대 없음'이 죽음 개념의 핵심입니다. 우리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본질도 토대도 없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부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기상의 예시를 사용하자면, 극단적 유대교인이었던 사울이 다마스쿠스 경험 이후에 그리스도교의 사도 바울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7) W. 블라트너,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입문』, 한상연 옮김, 서광사, 2012.

이전 글에서 이미 많이 인용하였지만, 여기서도 다시 인용합니다.

(7.1) Sterben과 Ableben은 구별되어야 한다.

"죽음"이라는 말로 하이데거가 언급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 죽음은 현존재가 그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이다: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게 되자마자 떠맡게 되는 존재함의 한 방식이다." (289/245). 존재함의 한 방식인 죽음? 우리는 보통 죽음을 존재하지 않음 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죽음은 미래에 떨어져 있는 어떤 사건이 아니다 . "사망함(das Sterben)은 사태져-있음(Begebenheit)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이해할 현상이다 …"(284/240) 그렇다면 "더-이상-현존할-수-없음의-가능성"과 "순연한 현존-불가능성"은 삶의 종료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 […] 만약 "죽음"이 이러한 실존적 상황에 관계된 것이라면 하이데거는 인간의 삶을 다하는 것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하이데거는 그것을 삶을-다-보냄 (demise; das Ableben)이라 부른다. (W. 블라트너,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입문』, 한상연 옮김, 서광사, 2012, 287 인용자 강조)

(7.2) 하이데거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생물학적 죽음 개념과는 다른 의미로 죽음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죽음"이라는 말을 어떤 유별난 방식으로 사용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한 첫 번째 철학자인 것은 아니다: 키르케고르 역시 이 말을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을 「아메리칸 뷰티」의 레스터 번햄이 "혼수상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과 비교할 만한 강력한 은유적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이 용어를 이러한 은유적 의미로 사용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존재론적 논의를 "그저 고양하기나" 하는 문학작품으로 평가절하할 위험을 안게 된다. 하이데거는 그가 "죽음"이라는 말을 존재론적 바탕 위에서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려 한다 . 죽음은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현존재의 끝을 뜻한다. 삶을-다-보냄이 삶의 끝을 의미하듯이 말이다. "대체 어떤 의미에서 죽음을 현존재가 끝남으로서 파악해야만 하는지 의 물음이 더욱 절실해진다."(289/244)(W. 블라트너,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입문』, 259쪽 인용자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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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커뮤니티에 논쟁이 벌어져 흥미롭게 지켜보면서도, 시간도 없고 자료를 얻을 환경도 되지 못해 적극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함께 하지 못하는 저에게는 단비와 같네요. 인용문들만 본다면 확실히 YOUN님의 논지들이 지지되고 있군요. 생물학적 죽음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부차적이라는 것이지요. 또 동시에 Martin님의 주장 몇 가지는 반박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 죽음을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의 핵심으로 보시는 듯 하신데, 적어도 이것이 "전 세계 하이데거 학계 전체가 공유하는 '상식'"이라는 주장은 틀린 것 같군요. 물론 Martin님의 몇 가지 과한 주장을 조금 누그러뜨려 '하이데거는 Ableben과의 연관 속에서만 Sterben을 다룬다'는 식으로 바꾼다면 조금 더 생산적인 논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좋은 논거를 Martin님이 가져오셔야 할 것이고, 그러리라 기대해봅니다. 두 분 논쟁 덕에 배우는 게 있네요, 영양 만점 팝콘을 들고 주말을 기다려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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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윤 선생님, 하이데거 학자 분들의 진지한 연구 텍스트를 이렇게 본인의 한두마디 명제를 강화·반복하는 데 끌어들이시기보다, 인용하신 저자인 정기철·이수정·박찬국·블래트너 선생님께 직접 공정한 평가를 구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앞서 말했듯이 전문 학자가 한마디로만 말해주면 끝날 일을 왜 이렇게 양만 불리는 방식으로 소모적인 토론을 추구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위 댓글만 보더라도 “시간도 없고 자료도 못 얻어 적극적으로 확인을 못하지만, 인용문들만 본다면 확실히 당신이 맞다”는 반응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런 식의 승인이 진정 학자로서 만족스러우신가요? 이것이 바람직한 학술입니까, 선동입니까?

