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좀비 논증

차머스(David Chalmers)가 제시한 철학적 좀비(philosophical zombie) 논증은 물리주의 혹은 물질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고안된 사고실험이다.

일단 철학적 좀비 개념은 많은 물리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핵심적인 논제인 ‘수반 논제’(supervenience thesis)를 겨냥하고 있다. 수반 논제는 다음과 같다.

(S) 심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에 수반한다.

덧붙이자면, ‘수반한다’라는 술어가 약수반인지 강수반인지에 따라 (S)는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약수반과 강수반의 정의를 이용하여 (S)를 재정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WS) 심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에 약수반한다 ↔ 모든 가능세계 w와 개별자 x, y에 대해, w에서 x와 y가 모든 물리적 속성들을 공유한다면 x와 y는 w에서 모든 심리적 속성들을 공유한다.

(SS) 심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에 강수반한다 ↔ 모든 가능세계 w1, w2와 개별자 x, y에 대해, w1의 x와 w2의 y가 모든 물리적 속성들을 공유한다면 w1의 x와 w2의 y는 모든 심리적 속성들을 공유한다.1)

(WS)는 단순히 물리적 속성을 공유하면서 심리적 속성을 공유하지 않는 가능세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SS)는 두 대상이 서로 다른 가능세계에 있더라도 물리적 속성을 공유하기만 한다면 무조건 심리적 속성을 공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르게 말하면, (WS)는 기본적으로 같은 세계에 속하는 두 대상에 대한 논제이고, 따라서 양자가 w1에서 물리적 속성을 공유하더라도 세계가 달라지면 (예컨대 w2에서는) 심리적 속성을 공유하지 않을 가능성을 허용하는 반면, (SS)는 그러한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하간 이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S)가 양상적 주장이라는 점이고, 어떤 대상이 동일한 물리적 속성을 가지면서 다른 의식 상태를 가질 가능성을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부정한다는 점이다.

한편 차머스는 좀비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2) 철학적인 의미에서 좀비란 의식을 가진 존재와 모든 물리적 속성을 공유하면서도 의식만은 가지고 있지 않은 대상을 가리킨다. 나와 다른 가능세계에 쌍둥이가 하나 있다고 해보자. 쌍둥이의 신체는 세포 하나하나에서부터 오장육부와 두뇌에 이르기까지 나와 동일하다. 또 쌍둥이는 나와 행동적으로 동일하다. 그는 나와 똑같이 웃거나 울거나 화내거나 떠드는 행동을 하며, 초콜릿을 보면 군침을 흘리고 아스파라거스를 보면 인상을 찌푸리며, 얻어맞으면 맞은 부위를 감싸 쥐고 소리를 지른다. 즉 그는 나와 기능적으로 동일하다. 두 사람은 단 한 가지 지점에서 다른데, 이는 쌍둥이가 나와 달리 현상적 느낌(phenomenal feel)만은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얻어맞았을 때 나는 아픈 감각적 느낌을 의식에 떠올리는 반면, 쌍둥이에게는 그러한 느낌이 없다. 초콜릿을 먹을 때 나는 의식에 달콤쌉싸름한 감각을 느끼는 반면, 쌍둥이는 그러한 감각을 느끼지 않는다.

(이 좀비가 아니다.)

이런 좀비가 현실에 존재할 가능성은 당연히 희박하다. 의식이 없는 사람은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병리적 이상행동을 보이는 사람처럼) 의식이 있는 사람과 다분히 기능적으로 다를 것이며, 신체 내 신경 체계의 상태도 다를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러나 차머스의 논점은 좀비가 현실적이라는 점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구상 가능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좀비는 논리적 모순 없이 개념적으로 정합적이다.

