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좀비 논증

조금 늦었지만 질문 하나 여쭙습니다.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라는 말과 “논리적으로 구상 가능하다”라는 말이 호환이 가능할 정도로 강하게 엮여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수학에서 리미트를 느슨하게 정의하여 사용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직관적으로 어떤 실수 a와 무한하게 가까운 a’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수가 정의된 체계에 의하면, 이러한 실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상상 가능성을 지니는 어떤 존재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있어, 상상 가능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존재 가능성을 지닌다고 보는 것이 맞는 관점인가 의심이 듭니다. 혹시 차머스나 그의 비판자들이 해당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한 내용이 있나요?

항상 흥미로운 주제를 올려주시고, 활동도 활발하게 해주셔서 써주신 글 읽으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미리 답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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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수학에서는 리미트를 더 엄밀하게 정의를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해석학에서는 리미트를 엡실론-델타로 정의해내고, 제가 보기에 더 이상 '느슨'하지 않습니다. 실해석학은 다음 강의가 유명합니다: https://analysisyawp.blogspot.com/. 화질이 조금 안 좋지만요. 여담으로 해석학 교재로 많이 쓰는 루딘의 책 (aka Baby Rudin) 은 꽤나 불친절합니다. 대학원생들이 학부 해석학 레퍼런스용으로 쓰게 만든 것이라서요. 물론 앱실론-델타 정의는 주로 수학과에서 다루지만, 알아두면 여러모로 도움이 됩니다. 특히 수리철학, 현대형이상학에서 종종 보이고, 칸트 2차 문헌에서도 쓰는 걸 봤네요.

제 짧은 지식으로는 상상 가능하면서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만일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면 상상불가능합니다. 만일 그게 상상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가 상상가능하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양진주의쪽으로 가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긴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잘 몰라서 더 코멘트를 못하겠네요.

보통 상상가능성과 엮이는 가능성은 논리적 가능성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가능성입니다. 형이상학적 가능성은 논리적 가능성보다 더 narrow한 개념입니다. 그러니깐 상상가능하면 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상상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형이상학적 가능성/필연성을 정의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Rosen - The Limits of Contingency 초반부에 어느 정도 이해를 돕기 위한 글을 써놨으니 그쪽으로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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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여기에 동의하며, 진짜로 그런지 의문이 듭니다. 만약 진짜로 그렇게 강하게 엮여 있다면, 수학/논리학 쪽에서는 '오해'라는 것이 없지 않을까요?

저는 수학자 그로텐디크(Grothendieck)가 57을 소수(prime number)로 잘못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57을 소수라고 "상상할 수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수학적/논리적으로는 거짓이지요. 저는 상상가능성에서 논리적 가능성으로 진행하는 논증이 그렇게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저도 엡실론-델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엡실론 델타에 의해 무한소는 불가능한데 수학적 해석학 지식이 없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부분을 ”느슨한 정의“라고 표현했습니다) 속에선 무한소가 상상 가능하다. 그렇다면 누구의 상상이 기준이 되어서 형이상학적 가능성과 직결되는가?” 라는 질문이 제가 하고싶었던 말이던 것 같습니다.
또한,

라고 한다면 상상가능성 역시 형이상학적 가능성과 독립적으로, 객관적 기준에 근거하여 정의되어야 하겠네요. 상상가능성과 형이상학적 가능성에 대한 글들을 좀 찾아봐야겠습니다.
친절하게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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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가능성이 가능성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점이 실제로 챠머스 논증에 대한 대표적인 응답입니다. 이를 이른바 불가능성의 상상 가능성이나 인식적 가능성의 상상 가능성에 기대어 응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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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을 정도로 강한 주장이라 근거를 제시하실 수 있으신지 궁금하네요. @abcde 님께서

되어야 한다라고 지적하셨지만, 제가 보기에 님이 저런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이미 정의가 마련되어 있어야하지 않나요? 논리적으로 주장과 근거를 제시하는 것과, 주장과 근거를 제시한다고 착각하면서 신념을 신념으로 맞받아치는건 다르니까요.

일단은 주장이 아닙니다. 질문을 다셨고, 제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을 알려드린 것 뿐입니다. 그리고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 즉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짧은 지식"이라는 말을 덧붙였지요. 이렇게 공격적인 말을 들을 만한 말을 한 것 같지는 않네요.