저는 하이데거 문헌 만큼이나 선생님의 블로그 글도 10년 넘게 읽어온 애독자입니다. 선생님의 《존재와 시간》 설명 영상도 다 봤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추구하는 철학의 방향이 무엇인지, 또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의 하이데거 독해의 한계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무턱대고 갑자기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선생님의 학자적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점검을 제의하는 것입니다. 비록 저쪽에서 조금 격한 표현으로 다른 선생님들의 눈치를 받기도 했습니다만, 저는 선생님을 논파하거나 부끄러움을 주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이 논쟁이 하이데거 기초존재론의 핵심을 왜곡 없이 알리는 데 건설적으로 일조하길 바랄 뿐입니다.

선생님의 ‘(a) 개념 혼동 (b) 문헌 오독’의 문제가 무엇인지 지적되지 않은 채 단지 기계적 ‘근거-주장’을 위해 이것저것 인용문을 더 끌어들이기만 할수록 오히려 전문 학자 분들의 시선에선 단번에 간파될 선생님의 견강부회가 더 선명해질 뿐입니다. 그래서 이미 “주중에 문제점을 상세히 정리할테니 기다려달라”고 두차례 말씀드렸습니다. 이미 앞선 선생님의 글에서 선생님이 구체적으로 어디를 어떻게 오독하고 있기에 오류가 발생하는지가 확연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로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대학자 신오현 선생의 곁에서 30년 넘게 평생 하이데거를 연구하신 모 학자 분께 직접 선생님의 그간 하이데거 관련 글들을 보여드렸더니 아예 “현상학을 아예 모른다”고까지 평하시더군요. 이 글에 인용된 정기철·이수정·박찬국·블래트너 선생님을 포함해 어떤 정통 하이데거 연구자에게 의견을 구해도 비슷한 반응이 나올 것이라고 거의 확언할 수 있습니다. 이 학자 분들의 책과 논문들을 보면 전반적으로 선생님이 추구하는 것과는 아예 다른 방향의 철학을 추구하고 계시거든요.

단적으로, 이 글의 첫번째 인용된 정기철 선생 논문 건은 저자이신 정 선생님이 직접 보시면 펄쩍 뛰실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논문 열람이 가능하게 되어 있으니 모두 직접 읽어보고 정기철 선생님의 본의와 윤 선생님의 의도가 일치하는지 다함께 확인해 봅시다: https://kci.go.kr/kciportal/ci/⋯

첫번째 인용문의 전체 단락입니다:

하이데거는 근대적 죽음이해를 분명히 거부한다. 오히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 이해를 따르고 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체를 두 실체로 보지 않고 죽음을 존재자를 규정하는 원리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죽음은 인간의 통일성과 전체성의 소멸을 의미한다.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도 아니고 기관이 작동하지 않는 조용한 상태도 아니고 전체 인간의 소멸을 뜻하는 과정의 끝이다. 그는 경험적 탐구로 설명되는 죽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죽음을 자연적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자연과학적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이데거처럼 죽음을 통한 인간의 존재 전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낯설 수 있다.