상식적인 견지에서 봤을 때, 좀비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수반 논제 (S)를 논박할 반례를 하나 확보하게 되는 셈이다. 좀비가 논리적 모순 없이 상상 가능하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제 좀비를 가지고 강수반 논제에 대한 반례를 구성해 보자. 차머스에 의하면 좀비가 있는 가능세계(wz라 하자)가 존재한다. 세계 wi의 나 i와 좀비 가능세계 wz의 좀비 z는 모든 물리적 속성을 공유하지만 모든 심리적 속성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이 사례가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다면 (SS)는 틀렸으며, 따라서 심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에 강수반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약수반 논제에 대한 반례를 구성해보자. 나와 좀비가 공존하는 세계 wk가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가능세계 wk가 존재한다. 이는 (WS)에 대한 반례이다. 이렇다면 심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에 약수반하지 않는다.3)

물리주의자 입장에서는 이 논증을 반박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길을 택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예컨대 차머스가 ‘심리적 속성’이라는 개념을 잘못 쓰고 있다고 응수하는 것이다. 즉 ‘심리적 속성’이라는 용어는 그 의미상 ‘물리적 속성에 의해 완전하게 결정되어 있음’을 함축하고, 따라서 좀비는 개념적으로 모순되고 논리적으로 상상조차 불가능하다고 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좀비가 비정합적인 개념임을 보이는 것은 ‘둥근 사각형’이 비정합적인 개념임을 보이는 것보다 훨씬 어려워 보인다.


1)Kim, J., “‘Strong’ and ‘Global’ Supervenience Revisited”, Supervenience and Mind: Selected Philosophical Essays,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79-91, 80-81.
2) Chalmers, D., The Conscious Mi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94-97.
3) 차머스 자신이 명시적으로 강수반과 약수반 논제를 각각 비판하지는 않지만, 좀비 논증이 양쪽 모두에 적용될 수 있는 논증이라는 점을 차머스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 “P는 우주의 모든 미시물리적 진리의 연접[이다.] […] Q는 임의의 현상적 진리이다[.] Q가 어떤 개별자가 특정한 현상적 속성을 예화한다는 진리라면, P&~Q는 모든 것이 미시물리적으로 우리 세계와 같지만 문제의 개별자가 연관된 현상적 속성을 예화하지는 않는다는 진술이다. 이 경우, 세계가 좀비 세계이든 아니면 문제의 개별자가 그저 물리적으로 동일한 세계의 좀비이든 모두 P&~Q의 참을 보이기 위해 충분하다.” Chalmers, D., The Character of Consciousnes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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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소문으로만 듣던 좀비놈의 정체를 알게됐습니다. 당연히 그림의 좀비인줄 알았는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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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철학에서 데이빗슨과 김재권 교수를 통해 수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애를 먹은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차머스의 좀비 논증은 좀 황당하면서도 즐거움을 느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차머스 교수는 재미있는 글을 써서 인기가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뉴헤겔님의 글을 즐겁게 보는데 이유는 같은 주제로 쓰셔도 참 흥미롭고 읽기편하게 쓰신다고 느껴져서입니다.

차머스의 철학적 좀비 논증은 ‘물리적 동일성이 의식적 동일성은 아니다’를 지적함으로써, 물리주의가 갖는 맹점을 드러내는 매우 직관적인 예시입니다.
특히 강수반과 약수반 개념을 구별하여 겨냥한 점은 논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수반개념에서, 약수반은 동일한 세계 안에서 물리적 속성이 동일하다면 정신적 속성도 동일해야 한다는 조건을 갖지만, 강수반은 모든 가능 세계에서 그러해야 한다는 보다 강한 요구를합니다.

차머스는 이 논증을 통해, 어떤 가능세계 w가 존재하며 그곳에서는 물리적 사실(P)이 동일하지만, 의식(Q)은 그렇지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로써 그는 강수반을 위배하고, 나아가 모든 가능한 세계에서 P 이면 Q가 성립한다는 보편 양화(∀w) 조건, 즉 물리주의의 핵심 주장에 반론을 합니다.

하지만 뉴헤겔님도 충분히 잘 아시듯, 이 논증은 그 개념 자체가 애초에 어떤 형이상학적 지위를 가지는지를 더 정교하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알고있습니다.

이후 의식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걸로 아는데 제가 아직 의식은 공부를 못해서 여기까지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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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좀비 없습니다. 구성성분이 동일하면 기능은 동일하지요. 과학현상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구성성분이 동일하지부터 조사를 하지요.