근데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개이면서 개가 아닌 것" 같은 것들인데 이걸 상상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앞서 @car_nap 님께서 언급하신 인식론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면 상상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만 얼마나 설득이 될진 모르겠네요.) 형이상학적으로 불가능한 건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지만서요. 예를 들어 철학적 좀비같은 경우는 형이상학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상상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정확히 무슨 말씀인진 모르겠지만, 제가 "상상 가능성," "가능성" 과 같은 용어들을 제대로 정의하지 않았다는 것에 불만을 표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답이 있습니다. 첫번째, 이 포스팅에서는 상상가능성과 가능성에 대해 이미 충분한 논의가 돼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제가 별개로 이 용어들을 정의할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둘째, 모든 철학적 용어들을 정의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이더는 Writing Book of the World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 cannot define ‘structure’. As we will see, a rich characterization can be given: connections to other concepts, theses about its behavior, and an official regimen- tation for talking about it. But none of this will add up to a definition. Indeed, I will argue in section 7.13 that structure is perfectly fundamental...

I know from bitter experience that philosophers are wary of this primitivism. Many times I have been asked (to murmuring general approval): “What on earth do you mean by ‘structure’??”.

Let’s be realistic about the extent and value of definitions. Philosophical concepts of interest are rarely reductively defined. Still more rarely does our understanding of such concepts rest on definitions (9, my emphasis).

세번째, 형이상학적 가능성이란 개념은 정의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높습니다. 이는 제가 앞서 언급한 Rosen - The limits of contingency에서도 나온 말입니다:

The best sort of explanation would be an informative definition: an explicit specification, framed in ordinary terms, of what it means to say that P is metaphysically necessary. Unfortunately, no such definition is readily available. But we know in advance that it must be possible to get along without one. For the fact is that no one comes to master the concept of metaphysical necessity in this way (14, my emphasis).

그나마 가능세계등으로 정의하긴 하지만 가능세계가 무엇인지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건 제게 너무 높은 기준을 요구하시는 것 같네요. 애초에 다른 분들이 이미 충분히 잘 쓰고 있는데 왜 저한테만 이러시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저한테 굉장히 공격적으로 나오시는 것 같은데, 정확히 이유는 모르겠네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는 제 신념으로 맞받아친 것이 아니고, 제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 (틀릴 수도 있지요) 을 도움이 되길 바라며 공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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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k9297 님, 답변 잘 읽었습니다. 제 비판이 공격적으로 느껴지셨다니 유감입니다만, 논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1. "주장이 아니었다"고 하셨지만, "상상 가능하면서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보편적이고 강력한 진술은, 그 자체로 철학적 '주장'입니다. 그것을 나중에 '어렴풋이 아는 것'으로 격하하는 것은, 자신이 했던 주장의 입증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2. '과도한 기준'을 요구한다고 하셨지만, 저는 '모든 용어를 정의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강한 주장은 그에 상응하는 근거를 동반한다'는, 철학 토론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상기시켰을 뿐입니다. 오히려 님이 인용한 사이더와 로젠의 말("정의하기 어렵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개념들에 대한 단정적 주장들은 강한 증명책임을 부여받는다는 제 입장을 뒷받침합니다.

  3. 제가 왜 님에게만 질문했냐고 물으셨지만, 저는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님께서 그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한 주장'(님의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뜻이 아니라, 주장의 강도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뜻입니다)을 하셨기 때문에 님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따라서 논의의 대상을 논의 참여자의 감정 문제로 전환하는 것은, 논점을 회피하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보여집니다. 저는 님에게 전혀 감정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 비판의 의도는 님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특정 '철학적 주장'이 제기되는 방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제기한 문제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철학적 토론에서, 특히 "A는 불가능하다"와 같이 매우 강한 주장을 할 때는, 그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그 근거를 제시하기 어렵다면(님이 인용하신 거장들의 말처럼), 저는 이러한 주장들에 근거를 제시하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선행 연구들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생산적인 토론과 정보공유에 기여할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제 질문의 의도가 이것이었음을 다른 분들이 이해하셨으리라 믿고,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진술이라고 꼭 주장일 필요는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주장은 여러개의 명제/문장들로 구성됩니다.