즉, ‘육체적 죽음 ⊂ 전체적 소멸’이고 따라서 둘은 ‘불가분의 공속적 사태’이며, 이것이 바로 “실존적 죽음(Sterben)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Tod)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라는 반복된 명제의 진짜 의미인 것인데도, 윤 선생님은 계속 이 명제가 등장하는 텍스트를 끌어들여 본인의 자의적 주장인 “Sterben은 육체적 죽음을 포함하지 않는다”에 끼워맞추어 소개하고 계시기 때문에 인용문 수천개를 가져와도 동일한 왜곡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니힐리즘 이데올로기의 투사이지 절대 정직한 텍스트의 독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더 심한 표현을 무릅쓰자면, 사이비종교가 교리 합리화를 위해 성경구절을 문맥 상관 없이 이곳저곳 인용해 근거로 활용하는 것과 똑같은 행위입니다. 성경 저자들은 죽었지만 다행히 윤 선생님이 인용하신 텍스트의 저자 분들은 모두 살아계시니, 누차 제안드리지만, 하이데거학회 등을 통해 ‘직접’ 윤 선생님의 의도가 그분들의 의도와 일치하는지 공정하게 확인해보면 됩니다. (윤 선생님이 안 하셔도 제가 하겠습니다.) 공적 담론의 장에서 하이데거 이해를 위해 씨름하는 현장이라면 기쁘게 응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정기철 선생님의 위 논문 중 두번째 인용은 전체 단락이 잘 인용되었으니, 이제 그 다음 문단에서 정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적 죽음 이해는 자연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특히 의료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생명연장의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자연적 죽음 이해는 죽음 이후의 문제를 죽음의 문제의 핵심으로 보았던 사상과는 대립하고 있다. 죽음 이후의 계속되는 삶을 의료적 생명연장으로 쉽게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에게, 비록 과학기술의 발전의 맹목성과 도치된 관계설정을 비판하기는 했지만, 하이데거의 죽음을 통한 존재이해는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가? 자연과학적 죽음 이해는 하이데거가 추구한 ‘죽음의 의미’에 침묵할 것이다. 반대로 하이데거의 죽음의 의미에 자연과학적 죽음 효용성이 무가치성을 안겨 줄 것이다. 즉 병원에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소리치며 발광해 본적이 있거나, 진통제를 맞고 잠을 자고 나서야 죽음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었던 사람에게, 아무리 철학사에 남을 만한 죽음에 대한 고찰이 라고 하더라도,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고찰은 진통 중에는 유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의 죽음의 이해와 의미물음은 평안할 때, 철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죽음에 대한 고찰이 아닌가? 죽고 싶은 진통 중에는 죽음에 대한 사고보다 진통제가 필요함에 틀림 없다. 그러면 근대의 자연적 죽음에 대한 이해가 논의에서 제외시켜버린 죽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윤 선생님이 앞선 글의 말미에서 제기하신, “생명공학으로 생물학적 영생이 이루어진다면 하이데거 철학은 무슨 의미가 있냐”는 취지의 질문을 동일하게 제기하고 계시는군요. 저도 그 답이 궁금합니다. 그 해결을 정 선생님이 어떻게 하시는지는 (제발) ‘각자’ 논문을 ‘스스로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시면 좋겠고, 여기서는 정 선생님이 “병원에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소리치며 발광해 본적이 있거나, 진통제를 맞고 잠을 자고 나서야 죽음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었던 사람”을 예시로 드시며 설명한 그 ‘죽음’이 과연 ‘육체적 죽음을 포함하는가, 하지 않는가’만 객관적으로 판단해보시면 됩니다. 이 정도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정기철 선생님이 “육체적 죽음을 포함하지 않는 (전통존재론적, 니힐리즘적) 무성”을 이야기한다고 믿으신다면, 제가 어떻게든 정 선생님을 수소문해서 ‘직접’ 답변을 얻어 가져와보도록 하겠습니다.

