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4달 전, 나의 논문 「감각적 확실성과 지표적 표현의 문제」1에 관한 평론2이 게시되었다. 논문 전반의 논의를 꼼꼼하게 검토하면서 그 의의를 온당하게 평가하면서도 논문을 둘러싼 일련의 비판점들을 날카롭게 제시하는 이 논평에서, 윤유석은 ‘대용어 이론 독법’이 하나의 헤겔 해석으로서 설명력을 갖기 위해 풀어야 할 과제로 다음을 제시하였다.
특별히, 이러한 ‘해석상 난점’으로 제시될 수 있는 부분 중 하나가 「감각적 확실성」에서 「오성」으로의 이행 과정이다. 헤겔은 자신의 전체 체계가 소위 ‘변증법(Dialektik)’이라는 방법에 따라 이전의 논의에서 이후의 논의로 점차 이행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행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다. 만일 대용어 이론 독법이 헤겔의 텍스트에 대한 주석적으로 설득력 있는 독법이라면, 대용어 이론 독법은 「감각적 확실성」에서 「오성」으로의 이행 과정을 충실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변증법에 대한 논의 속에서 대용어 이론 독법이 어떻게 자리 잡을 수 있는지가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대용어 이론 독법이 지표사의 의미를 설명하는 하나의 강력한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대용어 이론 독법 속에 ‘감각적 확실성’이라는 의식 경험에서 ‘지각’이라는 의식 경험으로의 이행이 담겨 있는지가 매우 의문스럽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대용어 이론 독법을 통해 「감각적 확실성」에서 「오성」으로의 변증법적 이행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 가능한가?
헤겔 저작에 등장하는 각 단계는 ‘변증법적’으로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이 이행이 어떻게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이행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실로 헤겔 연구자들 사이에서 매우 난해한 논쟁거리이다. 이에 본 글에서는, 논문에서 소개되고 옹호된 해석이 어떻게 『정신현상학』에서 제기되는 이행의 문제를 설득력 있게 풀 수 있는지 간략하게 해명해보고자 한다. 한편 「감각적 확실성」에서 「오성」으로의 이행을 해명하는 데에는 의식에 관한 최초의 두 장 전반과 더불어 적어도 「오성」 장의 초반부라는 광범위한 내용의 검토를 요하는데, 그 대신에 「감각적 확실성」에서 「지각」으로의 이행의 가능성을 해설하는 것으로도 이것이 하나의 헤겔 해석으로서 충분한 역량을 지닌다는 점을 보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일단 구체적인 논의에 앞서 『정신현상학』 내에서 이행을 둘러싼 일반적인 논쟁거리 하나를 간략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홀게이트와 헨리히를 비롯한 일련의 헤겔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정신현상학』의 이행은 의식 자신이 아닌 우리, 즉 의식의 관찰자인 현상학자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점이 정신현상학의 이행이 논리학의 이행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논리학에서는 다루어지고 있는 범주가 논리적 전개를 거쳐 직접적으로 다른 형태가 되는 반면, 현상학에서 새로운 의식으로 이행하는 것은 철학자이다(Houlgate, 2006: 273-274).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행이 현상학자에 의해 이루어지더라도 그 근거는 외삽된 계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식의 내적인 전개 과정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감각적 확실성에서 지각으로 옮겨가는 것이 의식 자신이 아닌 우리 철학자라고 하더라도, 이행의 필연성은 감각적 확실성 자체의 논리에 의해 보장된다(Houlgate, 2005: 57; Houlgate, 2013: 43-44). “우리가 하는 것은 선행하는 [의식] 형태의 경험에서 암시적으로 있는 새 형태를 명시적으로 되게 하는 것일 뿐[이다.]”(Houlgate, 2005: 57) 그리하여 『정신현상학』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어찌 되었건 의식 형태의 전환을 의식 자신의 내적 논리로부터 설명해내야 하며, 당면한 과제에서 추론주의적 독법의 성공3은 의식의 첫 번째 이행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설명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추론주의 독법의 관점에서 감각적 확실성으로부터 지각으로의 이행을 다루기 위해서는, 논문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브랜덤의 또 다른 논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브랜덤에 의하면 「감각적 확실성」은 두 가지 논증을 내포하는데, 하나는 분류적 합리성(classificatory rationality)에 대한 논증이며 다른 하나는 회상적 합리성(recollective rationality)에 대한 논증이다. 논문은 감각적 개별자와 지표적 언어라는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 후자의 논증만을 다룬 반면(김주용, 2020: 91), 감각적 확실성에서 지각으로의 이행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전자의 분류적 합리성에 대한 논증을 검토해야 한다. 