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성과 특수성의 대립에 관한 통속적 니체 해석과 그에 대한 비판

전통적으로 사회철학 내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주제는 보편성(공동체/사회)과 특수성(개인)의 대립이다. 아직도 이 문제에 관해서 각기 다른 준거점을 갖고 많은 사람이 의견을 내고 있는 것이 사회철학의 현주소이다. 이 대주제의 기원은 물론 고대철학까지도 거슬러 올라가지만, 철학적으로 규명해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로 문제를 제기한 대표 철학자는 칸트와 니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이 준거점은 전통적으로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보편적 규범에 더 관심을 갖는 것으로 보이는 칸트와 자기 형성의 자유에 주안점을 두는 니체가 그것이다. 둘 사이에 물론 공통점도 분명히 있지만, 칸트는 "각 개인이 어떻게 서로 갈등 관계에 빠지지 않고 공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집중하여 "인간 상호 관계를 규율할 수 있는 보편적 규범"을 정당화하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면, 니체는 "각 개인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에 집중하여 그에게 중요한 것은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보편과 특수 모두 버릴 수 없는 인간이 보기에, 칸트와 니체는 아주 상극의 철학이며, 어느 한쪽이 절대화되어 '칸트냐 니체냐'의 양자택일의 선택 기로에 놓인다면 파멸의 길에 이른다. 즉, " 규범적 보편성이 개인의 특수한 존재 방식을 무시하고 모든 개인을 보편성 아래 복속시킴으로써 각 개인을 동질화 시키려 할 경우", 반대로 "각 개인이 규범적 보편성을 자신에 대한 동질화 억압으로 보고 이에 대한 전면적인 해방을 통해 자신만의 특수성을 추구하는 경우"가 '칸트냐 니체냐'의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인 것이며, 보편과 특수가 화해 불가능한 상호 대립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통적 해석은 정당한 해석인가? "니체의 자유 개념은 자유를 개인의 자기 관계로만 한정할 뿐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어떻게 규율될 수 있는가에 대한 아무런 대안이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른 특수성을 갖는 각 개인이 어떻게 공동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지가 불투명하다" (문성훈, 2001)는 주장은 타당한가?

그러한 전통적인 해석은 사회철학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니체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받아들여졌다. 특히 니체 해석에 밑바탕이 된 카우프만과 네하마스가 이러한 해석, 즉 '니체는 예외적 개인의 번창에만 관심있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철학'이라는 해석을 제공했다. 이후 현대 니체 연구자인 레이터, 안셀피어슨은 그와 유사한 해석, '니체 철학은 사회와 사회를 구성하는 대중에게 무관심하고, 그의 철학 속에서 사회는 예외적 개인 산출의 수단으로서만 가치를 지닌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Leite, B., 2002; 2012a; 2012b) 하지만 이렇게 니체를 비-공동체 혹은 반-공동체 철학, 혹은 정치철학이 부재한 철학, 반 정치철학적 철학(a/anti-communitarian, a/anti-political philosophy)으로 읽는 전통적 독해에 반대하여 2000년 이후에 영미철학계에서 다양한 해석 라인이 나타났다. 그중 보편과 특수, 공동체와 개인의 대립 양상에 한정해 얘기해보자면 크게 두 해석 라인이 있다. 한쪽은 전통적 해석을 완전히 뒤집는 해석으로, 니체에게 주안점은 특수가 아니라 오히려 보편이라는 해석이다. (Young, J., 1992; 2006; 2010) 이 해석에 따르면 ① 니체의 근본적인 고려 사항은 공동체의 번영이고, 공동체의 번영이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니체는 전체로서의 사회에 관심 가질뿐만 아니라 그 관심은 개인에 대한 관심보다도 우선한다. ② 물론 니체가 예외적 개인을 높게 가치 평가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해석 라인은 앞선 두 해석 라인을 종합하여, 니체 철학을 보편을 우선시하는 혹은 특수를 우선시하는 철학으로 독해하는 것은 정합적이지 않고 보편과 특수, 공동체와 개인은 상호 의존적이면서도 각각의 가치를 가진다는 견해이다. (Clark, M., 1990; 1999; 2015)