재차 삼차 당부드립니다. 주중에 정리가 완료되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세요.’ 이미 대학자 이기상 선생님의 명쾌한 진단도 얻었으니, 나머지는 윤 선생님 글에 드러난 오독의 디테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왜 그런 오류가 있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하는 일 뿐입니다. 그 다음에 하이데거학회에 정식으로 질의하여 윤 선생님의 그간 하이데거 관련 글들에 대한 객관적 검증과 자문을 요청드리고자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보기에 윤 선생님이 왜곡하는 부분은 하이데거 담론의 확장된 지평이 아닌 ‘학자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기초 상식’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만큼 판단 유보를 요청드렸음에도 “느낌상 윤 선생님이 하이데거 전문가 같다”고 보신다면 제 권한 밖의 자유이니 윤 선생님께 많은 가르침을 얻으시면 됩니다. 하지만 윤 선생님 스스로도 강조하신 것처럼, 대중적 해설이나 누군가의 조언보다 ‘직접 텍스트를 읽고’ 판단하여야 하며, 핵심적인 문제의 답변에 있어서는 인터넷 논객이 아닌 ‘진짜 학계 전문가’를 찾아가서 말씀을 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을 모두 유념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변함없이 윤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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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직접 교류한 적이 없는 다른 하이데거 연구자분들이 제 글을 어떻게 읽으셨는지는 저도 정말 궁금합니다. 그래서 저도 Martin님의 글이 올라오길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제가 올린 이 내용을 선동이나 소모적인 토론이라고 생각하셨다면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저는 어제 도서관에서 하루종일 하이데거 문헌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위에서 쓴 것처럼, 저는 아예 이 내용으로 학술지 논문 투고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제가 올린 내용들은 논쟁의 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제 연구의 과정에서 생겨난 결과물들이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실제로 이런 논쟁들에서 제가 쓴 글들을 정리하여서 논문을 게재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이 글도 언젠가 그렇게 학술지 논문의 형태로 다시 정리해야겠다는 계획을 가지고서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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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거친 표현은 모두 사과드립니다. 다만 “선동입니까”라고 한 취지는, 맨 위 @alektryon 님의 댓글처럼 ’문헌 검증 없이 옳고 그름을 심판하는 반응’을 일으킨다면 바람직하지 않지 않느냐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또 @alektryon 님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고 예시를 든 것이니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는 선생님이 비판한 “대중적 해설”을 또다른 대중적 해설로 대체함으로서 결국 “대중적 해설의 답안지화”라는 근본적 문제를 공고히 하는 결과밖에 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포럼에서조차 아직도 생경하게 느끼는 하이데거 존재론을 꾸준히 소개하고 적용(또는 “크로스오버”)하시려는 선생님의 노력은 누구보다 높이 사고 있고 그 진정성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기성 하이데거 학자 분들께서도 비판보다는 기특하게 느끼실 것입니다. 선생님의 석사학위 논문과 헤겔·비트겐슈타인 관련 논문도 이미 감명 깊게(?) 읽어본 입장에서, 선생님의 (확장된) 하이데거 이해가 학계의 검증을 거친 논문으로 어떻게 드러날지도 기대합니다. 하이데거 존재론의 진정한 핵심과 의의를 소개하고 대중적 이해의 오류를 교정하고자 한다는 근본적인 의지에 있어서 저는 선생님과 전적으로 ’같은 편’입니다. 하이데거의 죽음 이론이 대중적으로 잘못 전파되고 있다는 시각에도 동의합니다. 다만 그 대안이 무엇인지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 다른 철학을 다룰 때보다 훨씬 엄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판을 받아 관점을 수정하는 것을 즐긴다고 고백하신(?) 바 있고, 선생님의 ‘언어놀이 해석학’도 제가 알기론 그 방향에 초점을 두고 있는 만큼, 이 토론으로 하이데거 존재론의 진면목이 선명해지고 선생님의 담론도 발전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비판 과정에서 자연히 있을 수 있는 다소 거친 수사들에도 크게 신경쓰시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학자 분도 언급하신 일화인데, 모 대학 박사학위 발표회에서 한 발표자가 “천인합일”이라는 표현을 쓰자 심사위원인 모 유명 철학교수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맹비난하며 발표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언행의 정당성은 계속 학계의 입방아에 올랐고요. 물론 저런 인신공격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고, 진중해야 할 학자 사회에서조차 저럴 정도면 (선을 넘지 않는 한에서 진지한 담론 맥락에 부합하는) 어느 정도의 수사는 개인 공격이 아니라 행간을 읽어주시는 정도로 이해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저도 의도의 오해가 없도록 자제하고 신경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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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한 가지 더, 약간 유감스러운 부분을 말씀드립니다. 다른 하이데거 연구자들과의 친분 관계나 개인적 교류라면, 저 역시 여러 사람들을 들 수 있습니다. 가령, 제 석사 논문은 하이데거를 직접 다루고 있지 않지만, 제 논문을 심사하신 3명 중 2명이 하이데거 연구자이고, 1명은 야스퍼스 연구자입니다. 지금 제 지도교수님도 국내에서 하이데거 연구로 유명하신 분이십니다. 제 선배와 후배들 중에서 하이데거를 전공하고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분들과의 개인적 친분을 제 주장의 권위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분들에게 대뜸 제가 인터넷에 쓴 글을 보여주면서 여기에 대해 한 마디 거들어 달라고 하는 것도 실례입니다. 특별히, 제 자신이 지금 '현직에 있는' 사람인 만큼, 제가 다른 이름들을 마치 저의 대변자인 것처럼 사용하는 것이 '현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자칫 서로에게 굉장히 민망한 상황들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래서 제가 ‘정식으로 질의할 것’을 제안드린 것이지요. 실제 하이데거 전공·연구자 여러분이 직접 선생님의 논지를 확장해주신다면 하이데거 독자로서 당연히 환영입니다. 선생님의 지도교수이신 이승종 교수님의 《크로스오버 하이데거》도 선생님의 작년 추천 글을 보고 일찍 구입해서 잘 읽었습니다. (이 책에선 죽음 이론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분석철학 등에의 ‘적용’을 초점에 두기 때문에 이 논의에는 적합하지 않지요.) 제가 위 댓글에서 언급한 신오현 선생의 제자 학자 분이나, 이기상 선생님은 저와 전혀 개인적 친분이 없는 분들입니다. 그렇기에 더 객관적이고 공정한 검증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니, 마치 “학자들로부터 직통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식의 이상한 자랑을 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오해하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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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개념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이냐?>라는 논쟁의 대주제를 떠나서, 사실 Martin님의 입장이 제 눈에는 굉장히 이상해보입니다. 특히 다음 부분이 말입니다.