분류적 합리성이야말로 이행의 단초이자 「지각」 장에서 명시적으로 주제화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Brandom, 2019: 135).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분류적 합리성의 단초는 지표적 표현의 개항을 다른 개항과 구별할 때 나타난다. 처음에 밤을 참된 지금으로 받아들인 감각적 확실성은 날이 새서 해가 뜨자 자신이 ‘지금’으로 의미했던 것을 더 이상 같은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금은 더 이상 밤이 아니라 낮이다. 게다가 의식이 다시금 낮을 새롭게 지금으로 받아들여도 해가 지면 낮은 더 이상 지금이 아니게 된다. “가리켜진 것은 지금, 이 지금이다. 지금, 그것은 가리켜짐으로써 이미 존재하기를 멈춘다. 존재하는 지금은 가리켜진 지금과는 다른 것이며, 우리는 지금이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 지금일 뿐이라는 점을 본다. 우리에게 가리켜진 대로의 지금은 있었던 지금[ein gewesenes]이며, 이것이 지금의 진리이다[.]”(Hegel, 1986: 164, 번역 수정, 원저자 강조)
물론 위에서 사용된 ‘밤’, ‘낮’을 비롯하여 「감각적 확실성」 장에 등장하는 ‘집’, ‘나무’ 등 보편 개념은 의식의 언어가 아니라 철학자의 언어이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그에 상응하는 구별 능력을 전제해야 한다. 실제로 의식은 태양을 보든 달을 보든 바위를 보든 똑같이 ‘이것’이라고 말할 뿐이지만, 각 상황에서 발화된 여러 이것-개항들의 차이를 자각하기에 이른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각 세 가지 경우에 알파벳 첨자를 붙여 표시해보자면, 의식은 이것a, 이것b, 이것c 사이의 차이를 자각하고 구별해야 한다. 감각적 확실성이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은 이것a이 이것b과 다르고 이것c과도 다르다는 점이다. 이는 ‘이것’의 내용이 약한 의미에서나마 규정성을 지닌다는 점을 보여주는 단초이며, 보편적 원리가 감각적 확실성에 개입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는 이것a과 이것b이 비(非)이것c이라는 점에서 공통된 종으로 분류됨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순전히 직접성의 예시들을 서로 구별할 수 있다는 것, 이 예시들을 단일한 종류의 권위의 상이한 사례들로 본다는 것은 이미 약한 의미에서 이들을 암시적으로 분류하고, 비교하고 특징화한다는 것이다.”(Brandom, 2019: 122)
직접적 의식은 이것-개항들의 차이뿐만이 아니라 이들 사이의 기초적인 논리적 관계 또한 전제해야 한다. 예컨대 태양은 바위와 다를지언정 양립할 수 있지만 달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양립할 수도 없다. 이는 이것a과 이것b 사이에 배제 관계가 성립한다는 점을 뜻하며, 각각의 이것에 대한 인식이 순전한 차이보다 강한 의미의 분류 기능을 전제해야 함을 뜻한다. 헤겔은 “대립”(entgegensetzen)이나 “소멸”(verschwinden) 등의 표현을 써서 이를 나타낸다.
두 진리는 동일한 보증[Beglaubigung]을 지니는데, 그것은 봄의 직접성 그리고 양자의 앎에 대해 공통의 확신과 단언을 지닌다. 그러나 한 쪽의 진리는 다른 쪽의 진리 속에서 소멸한다. (Hegel, 1986: 161, 번역 수정)
두 개의 이것-개항이 동일한 관찰 순간에 동시에 참일 수 없다는 것은, 둘 중 하나를 승인함으로써 다른 하나를 거부해야 함을 뜻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각 이것에 대한 지식은 처음에 무규정적인 순수 직접지처럼 보였을지라도, 상호 구별과 관계 맺음을 통해 비로소 성립하는 보편적 규정성의 산물이라는 점이 검토 과정에서 드러난다. 결국 감각 개별자의 인식에서 기초적인 분류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감각 개별자가 이미 보편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부정을 통해 존재하는 단순한 것,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비[非]이것[Nichtdieses]이면서 또한 이것에도 저것에도 무차별적으로[gleichgültig] 존재하는 것을 우리는 보편자라고 부른다. 이에 보편자가 진정한 감각적 확실성의 참이 되는 것이다. (Hegel, 1986: 159, 번역 수정, 원저자 강조)
이제 이행이 어떤 근거에서 일어나는지가 명확하다. 「감각적 확실성」에서 드러난 교훈은, 감각적 개별자에 대한 직접적 인식이 가능하려면 개별자들을 동종(同種)이나 이종(異種)으로 분류하고 상호간에 배제 및 공존 관계 등을 성립시키는 보편적 원리의 개입, 즉 “보편성으로서의 반복가능성”(Brandom, 2019: 135)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직접적 확실성은 참을 붙들지 못하는데, 그 진리가 보편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성은 이것만을 취하려 한다. 반면 지각은 지각에게 존재하는 것을 보편자로 취한다. 보편성이 지각의 원리 일반인 것처럼 자기 내에서 직접적으로 구별되는 지각의 계기들도 보편적인바, 자아도 보편적 자아이며 대상도 보편적 대상이다. (Hegel, 1986: 171, 번역 수정, 원저자 강조)
다름이 아니라 방금 언급한 보편적 반복가능성의 문제인 인식 내용들 사이의 무차별적인(gleichgültig) 차이, 상호 배제와 양립 등 여하한 관계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곳은 바로 지각이다.