그런데 물질적인 것이 힘이 없다는 인식 자체가 문제가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은 질량을 지닐뿐만 아니라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약력,강력, 전자기력, 중력이 그것이죠. 힘을 없고 질량만 지닌 물질은 없습니다. 이 물질들이 복합체로 창발되면 기본적인 힘들은 심적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인간도 인공지능도 그래서 심적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물심론을 주장합니다. 틀릴 수 없는 이론이고 이 물심론에 근거한 철학사를 저술했습니다. 물심론으로 세상 모든 층위의 객체를 설명할 수 있지요. 최근에 보니 신유물론 등이 있던데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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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수차례 말씀드렸지만, 현대 철학 이론에서 현대 과학과 양립불가능한 건 찾기가 꽤나 힘듭니다. 찾더라도 그 비양립성을 주장하는 게 꽤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요. 이미 수차례 말씀드렸으니 더 말씀드리는 게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차머스 같은 사람이 이런 기본적인 과학 지식도 없이 사고실험을 했다고 생각하시는 게 저로써는 이해가 안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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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좀비 없습니다. 구성성분이 동일하면 기능은 동일하지요.

저 개인적으로는 심리철학에 매우 과문합니다만, 차머스가 '철학적 좀비' 논제를 제시한 모티베이션은 물리주의를 반박하기 위한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이를 기각하기 위해 물리주의적 전제를 차용하는 것은 선결문제의 오류(begging the question)를 범하는 셈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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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누구글이든 무차별적으로 댓글을 달아 잘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현대 철학은 현대과학과 양립하다는 댓글을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그 글의 당사자군요.
저는 차머스라는 분을 모릅니다. 철학적으로 유명할 수 있지만 전문 과학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철학은 칸트가 가지말라는 이성의 능력을 너무 발동시키므로 이율배반적 결론을 양산합니다. 과학자는 이런 가설을 세울 수는 있지만 검증되지 않으면 가설이라고 고백합니다.
물질 동일성이 기능 동일성을 의미하는 한가지 예만 제시하지요. PC가 고장나면 os를 다시 깔아야 하지만 기존 부팅디스크와 동일 디스크로 교체하면 작동합니다.

모든 과학적 현상을 물리주의라는 말로 해석하시는군요.
저 친구들도 그랬습니다. 인공지능 불가능하다 인조세포 불가능하다. 저가 젊은 과학자 때부터 들어 왔지만 저는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리주의 이론에 의하기 때문이죠. 저는 해석학, 문학, 예술, 사회현상도 물리주의로 해석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는 여러 가능경로가 있지요.
저도 댓글을 통해 배우면서 저가 주장했지만 잘못 예측해던 경우를 통해서도 배웁니다. 서강올빼미 참여자들도 자신의 진술이 미래에 어떻게 바뀌었는지 기억하면 좋겧군요.
저는 저술속에서 역사적으로 뛰어난 철학자를 만났지만 그 사람들은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한계를 지닌 사랍들입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자신의 주장을 내어 놓아 과학자가 아이디어를 얻은 경우는 봤습니다. 저는 역사속의 철학자에게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왔습니다.
저도 부족할 수 있지만 저가 이 서강올빼미에 이야기되는 주제들을 비판없이 받아들일 이유가 있을까요?

연섭님들의 글을 보면 너무 많은 전제들이 있어요. 그래서 반박하려면 그걸 하나하나 논하면서 왜 그 전제들이 올바른 전제가 아닌지 말해야되는데, 그러려면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들어요. 그래도 에너지를 쓰면서 대화가 되면 할 이유라도 생기지만, 그렇게 에너지를 써서 말을 해도 대화가 진행이 안 되는 인상을 받습니다.

딱 한 가지 말하자면, 철학에 대한 편견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직 철학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실 수 있는 도구들을 갖고 있지 않으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제 제안은 -- 이미 수차례 말씀드렸지만 -- 과학철학이나 물리철학쪽을 보시면 조금 더 수월하게 철학에 입문을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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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분만큼이야 아니겠으나 저도 잠깐이나마 과학을 공부했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차머스가

철학적으로 유명할 수 있지만 전문 과학자라고 볼 수 없

다는 진술 안에 담긴 과학에 대한 은연 중의 우월의식, 그리고 철학에 대한 맹목적으로 보이는 편견을 철학도로써 참기 힘듭니다. (참고로 차머스는 인지과학 박사학위도 있습니다. 물론 저는 과학 박사학위가 좋은 철학자의 충분조건이라거나, 지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철학자가 되는 데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요) "철학적으로 유명하지만, 전문 과학자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심리철학에 대한 차머스의 진술을, 그것도 철학계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비판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진술을 기각할 이유가 되나요?

