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논쟁에 대한 단상

*저는 비트겐슈타인은 잘 모르고 카벨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은 더더욱 모릅니다만, 두 분의 글들을 읽어보고 몇 가지 쟁점에 대해 짧게 생각해본 바를 적어봅니다. 어떤 해석 방향 속에서도 틀린 ‘오독’이 있다면 비알못이라 그러려니 양해해주시고 틀린 부분을 젠틀하게 귀띔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철학이라는 활동 속에서 삶 속의 여러 언어게임을 유형화하고 문법을 드러내 보일 수 있으며 ‘조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망이 모든 언어게임의 목록을 나열한 후 이들을 ‘체계적으로’ 조망하는 작업이 아닌 이상에야 이 활동이 신적 관점을 전제할 필요는 없다. 철학 또한 많은 언어게임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따라서 언어의 문법들을 총체화할 수 있는 특권적 지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만 인정하면, 철학이 언어게임을 일목요연하게(übersichtlich)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2. 언어는 삶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언어게임들 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철학이라는 활동은 이 언어게임들에 우열관계를 설정하거나 하지 않고 그저 다양한 언어게임들을 기술할 뿐이다. 언어게임들을 이렇게 조망한다면, 형이상학적 물음들은 애초에 잘못 물어진 물음들임이 드러난다. 형이상학의 문제를 구성하는 어휘들은 일상의 언어게임으로부터 분리 고립되어 즉자적으로 세계를 기술하는 특권적인 개념으로 둔갑한다. 이런 점에서 형이상학적 물음들은 무의미하고 잘못 물어진 물음이다. 이런 흐름을 받아들인다면, 형이상학적 물음의 해소(dissolve)는 언어게임을 보여주는(show) 작업과 별개로 상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게임을 보여주는 활동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기로 유사-철학적 물음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다. (물론 이에 대한 문헌적 근거는 미약하다.)

  3. 그런데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인지의 문제(해석적 문제)와, 이런 전략이 형이상학적 물음을 해소하는 데 유용한 전략인지의 문제(철학적 문제)는 별개이다. 이제 나는 해석적 문제를 차치하고 철학적 문제에 대해 서술해보겠다. 위처럼 정식화된 형이상학 비판은 형이상학자에게 어떤 식의 소용이 있을까? 위의 말만 들은 형이상학자는 예컨대 이렇게 대꾸할지도 모른다. “그런 반박은 언어의 의미를 일상적 사용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한다. 그런 식의 비판은 자의적인 전제 위에서만 성립한다. 결국 당신은 형이상학적 물음을 해소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작업이 형이상학을 보다 정확히 겨냥하도록 그렇게 이해한다면, 위의 철학적 작업은 이를테면 다음처럼, 적어도 다음의 것과 유사한 형식을 지니도록 재구성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형이상학적 물음은 언어의 사용 방식이 유일하다는 가정, 즉 언어가 세계에 대한 기술만을 한다는 가정 위에 성립한다. 그런데 언어는 세계에 대한 기술을 위해서만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물음은 잘못 물어진 질문이다.” 이런 식의 반박은 형이상학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가정을 문제 삼음으로써, 입증 책임을 형이상학자에게 넘긴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로 이런 정식화는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문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벗어나나?), 그의 논지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한에서 형이상학적 물음을 ‘해소’하도록 구성되었다. 이렇게 된다면 ‘보여주는’ 작업과 ‘해소하는’ 작업은 명확히 분리되지 않는 것 같다.

(샛길로 빠지자면, 이런 식의 비판이 꼭 ‘모순’이라는 형태로만 기술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회의론에서는 이것이 모순을 지적하는 형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회의론이 의심이 가능하기 위한 전제를 의심한다는 지적은 여러 비트겐슈타인 해석자들이 받아들이는 이야기이다.)

  1. 그런데 저런 식의 비판이 철학적으로 얼마나 유용할까? 내 생각에 단순히 입증 책임을 돌리기만 한다면, 이런 비판은 형이상학자의 편에서도 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언어의 의미가 일상적 사용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가정 위에서만 성립한다. 그런데 언어의 의미는 일상적 사용으로 환원될 수 없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은 잘못 정식화된 작업이다.” 앞서의 비트겐슈타인적 비판과 지금의 형이상학자의 비판을 병렬시킨다면, 이는 언어의 의미가 사용이냐 의미체냐에 대한 ‘직관 싸움’으로 유도될 수 있어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직관 싸움은 단순히 어떤 언어게임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느냐를 넘어서 있는 문제이다.

  2. 내 생각에, 비트겐슈타인의 형이상학 비판이 “언어는 다양한 사용을 지닌다”와 “언어는 세계를 기술하는 도구이다” 사이의 단순한 직관 싸움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이 문제설정을 실용주의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양자의 언어관 중 무엇이 옳은가는 직관 싸움이라는 교착 상태를 벗어나 우리의 언어를 해명하는 데 둘 중 어떤 관점이 효력이 있는가의 문제에 달려 있다. 이제 실용주의적으로 비트겐슈타인주의자의 편을 들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언어의 의미에 사용 맥락을 벗어난 의미 추상체 같은 것을 상정하는 일은 언어를 해명하는 데 하나도 보탬 되는 것이 없다. 그런 형이상학적 전제는 설명적으로 별로 효력이 없는 쓸모없는 전제인 것이다. 그런 전제를 도입해서 쓸데없는 존재물을 상정하지 않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실제 삶 속에서 언어들이 어떻게 ‘유의미하게’ (이 단어가 의미체를 상정하는 것 같다면 한번 ‘의미적으로sinnhaft’라고 해보자) 쓰이는지 조망하고 드러내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는, ‘실용주의’가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를 잘 드러내는지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비트겐슈타인 식의 작업을 철학적으로 강화할 좋은 도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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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쟁의 끝은 어디인가...! 조만간 저도 논쟁에 참전하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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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몇 가지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정말 '입증 책임 떠넘기기'의 작업이라면, 이런 비판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적 사용이 다른 사용보다 우선적이다."라는 가정을 전제한 채 논의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자들, 당신들이 하는 말이 나에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으니 설명을 좀 해달라."라고 물음을 던지는 거니까요. 비트겐슈타인 본인은 아무런 '존재론적 개입(ontological commitment)'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질문하는 위치에 서 있는 상태인 거죠.

오히려

이렇게 되면 정말 '직관 싸움'의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요. '실용성(utility)'이란 굉장히 폭넓은 개념인데, 이론의 실용성을 평가할 때 사용되는 건 주로 '검증가능성', '반증가능성', '설명력', '정합성', '단순성' 같은 기준들이잖아요? 이런 기준으로 비트겐슈타인주의자와 형이상학자 사이에서 어느 쪽이 우열인지 평가한다는 건, 결국 '사용 의미론(use-theory of meaning)'과 '지시 의미론(referential theory of meaning)'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이론적으로 가치가 있는지 따지는 셈이겠죠. 근데 이런 구도는 절대 비트겐슈타인이 원하지 않았을 대립이라서요. 결국 각각의 기준들도 철학자가 어떤 이론적 직관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평가될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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