이러한 논의들은 '니체 철학으로는 보편성을 담보할 수 없고, 공동체 철학을 만들 수 없다'는 전형적인 비판에 반격할 장소를 마련해준다. 예를 들어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어떻게 규율될 수 있는가에 대한 아무런 대안이 없다"는 날선 비판에는 ① 힘에의 의지의 상호적이고 아곤적인 성격, ② 『차라투스트라』를 위시한 많은 저작에서 나타나는 니체의 이상사회, 이상적 인간의 비-압제적인 성격 등을 가지고 재비판할 수 있다. 힘에의 의지는 그 성격상 a. 힘에의 의지의 구조는 무정형적인 힘의 혼란이 아닌 어떤 구조화된 역동성을 받아들인다. b. 힘은 저항을 수반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극복하는 힘은 필수적으로 대항하는 힘(counter-power)과 연관된다. 대항하는 힘/저항이 제거되거나 무력화된다면 힘은 더 이상 힘이 아니다. 또한 각각의 극복과 저항은 단순한 반발이 아닌 미분화된 형태의 대항하는 힘을 형성한다. c. 동시에 힘에의 의지에 내재한 아곤적 절제는 안정적이고 획일화된 혹은 보편적일 수 없고, 갈등에서만 나타나지만, 아곤적 힘 내에는 법과 절제가 내재하여 있다. 아곤적 관계의 상호적인 구조에 따라 경쟁하는 힘은 그들 각각의 한계를 정함으로써 상대방의 절멸이 아닌 역동적 포메이션(특정 위치에나 특정 방식으로 형성된 형성물)을 발생시킨다. ② 『차라투스트라』의 주인공 차라투스트라(이하 Z)는 는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기보다는 타인들에게 영감을 주려고 한다. 통치를 위한 힘(=위대한 것을 명하는 일/≒지배)을 갖추는 것이 a. 타인에게 원칙과 규범을 하향식으로 규정짓는 것과 b. 강압적으로 그들을 지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은 (Za, 2, 22)에서 잘 드러난다. Z에게 요구되는 것은 강력한 힘의 행사를 의미하는 '온갖 명령을 하기 위한 사자의 목소리'가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 세계를 이끌어가고 폭풍을 일으키는 '잔잔함'이다. Z의 인류 극복의 프로젝트에 적절한 통치와 일반적인 통치와는 분명한 차이는 시장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Z, 1, 12) 그는 분명하게 억압하는 유형에 거부하며, 그가 원하는 바는 사람들이 번영하고 창조적인 삶을 살도록 명령하는 것도, 새로운 서판을 채택하도록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명령은 힘으로 타인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권력에의 욕망은 Z의 비판의 대상이다. (Z, 3, 10) 그가 말하려는 '베푸는 덕'은 정치적 통치의 전형적 형태를 대체한다. (Z, 1, 22) 또 다른 비판 "서로 다른 특수성을 갖는 각 개인이 어떻게 공동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지가 불투명하다"는 비판에도 다양한 반박이 가능하다. 이에 관해서 길게 설명하긴 힘들지만, 이와 같은 비판은 우선 니체의 보편적 참정권에 대한 래디컬한 개념에 대한 호의적 태도, 정치학과 경제학에 대한 언급, 유럽 정치와 사회에 대한 예리한 관찰자로서의 모습 등을 무시하고 있다. 또한 통속적인 견해와 달리 니체는 오히려 분명히 법과 제도를 포기하는 것이 데카당스의 한 형태라고 진단한다. (TI, 편력 39)

니체에 관한 사회철학적으로 통속적인 견해를 비판할 수 있는 많은 담론들이 형성되었지만 아직 한국 사회에 별로 소개·도입되지 않았다. 또한 동시에 정치철학자로서의 니체 자체가 논쟁거리가 된 것이 고작 해봐야 30년 가까이 됐으니 풀어내야 할 것도, 넘어서야 할 벽들도 많아 보인다. 예를 들어 많은 이들이 니체를 반민주주의자 혹은 민주주의 혐오자로 알고 있지만, 분명히 중기의 니체는 민주주의에 옹호적이었고 또 그 이후에는 반민주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이 많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니체를 초기·중기·후기의 니체로 나누어서 시기에 따른 입장 차이를 인정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 단절 지점은 어떻게 설명해낼 것인가? 애초에 시기 구분에 따라 한 사람의 사상을 나눌 수는 있는가? 해석도 해석이지만 번역에 관해서도 문제 될 것이 있다. 한국의 니체전집은 Wille zur Macht(will to power)를 힘에의 의지로 번역했으나. 그러나 니체 그리고 힘에의 의지를 정치철학적으로 사유할 때, 물론 현실 정치권력(대통령, 의회 등)과는 상관이 없더라도 Wille zur Macht(will to power)를 힘에의 의지보다는 권력에의 의지 혹은 권력 의지가 적절해 보일 때도 많다.