그리고, 당연히

서강올빼미에 이야기되는 주제들을 비판없이 받아들일 이유가 있

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댓글을 보니 도리어 선생님께서 물리주의를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계시고, 물리주의가 "당연히 옳"기 때문에 그것이 선결문제의 오류라는 제 반박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술속에서 역사적으로 뛰어난 철학자를 만났지만 그 사람들은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한계를 지닌 사랍들입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자신의 주장을 내어 놓아 과학자가 아이디어를 얻은 경우는 봤습니다. 저는 역사속의 철학자에게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왔습니다.

철학자는 '과학자의 자양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과학은 과학의 고유한 영역이 있고, 철학은 철학의 고유한 영역이 있습니다. 철학적 진술을 과학적 진술로 환원하여 생각하시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 흥미로운 과학적인 접근인지는 모르겠으나 건전한 철학적인 접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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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글이 좀 공격적이지요. 죄송합니다. 댓글은 품위가 없지만 직업, 학문, 사람에 편견이 없습니다. 저는 과학을 공부했지만 정당히 수준에 오르자 직장을 구했고 공학도 공부했고 그 과정에서 인지과학도 상담히 팠습니다. 이 덕분에 8년동안 철학에 도전할 힘을 얻었지요. 아시다시피 이렇게 옮겨다니면 우리나라에서 대접받기 쉽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저는 철밥통을 향한 태도에 반대의식을 지니고 있지요.
최근에 서강올빼미를 알게되어 저에게는 도움이 되었고 개방적인 토론분위기를 높게 봅니다. 사람에 대한 편견은 없지만 저의 삶의 태도가 있으니 이에 다르면 저도 모르게 비난하게 됩니다. 저는 철학도 진리를 추구다고 보는데 철학은 철학 나름의 방식이 있다는 태도에는 수긍하기 힘듭니다.
서강 올빼미를 통해서 보면 철학의 사유깊이는 상당히 깊습니다. 타학문에서 어렵게 정립된 방법론과 비교할 때 이들 방법론이 철학에서 나온 듯 합니다. 예를들어 객체지향컴퓨터언어는 철학자는 배우기 쉬울 겁니다. 일반 공학도는 정말 긴시간 교육후에 사용하거든요. 이런 능력은 회사를 차리거나 실무에 뛰어들 때 강력한 능력이 됩니다.
다만 사고실험을 현실과 비교하여 적절한 것을 선택하는 태도는 좀 부족한 듯 합니다. 저의 비판도 여기를 향하고 있으니 많은 분들을 자극한 듯 보입니다. 저가 여러학문을 전전했듯이 저도 더 유용하고 진리에 가까우면 그곳으로 갈 겁니다.
저의 철학은 하나의 주장은 아니며 적어도 과학적 원리를 깔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현상까지 집접됩니다. 사회현상 설명은 부확실할 수밖에 없지만 현상의 원리는 과학적으로 제시할 수 있지요. 빅히스토리 관점에서 철학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철학의 고고학 대신에 철학의 진화론이지요.
아직도 평평한 지구를 믿는 분들은 지구가 둥글다고 해도 무시하지요. 저가 평평한 지구를 믿는다는 사람에 속한다는 고집불통의 사람인가요? 저는 학문을 옮겨다닌 유목민으로 고집불통의 사람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서강올빼미의 많은 분들이 그렇게 권고를 하 내 자신을 성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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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입문자라 잘모르지만

수반이론을 비환원적 물리주의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 심리적 속성(감각질, 의식?)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되지만 물리적 속성 자체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제가 궁금한 부분은

인용한 위 문장은 철학적으로 당연한 문장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철학전공자가 아니라서, 저 주장이 철학적 입장마다 다른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인가요?