전 나중에 어렴풋이 아는 것으로 격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제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이와 같이 표현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주장도 아니기 때문에 입증책임도 없으며, 앞서 제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시했기 때문에 회피하는것 같지도 않습니다.

의외로 철학에 대해서 얘기할 때 독단적인 진술은 꽤나 나옵니다. 특히 지식을 공유할 때 말이죠. 예를 들어 제가 Problem of Persistence에 대해서 논문을 쓸 때 라이프니츠 법칙을 공격하려고 했었는데, 교수님께서는 공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공격해서 성공하기 너무 어렵다는 이유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논증을 세우시지 않으셨습니다. 지식을 공유하고 계셨기 때문이지요. 철학에서는 할 게 너무 많기 때문에 일일히 다 질문하고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가끔은 독단적으로 전제들을 받아들이고 나아가야하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특히 연구자라면요. 물론 저는 지식 공유에 성공한 것 같지 않지만요.

전환한 것이 아니라 이해가 안 돼서 덧붙인 것 뿐입니다. 논점을 회피했다는 근거가 뭔지 모르겠네요.

일단 왜 제가 주장을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정확한 지식, 적어도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지식일 수 있다는 건 저도 인정합니다. 카르납님이 잘 설명해주셨지요.

뭐 감정적인 의도를 갖고 있지 않으시다니 알겠습니다만 더 완곡하게 표현할 법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철학 토론장이기 전에 커뮤니티니깐요.

+) 덧붙이자면, 전 올빼미에서는 부정확한 지식이라도 일단 공유하고 보면 좋다는 입장입니다. 만일 맞다면 좋은 거고, 틀리다면 이번처럼 잘 아시는 분이 수정해주실 테니깐요. 커뮤니티의 장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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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k9297 님, 재차 답변 감사합니다. 덕분에 님의 입장을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논점을 더욱 명확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 먼저, 제가 님의 진술을 왜 '주장'으로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님께서 '크립키에 따르면...' 혹은 '어떤 철학적 입장에 따르면...'과 같이 출처를 명시하여 지식을 전달하셨다면, 저 역시 그것을 '주장'이 아닌 '정보 공유'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님께서는 어떤 출처나 근거의 제시 없이, "상상 가능하면서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보편적이고 강력한 진술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형식의 발화는, 철학적 토론의 맥락에서,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2. 다음으로, '연구의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때로는 독단적으로 전제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님의 현실적인 고충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점에 대해 일부 동의합니다. 하지만 연구의 실용성을 위한 길은 독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논리적 형식과 전제를 모두 '일단 수용한 뒤', 그 안에서 논증들의 강점과 약점, 내재적 모순을 찾아내서 보강하거나 한계를 지적하고, 또 재구성하는 '내재적 비평'이야말로, 생산적이고 실용적인 철학적 탐구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님의 '실용적 독단'은 피할 수 없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 여러 실용적 선택지 중 님이 스스로 선택하신, 하나의 '편의적인' 방식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제가 마지막으로 드리고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자신이 '편의'를 위해 선택한 그 기준을, 그 선택에 동의하거나 전제하지 않은 상대방에게도 똑같이 적용하고 비판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 말입니다.

가령 러셀은 기술이론을 통해, 자연어를 논리적 기준 아래에서 평가한다면, 양화사를 사용해 재구성될 수 있으며, 이는 특정 경우에 더 큰 엄밀함을 준다는 하나의 '방법론'을 제안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생산적인 철학적 제안입니다. 그러나 저는 러셀이 자신의 논리적 기준이 자연어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모든 대화 상대방이 이 기준을 따라야만 한다고 강요하지도 않았다고 이해합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방법론'이 가진 '장점'을 논증했을 뿐입니다.

저는 이 논의가 더 이상 님 개인의 감정이나 태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철학적 토론이 성취할만한 효과적 공유방식이 얼마나 다양한가, 조심스럽게 상기하는 것이었음을 다른 분들이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생산적인 대화에 감사드리며, 제 논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가령 '출처나 근거 제시없이 보편적이고 강력한 진술을 한다면 주장을 하는 것이다' 와 같은 assertion이요.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습니다. 실용적 독단이 무슨 뜻인지도 이해를 못하겠고요. 왜 제가 이 전제를 제 편의를 위해 선택했다고 결론지으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여기서 마치시겠다니 저도 여기서 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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