  1. 우선 자신이 쓰지 않은 글을 외부단체에 넘겨 그것의 정당성을 판별하는 행위가, 나아가 그 결과를 가지고 글 작성자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리는 권리가 애초에 Martin님께 있기는 한건가요? 그것이 선한 의도이든 어떤 의도이든 상관없이 말이죠.

  2. 또 염두에 두어야 할점은 <올빼미> 혹은 <블로그>에 올리는 글이 Youn님이 성심성의껏 공부하고 정리해 쓴 글이라해도 그것은 쪽글일 뿐, 외적으로 학적인 권위가 부여된 논문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글 모음들을 몽땅 가져다가 Youn님의 생각을 검증을 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곧 올리신다는 입장문을 기다려달라는 본인의 말처럼, Youn님이 논문의 형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논문으로 발전시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논문은 자연스럽게 논문심사에 오를것이니 당연히 그것의 정당성은 판별될것입니다. 그때까지 기다리시면 됩니다. 굳이 본인이 앞장서서 직접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건가요?

  3. 또 사실 가장 중요한 점인데, 계속하여 <다른 하이데거 학자들의 입장 혹은 의도와 불일치한다>는 것을 검증하겠다고 하시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학문적 글쓰기에서 <입장 혹은 의도 나아가 결론이 기존의 것과 다르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들이 기존의 것과 다르다고 해도, 그곳까지 나아가는 논리가 정합적이고 납득할만하면 됩니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은 내재적 논리가 정합적이냐 납득할만하냐이지 기존의 견해와 합치되느냐가 아닙니다. 물론 Martin님이 이것을 정말 모른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만, 이런 발언이 나오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4. (3)에 이어지는 것인데, 이 논쟁이 벌어진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Youn님의 그간 하이데거 관련 그들>을 다른 전문가에게 보여주고 그것에 대한 답변도 받았다는것이 사실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됩니다. Youn님이 내리는 결론이 기존견해에 일치하든 일치하지 않든간에 중요한 것은 내재하는 논리이기에 그것을 철저히 검토해야만 합니다. 심지어 "현상학을 아예 모른다"라는 모독 수준의 결론이 나올만큼요. 그런데 이 짧은 시간안에 그것을 검토하여 답변까지 Martin님께 제출해주셨다는게 참 신기합니다. 물론 Martin님이 정리하신 글을 봐야 정확한 판단이 서겠지만, 언급하신 교수의 블로그 최근글을 보니 그곳에 댓글형식으로 질문하셨고 답변 받으셨더라구요. 그런데 정말 자신의 질문이 Youn님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하고 있으며, 답변상에서 그 입장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비판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5. 계속 딴지거는 모양새인데, Martin님이 Youn이 더 나은 하이데거 이해를 위해 비판하신다는 것 처럼, 저도 Martin님이 더 나은 비판글을 쓰기 위해서 Martin님의 비판을 비판하는 것 뿐입니다. Martin님 말대로 제3의 시선으로 비판할 수 있는자가 객관적이고 공정한 검증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저도 Youn님과 아무런 친분이 없으니 오해는 하시지 말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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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다만 논쟁 주제와 상관 없는 소모적인 문제제기로 보여서 일일이 답변은 하지 않겠습니다. 윤 선생님 본인께서 하이데거 연구자들의 의견도 궁금하다고 하시며 제 제안에 긍정을 표하신 것으로 보이니, 시간을 넉넉하게 두시고 담론이 발전하는 것을 지켜봐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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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님께서 기다려달라 하시니 기다립니다만, 여기 다신 코멘트에 대해 몇 가지 의문점을 남깁니다.