다시 말해, 형이상학적으로, 존재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과
논리적으로 모순 없이 사유되는 것이 같은 뜻인지 다른 뜻인지 궁금합니다..

항상 많이 배우고있습니다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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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dong 님 좋은 질문 감사드립니다. 일단 용어상으로 논리적 가능성과 형이상학적 가능성은 어느 종류의 법칙에 관여하느냐에 따라 구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논리적 법칙과 상충하지 않으면 논리적 가능성, 형이상학적 법칙과 상충하지 않으면 형이상학적 가능성을 갖는 셈이지요. 해서 전자의 경우 대략 “모순 없이 생각될 수 있다”는 말로 풀어쓸 수 있는데, 문제는 여기서 “형이상학적 법칙”이 무엇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법칙들을 포함하는지가 매우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어느 형이상학적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저 “형이상학적 가능성”이라는 말의 뜻은 천차만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본문에서 “좀비가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다”라는 말은 단순하게 “좀비가 존재하는 가능세계가 있다”라는 뜻으로 썼습니다만, 과연 논리적 가능성과 형이상학적 가능성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정확히 말해 형이상학적 가능성이라는 것이 논리적 가능성과 별개로 성립할 수 있는지는 논쟁거리입니다. (질문 덕분에 해당 주제에 관한 스탠퍼드 철학백과 항목을 참조하고 두 가지 가능성 개념을 좀더 명확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형이상학적 가능성이 논쟁거리이기 때문에, 두 가지 가능성을 구별함으로써 차머스의 좀비 논증을 반박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즉 어떤 대상을 모순 없이 생각할 수 있다고 해서 그 대상이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반박이 가능하고, 실제로 이 반박을 차머스도 다루고 있습니다. 한편 반대로 두 가지 가능성을 구별하는 일이 문제적이라고 말함으로써 재반론을 펴는 일도 가능합니다. 차머스는, 형이상학적 가능성이라는 개념은 정확히 무엇인지 해명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논리적 가능성과 변별된다고 딱 잘라 말하기도 힘들고, 나아가 임의적인 가능성의 종류를 지나치게 복잡하게 만드는 임의적인 구별이라고 반론합니다(Chalmers, 1996,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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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스스로도 논리적 가능성이 있으면 형이상학적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왔던 것 같은데,

원글과 다시 답변주신 내용 읽어보니
가능성 간 구분되는 지점에 대해 더 공부해보고싶단 생각이 듭니다!

친절하고 상세하게 답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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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프록시마 행성에서 철학사를 저술할 때 크립키를 만났습니다. 그는 2022 년에 죽어 프록시마 행성으로 왔고 철학사에서 대화를 나는 마지막 철학자옇지요.
그는 가능세계를 이야기 했습니다. 가능세계로 양상논리학의 진리를 부여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반박했지요. 가능세계는 없다. 현실세겨 하나만 있고 개체에 따라 가능한 경로는 있다. 가능세계는 가능한 경로로 치환되어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가정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원리를 따릅니다. 과학의 방정식은 동일하지만 초기조건이 따르다. 초기조건이 다르므로 그 객체가 그리는 경로는 다르다. 만일 과학의 방정식까지 다르면 가정법 문장 자체를 해석할 수 없다.
정리하면 가능세계는 가능경로로 바뀌어야하고 가능경로의 개념은 현실세게와 동일한 방정식이 적용되지만 초기조건이 다른 경우이다.
저의 철학사는 과학과 2차 문헌들을 재해석하여 문명의 발전사 같은 겁니다.
죽은자와 대화로 철학사를 전개했지만 크립키가 들어오는 바람에 가능세계를 조금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요. 현실에서 가능경로는 동일한 방정식이 적용되지만 문학예술에서는 방정식마저도 무시할 수 있으니 허구가 나타납니다. 보통 sf 소설이라고 하지요. 현실 속의 많은 소설들은 여전히 물리방정식은 그대로 유지시키지요. 현실에 바탕을 두어야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으니.
철학적 좀비는 물리방정식을 위배한 문학적 좀비일 뿐이다.

저가 프록시마 행성에서 철학사를 저술할 때 크립키를 만났습니다.