사물은 α) 무차별적인[gleichgültige] 수동적 보편성, 다수 성질들 혹은 물질들의 또한[das Auch]이며, β) 또 단순한 부정 혹은 일자[一者], 대립하는 성질들의 배제 작용이기도 하고 γ) 다수 성질들 자체, 첫 두 계기들의 관계, 무차별적 요소들과 관계 맺고 그 안에서 일련의 구별들을 펼쳐내는 부정이다. (Hegel, 1986: 175, 번역 수정)
『정신현상학』의 첫 장에서 간략하게만 언급되었던 문제는 「지각」에서 대상과 성질, 그리고 성질과 성질 사이의 관계 문제로 명시화된다. 성질들은 처음에 하나의 대상 안에서 서로 무차별적으로 공존하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서로를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상호 배제적인 관계이기도 하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처럼 부정에 매개된 대상-성질의 구조가 내포하는 모순이 지각의 변증법을 구동하는 핵심 주제이다. 「지각」 장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위 구절은 감각적 확실성의 변증법에서 간략하게 언급되었던 주제들이 지각에 이르러 소상히 논의된다는 점을 잘 드러내준다.
정리하자면, 「감각적 확실성」에서 「지각」으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논리적 단초는 브랜덤이 “분류적 반복가능성 논증”이라 부르는 감각적 확실성의 변증법에서 찾을 수 있다. 앞장에서 이 주제는 개별자에 대한 직접적 인식이 보편성에 매개되어 있다는 점을 보이는 하나의 논증으로서 작동하며, 「지각」 장은 이 분류적 합리성의 명시화된 의식 형태로서 등장한다. 이 주제가 지니는 함의와 문제점, 즉 인식 내용들 사이에서 작동하는 분류적 반복가능성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성격을 지니고 어떤 문젯거리들을 배태하는지는 「지각」 장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상의 논의는 추론주의적 헤겔 해석이 변증법적 이행의 논리적 필연성을 보이기에 충분한 설명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대한 하나의 예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주용, 「감각적 확실성과 지표적 표현의 문제」, 『헤겔연구』 제48호, 한국헤겔학회, 2020, 73-100.
윤유석, 「[이 논문이 대단하다!] 지표사 이론으로 독해한 헤겔의 철학: 김주용의 「감각적 확실성과 지표적 표현의 문제」」, URL: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2022, 최종 접속일: 2022.05.25.
Graeser, A., “Zu Hegels Portrait der sinnlichen Gewißheit”, G. W. 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2. Aufl., hrsg. von Otto Pöggeler und Dietmar Köhler, Berlin: Akademie Verlag, 2006.
Hegel, G. W. F., Phänomenologie des Geistes, Werke in zwanzig Bänden 5, Frankfurt: Suhrkamp, 1986; 『정신현상학』, 제1권, 임석진 역, 지식산업사, 1982.
Houlgate, S., An Introduction to Hegel: Freedom, Truth and History, 2nd. ed., Oxford: Blackwell Publishing, 2005.
Houlgate, S., The Opening of Hegel’s Logic: From Being to Infinity, West Lafayette, Indiana: Purdue University Press, 2006.
Houlgate, S., Hegel’s Phenomenology of Spirit, London: Bloomsbury, 2013.
Brandom, R., A Spirit of Trust: A Reading of Hegel’s Phenomenology, Cambridge: The Belknap Press, 2019.
1)김주용, 「감각적 확실성과 지표적 표현의 문제」, 『헤겔연구』 제48호, 한국헤겔학회, 2020, 73-100.
2)윤유석, 「[이 논문이 대단하다!] 지표사 이론으로 독해한 헤겔의 철학: 김주용의 「감각적 확실성과 지표적 표현의 문제」」, URL: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2022, 최종 접속일: 2022.05.25.
3)논문에서는 「감각적 확실성」 장에서 지표사를 통한 개별자 인식의 가능성을 규명해내는 것을 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브랜덤 식의 독법에 ‘대용어 이론 독법’이라는 명칭을 붙였지만, 다음 장으로의 이행이 문제가 되는 국면에서는 논문의 주제를 넘어서는 논점들을 다루어야 하는 까닭에 ‘추론주의적 독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
4)「감각적 확실성」은 지표사와 순수 개별자에 관한 인식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이 장에는 그 경험을 기술하기 위해 보편적인 술어들이 계속해서 동원된다. 예컨대 “지금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지금은 밤이다”가 제시되고, “여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여기에 나무가 있다”는 식의 대답이 등장한다(Hegel, 1986: 158, 161). 그러나 이 “밤”, “나무”, “낮” 같은 개념들은 의식의 언어가 아니라 의식의 관찰자인 우리가 의식의 경험을 명시적으로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이다(Houlgate, 2013: 32; Graeser, 2006: 40). 이 문제는 『정신현상학』에 병존하는 의식과 우리라는 두 가지 관점의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일단 우리가 의식의 경험을 명시적으로 기술하기 위해 의식 자신의 것이 아닌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의식의 변증법의 전개 과정은 철학자의 것이 아닌 의식에 고유한 것이라는 점만을 지적해두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