인용하신 부분 어디에서 이것이 도출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기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 이해를 언급합니다만, 사실 이 분이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 이해를 따르고 있다고 말할 때 의도한 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이 육체적 죽음을 포함한다는 것을 하이데거가 따른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인간의 통일성과 전체성의 소멸"을 뜻한다는 뜻에서 이를 따른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건 번외의 이야긴데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을 두고 그것이 "영혼과 육체의 분리도 아니고 기관이 작동하지 않는 조용한 상태도 아니"라고 하셨지만 이건 그렇게 명확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을 생리적 기관(내지는 생리적 혼)이 작동하지 않는 조용한 상태(oblivion)로 보기도 합니다. 솔직히 '인간'의 통일성과 전체성의 소멸이라고 규정하는 부분은 굉장히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정기철의 논문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어떤 글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인용하지 않아서 알 길이 없네요.) 그리고 논문을 감사하게도 링크해주셔서 몹시 기대하면서 읽어보았는데, 전체적 논지도 그렇고 명확히 정기철은 "하이데거의 사상 속에는 생물학적 죽음이 주제가 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Cf. 209 f.). 도대체 논문의 어떤 부분을 근거로 정기철 선생님이 "펄쩍 뛰실 수준"의 왜곡을 했다는 건지요?

두 번째로 학회에다 계속 의견을 물어보아 '공정하게' 확인하자고 하는데, 도대체 어떤 멍청한 학회가 그런 일을 하겠어요. 어디까지나 학자들 간의 이견 대립인데 학회가 심판자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잘못 생각하시고 계셔요. 또 그렇게 권위에 호소한들 그 권위가 허수아비를 때린다면 이건 설상가상일 뿐이지, 나아지는 것은 없지 않나요? 결국 원전으로 돌아가셔서 논증하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Sophisten님이 잘 말씀해주셨으니 할말은 많지만 하지 않고 이만 줄일게요.

세 번째로 Youn님 독해가

라는 것은 너무나 생뚱맞네요. 도대체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인지요? 이건 YOUN님 글에 대한 본인 주장이니 대가에게 물어볼 필요도, 하이데거를 끌어올 필요도 없고 본인이 논증하시면 되는 부분이라 사료됩니다.

네 번째, 정말 이 부분이 조금 아찔한데요. 정기철 논문의 그 다음 단락을 인용하시면서 "병원에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소리치며 발광해본 적이 있거나, 진통제를 맞고 잠을 자고 나서야 죽음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었던 사람"을 예시로 드시면서 이게 마치 하이데거의 죽음 논의가 육체적 죽음을 포함하고 있다는 논거로 드시는 것 같은데, 정반대지요.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보세요. 육체적 죽음과 가까운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하이데거의 죽음 담론이 무의미할 것이라는 게 논지잖아요. 아파 죽겠는 사람한테는 차라리 의학적인 죽음 개념에 기초한 진통제 먹이는 게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의 본질 운운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는데도 왜 죽음의 본질에 대해 논해야하는가를 묻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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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제가 논쟁하시는 YOUN님과 Martin님 두 분께 제언하고 싶은 것은
육체의 죽음이 생물학적 죽음과 정말 같은 것이라고 하이데거가 보고 있는지,
조금 더 살펴봐달라는 건데요.

생물학적 죽음은 어디까지나 육체의 죽음을 생물학을 통해 분석한 것이라, 둘은 다를 것 같거든요? 제가 SZ를 3년 전에 읽어봐서 정말 거의 까먹었는데, 제 기억에 하이데거가 이걸 구분하고 있었던 것 같았어요.
전체적으로는 Tod 분석이겠지만, 구체적으로는 Sterben, Verenden, Ableben, das Ende des Lebenden, das Ende des Daseins 등을 잘 규명해주실 수 있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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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니힐리즘 관련해서 잘 이해가 안 되는 게, 삶을 보증할 영원한 형이상학적 본질이나 토대를 거부하면 그게 곧바로 니힐리즘이 되나요? 지금 인용하신 IEP의 니힐리즘, 그 중에 '실존주의적 니힐리즘'에서는 삶 자체가 무이고 무의미하고 부조리하다는 상당히 강한 주장을 하고 있는데요, 저걸 인용해 오셨다는 건 "니힐리즘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로 인용된 바와 같은 것을 뜻하고 계시다는 의미이지요? 그렇다면 Martin님께서는 "삶의 형이상학적 본질이나 토대가 없다"는 Youn님의 저 언급이 삶 일체가 무의미하고 부조리하다는 주장을 하거나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나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위에서도 “니체도 니힐리즘이냐”는 식의 가장 전형적인 오독 레퍼토리가 답습되었는데, 윤 선생님의 니힐리즘(-극복)은 니체보다 사르트르 실존주의의 시각을 따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삶의 본질과 토대는 없지만, 매순간 새로운 순간을 주목해야 한다(?)’는 결론이신 것 같아요. (아니라면 직접 선생님께서 수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긍정적 니힐리즘의 나름의 의의도 잘 알고 있지만, 하이데거는 사르트르를 혐오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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