이건 선생님의 책 이야기죠? (읽어본 건 아니지만 너무 뜬금 없어서 검색을 좀 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 크립키는 적어도 우리 세계에서 잘 알려진 그 크립키는 아닌 것 같네요. 애초에 크립키가

가능세계로 양상논리학의 진리를 부여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부정확한 표현을 썼을 리도 없고, 가능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한 적도 없습니다.
이건 사실 Naming and Necessity 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습니다. 당시 크립키와 동시대에 양상논리의 의미론을 전개했던 데이빗 루이스의 가능세계 실재론을 대놓고 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크립키의 입장은 actualism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가정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원리를 따릅니다. 과학의 방정식은 동일하지만 초기조건이 따르다. 초기조건이 다르므로 그 객체가 그리는 경로는 다르다. 만일 과학의 방정식까지 다르면 가정법 문장 자체를 해석할 수 없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가정법적 조건문에 관한 표준적인 양상의미론은 이것보다 조건이 더 강합니다.
"P였더라면 Q였을 것이다"라는 가정법적 조건문에 관한 표준적인 의미론에 따르면
고려해야 하는 가능세계는 해당 조건문이 고려되는 현재 세계의 맥락의 정보를 최대한 유지한 채 P가 참인 가능세계에서 Q가 참이면 해당 문장은 참이라고 간주합니다.
애초에 이 얘기가 크립키가 놓쳤거나 몰랐을 이야기도 아닐 것이고, 현대 철학자들이 딱히 거부하는 주장도 아니라고 저는 생각됩니다. ("해석할 수 없다"라는 점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을 것 같군요)

물론, 철학적 좀비에 대한 시나리오를 상상할 수 있으니(conceivable) 형이상학적으로도 가능하다(metaphysically possible)는 주장 자체가 논란의 여지는 있습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상상가능성으로부터 형이상학적 가능성이 함축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반대는 보통 성립한다고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철학자들의 이 논쟁이 단순히 물리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에(사실 이 주장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좀비 시나리오는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정리되지는 않습니다.

기왕에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선생님이 다셨던 거의 모든 댓글은 단정적이고, 때때로 독단적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댓글에 대한 yhk9297님의 평가에 거의 동의합니다.

이곳은 단문이나 잠언을 남기고 공감을 얻는 커뮤니티가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진지하게 전공자들과 철학적 문제에 관해 고민해보고 싶으시다면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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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고맙습니다. P의 맥락을 최대한 유지한 채 세상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과학적으로 현재에 적용되는 법칙이나 자연법칙 방정식이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렇게 바라봅니다. 다만 초기 조건만 다릅니다.
철학도 세상을 예측하고 바르게 인식하는 방식이며 창조적 해석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논점을 잘 파악하셨지만 문제를 완벽히 착각한 댓글입니다. 챠머스의 논변에서 좀비와 원래 인간은 기능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 받아들여져 있습니다. (즉, 행동주의 심리학의 측면에서 좀비와 인간은 동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갖는 ‘현상적 의식’이라는 것이 결여된 좀비가 상상 가능하다면, 개념적으로 현상이란 심적 기능의 부분이 아니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챠머스의 논변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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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고맙습니다. 저는 차머스가 어떤 분이지 잘 몰랐습니다. 아침에 찾아 보니 그의 좀비는 현상적 인식만 다르다는 설명을 보았습니다. 님의 설명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사고실험을 하는 이유는 한두개의 핵심적 변수만 차이를 나게 두고 분석하려는 시도이지요.
모든 것은 동일하지만 현상만 다른 좀비를 도입해야 할 필요를 저는 1%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저가 전혀 생각할 수없는 좀비이니 깊게 찾아 보지도 않았다고 변명을 해야겠지요.
유용한 사고 실험을 설계 할 수없는 사람들어게서 나오는 생각의 결과는 차츰 잊혀집니다.
갈레레오의 자유낙하 사고 실험, 아인슈타인의 쌍둥이 가설, 데카르타의 악마 사고 실험등은 철학사에 기억될 것으로 보입니다. 저가 참머스 좀비를 늦게 알았지만 바로 잊어도 슬퍼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아마도 챠머스의 주장인, <좀비가 상상 가능하다> 자체에 대한 반론이 될 겁니다. 그 직관을 갖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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