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변증법에서 최초의 이행은 어떻게 가능한가?: 추론주의적 해석의 관점에서

약 4달 전, 나의 논문 「감각적 확실성과 지표적 표현의 문제」1에 관한 평론2이 게시되었다. 논문 전반의 논의를 꼼꼼하게 검토하면서 그 의의를 온당하게 평가하면서도 논문을 둘러싼 일련의 비판점들을 날카롭게 제시하는 이 논평에서, 윤유석은 ‘대용어 이론 독법’이 하나의 헤겔 해석으로서 설명력을 갖기 위해 풀어야 할 과제로 다음을 제시하였다.

특별히, 이러한 ‘해석상 난점’으로 제시될 수 있는 부분 중 하나가 「감각적 확실성」에서 「오성」으로의 이행 과정이다. 헤겔은 자신의 전체 체계가 소위 ‘변증법(Dialektik)’이라는 방법에 따라 이전의 논의에서 이후의 논의로 점차 이행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행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다. 만일 대용어 이론 독법이 헤겔의 텍스트에 대한 주석적으로 설득력 있는 독법이라면, 대용어 이론 독법은 「감각적 확실성」에서 「오성」으로의 이행 과정을 충실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변증법에 대한 논의 속에서 대용어 이론 독법이 어떻게 자리 잡을 수 있는지가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대용어 이론 독법이 지표사의 의미를 설명하는 하나의 강력한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대용어 이론 독법 속에 ‘감각적 확실성’이라는 의식 경험에서 ‘지각’이라는 의식 경험으로의 이행이 담겨 있는지가 매우 의문스럽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대용어 이론 독법을 통해 「감각적 확실성」에서 「오성」으로의 변증법적 이행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 가능한가?

헤겔 저작에 등장하는 각 단계는 ‘변증법적’으로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이 이행이 어떻게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이행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실로 헤겔 연구자들 사이에서 매우 난해한 논쟁거리이다. 이에 본 글에서는, 논문에서 소개되고 옹호된 해석이 어떻게 『정신현상학』에서 제기되는 이행의 문제를 설득력 있게 풀 수 있는지 간략하게 해명해보고자 한다. 한편 「감각적 확실성」에서 「오성」으로의 이행을 해명하는 데에는 의식에 관한 최초의 두 장 전반과 더불어 적어도 「오성」 장의 초반부라는 광범위한 내용의 검토를 요하는데, 그 대신에 「감각적 확실성」에서 「지각」으로의 이행의 가능성을 해설하는 것으로도 이것이 하나의 헤겔 해석으로서 충분한 역량을 지닌다는 점을 보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일단 구체적인 논의에 앞서 『정신현상학』 내에서 이행을 둘러싼 일반적인 논쟁거리 하나를 간략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홀게이트와 헨리히를 비롯한 일련의 헤겔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정신현상학』의 이행은 의식 자신이 아닌 우리, 즉 의식의 관찰자인 현상학자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점이 정신현상학의 이행이 논리학의 이행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논리학에서는 다루어지고 있는 범주가 논리적 전개를 거쳐 직접적으로 다른 형태가 되는 반면, 현상학에서 새로운 의식으로 이행하는 것은 철학자이다(Houlgate, 2006: 273-274).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행이 현상학자에 의해 이루어지더라도 그 근거는 외삽된 계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식의 내적인 전개 과정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감각적 확실성에서 지각으로 옮겨가는 것이 의식 자신이 아닌 우리 철학자라고 하더라도, 이행의 필연성은 감각적 확실성 자체의 논리에 의해 보장된다(Houlgate, 2005: 57; Houlgate, 2013: 43-44). “우리가 하는 것은 선행하는 [의식] 형태의 경험에서 암시적으로 있는 새 형태를 명시적으로 되게 하는 것일 뿐[이다.]”(Houlgate, 2005: 57) 그리하여 『정신현상학』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어찌 되었건 의식 형태의 전환을 의식 자신의 내적 논리로부터 설명해내야 하며, 당면한 과제에서 추론주의적 독법의 성공3은 의식의 첫 번째 이행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설명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추론주의 독법의 관점에서 감각적 확실성으로부터 지각으로의 이행을 다루기 위해서는, 논문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브랜덤의 또 다른 논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브랜덤에 의하면 「감각적 확실성」은 두 가지 논증을 내포하는데, 하나는 분류적 합리성(classificatory rationality)에 대한 논증이며 다른 하나는 회상적 합리성(recollective rationality)에 대한 논증이다. 논문은 감각적 개별자와 지표적 언어라는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 후자의 논증만을 다룬 반면(김주용, 2020: 91), 감각적 확실성에서 지각으로의 이행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전자의 분류적 합리성에 대한 논증을 검토해야 한다. 분류적 합리성이야말로 이행의 단초이자 「지각」 장에서 명시적으로 주제화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Brandom, 2019: 135).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분류적 합리성의 단초는 지표적 표현의 개항을 다른 개항과 구별할 때 나타난다. 처음에 밤을 참된 지금으로 받아들인 감각적 확실성은 날이 새서 해가 뜨자 자신이 ‘지금’으로 의미했던 것을 더 이상 같은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금은 더 이상 밤이 아니라 낮이다. 게다가 의식이 다시금 낮을 새롭게 지금으로 받아들여도 해가 지면 낮은 더 이상 지금이 아니게 된다. “가리켜진 것은 지금, 이 지금이다. 지금, 그것은 가리켜짐으로써 이미 존재하기를 멈춘다. 존재하는 지금은 가리켜진 지금과는 다른 것이며, 우리는 지금이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 지금일 뿐이라는 점을 본다. 우리에게 가리켜진 대로의 지금은 있었던 지금[ein gewesenes]이며, 이것이 지금의 진리이다[.]”(Hegel, 1986: 164, 번역 수정, 원저자 강조)