어쨌든 이렇게 통속적 견해를 넘어서 니체를 해석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유의미한 일이다. 내가 해석하는 힘에의 의지는 사회를 보편과 특수와 같은 이분법으로 바라보길 거부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정치사회 철학의 시선을 탈피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편과 특수라는 대립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낡았고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 받아들여지는 현재에도 니체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이에 더해 니체를 기반으로 한 철학자로 푸코, 들뢰즈 등이 대표적으로 꼽히는데, 이들이 니체의 발전된 버전으로 여겨지는 이유 중 하나는 에고이즘적인 니체를 정치사회철학으로까지 저변을 넓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론 그들에게 독창적이고 개별적인 철학이 없다는 것은 아니나, 니체 철학에 무언가를 덧붙이지 않고 그 자체 내에서 정치사회철학을 구성해낼 수 있다면 니체를 해석할 때 굳이 그들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압축적으로 글을 쓰다보니 논리적 허점이나 구멍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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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주제인 것 같아요. 저도 많은 부분 동의하는 바입니다. 소크라테스의 개별적이고 고유한 지식욕이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주류 가치관을 형성하는 과학주의를 낳았다는 점에서 이 소크라테스식 낙관적 합리주의의 허무주의적 속성을 폭로하면서 소크라테스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소크라테스가 전통적인 귀족주의 체계에서부터 전무하던 하나의 완전히 새로운 가치체계로의 전환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는 몹시 칭송하기도 하잖아요? 어떤 점에서 니체는 언제나 소크라테스, 파울루스 같은 개인의 영웅적 작용이 사회적으로 유의미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의 작용과 사회적 반향은 말씀하신 것처럼 대립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까요.

그런데, 정치철학적 함축을 강조하면서 Macht를 권력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니체철학의 일반론적 관점에서는 권력이란 번역어의 채택이 오히려 그의 철학을 상당히 축소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듭니다. 자연의 생동하는 힘이 단지 정치적 형식을 갖추고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테제가 니체에게서 성립한다면 권력이라고 번역하는데 아무 무리가 없겠지만, 니체는 개별적이고 특화된 형식의 힘을 강조하기보다는 분절되지 않은 힘을 강조하고 있으니까요. 설령 이 힘이 반드시 개별적인 형식을 갖추고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해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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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한 가지 사소한 질문인데,

푸코나 들뢰즈조차 사실 '공동체 철학'을 제시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두 사람이 기존의 사회 규범을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분석을 수행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어떻게 규율될 수 있는가?"나 "서로 다른 특수성을 갖는 각 개인이 어떻게 공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가?" 같은 물음에 직접 대답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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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동의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니체전집에서 번역어를 선택할 때에도 이런 문제가 발생했던걸로 압니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힘에의 의지로 굳혀져서 그 이후의 대부분의 국내논문은 힘에의 의지라고 표현하는 듯합니다.
다만 제가 말하려고 의도한 것은, 이렇게 굳혀진 상황이지만 때로는 유동적으로 힘을 권력으로 바꿔보는게 어떠한가? 입니다. 저는 전집이 나온 이후에 공부를 한 아주 후속세대이다보니 힘에의 의지가 익숙한데, 공부를 계속 하다보니 너무 고착시킬 필요도 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런 말을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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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사실 그 둘에 대해 왈가왈부할만큼 잘 알지 못해서 답변하기 민망하네요. 미진하지만 답변해보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푸코나 들뢰즈 또한 전통적 의미의 정치철학자(예를들어 홉스, 롤스 등)에 비하면 그러한 물음에 직접 답변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 것같아요.
다만 저 구절에서 제가 의도한 바는 사회철학 담론 내에서 니체는 완전히 개인주의 철학으로 읽히는 경향이 지배적인 반면에, 푸코나 들뢰즈는 그보다는 비교적 더 공동체 철학으로 읽히는 것 같아요. 예를들어 푸코, 들뢰즈는 맑스주의 연구에서도 여전히 하나의 도구나 소스로 참조되는 것을 보면, 최소한 더 공동체 철학으로 활용되거나 더 용이하게 해석될 여지가 많다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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