물론 위에서 사용된 ‘밤’, ‘낮’을 비롯하여 「감각적 확실성」 장에 등장하는 ‘집’, ‘나무’ 등 보편 개념은 의식의 언어가 아니라 철학자의 언어이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그에 상응하는 구별 능력을 전제해야 한다. 실제로 의식은 태양을 보든 달을 보든 바위를 보든 똑같이 ‘이것’이라고 말할 뿐이지만, 각 상황에서 발화된 여러 이것-개항들의 차이를 자각하기에 이른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각 세 가지 경우에 알파벳 첨자를 붙여 표시해보자면, 의식은 이것a, 이것b, 이것c 사이의 차이를 자각하고 구별해야 한다. 감각적 확실성이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은 이것a이 이것b과 다르고 이것c과도 다르다는 점이다. 이는 ‘이것’의 내용이 약한 의미에서나마 규정성을 지닌다는 점을 보여주는 단초이며, 보편적 원리가 감각적 확실성에 개입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는 이것a과 이것b이 비(非)이것c이라는 점에서 공통된 종으로 분류됨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순전히 직접성의 예시들을 서로 구별할 수 있다는 것, 이 예시들을 단일한 종류의 권위의 상이한 사례들로 본다는 것은 이미 약한 의미에서 이들을 암시적으로 분류하고, 비교하고 특징화한다는 것이다.”(Brandom, 2019: 122)

직접적 의식은 이것-개항들의 차이뿐만이 아니라 이들 사이의 기초적인 논리적 관계 또한 전제해야 한다. 예컨대 태양은 바위와 다를지언정 양립할 수 있지만 달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양립할 수도 없다. 이는 이것a과 이것b 사이에 배제 관계가 성립한다는 점을 뜻하며, 각각의 이것에 대한 인식이 순전한 차이보다 강한 의미의 분류 기능을 전제해야 함을 뜻한다. 헤겔은 “대립”(entgegensetzen)이나 “소멸”(verschwinden) 등의 표현을 써서 이를 나타낸다.

두 진리는 동일한 보증[Beglaubigung]을 지니는데, 그것은 봄의 직접성 그리고 양자의 앎에 대해 공통의 확신과 단언을 지닌다. 그러나 한 쪽의 진리는 다른 쪽의 진리 속에서 소멸한다. (Hegel, 1986: 161, 번역 수정)

두 개의 이것-개항이 동일한 관찰 순간에 동시에 참일 수 없다는 것은, 둘 중 하나를 승인함으로써 다른 하나를 거부해야 함을 뜻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각 이것에 대한 지식은 처음에 무규정적인 순수 직접지처럼 보였을지라도, 상호 구별과 관계 맺음을 통해 비로소 성립하는 보편적 규정성의 산물이라는 점이 검토 과정에서 드러난다. 결국 감각 개별자의 인식에서 기초적인 분류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감각 개별자가 이미 보편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부정을 통해 존재하는 단순한 것,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非]이것[Nichtdieses]이면서 또한 이것에도 저것에도 무차별적으로[gleichgültig] 존재하는 것을 우리는 보편자라고 부른다. 이에 보편자가 진정한 감각적 확실성의 참이 되는 것이다. (Hegel, 1986: 159, 번역 수정, 원저자 강조)

이제 이행이 어떤 근거에서 일어나는지가 명확하다. 「감각적 확실성」에서 드러난 교훈은, 감각적 개별자에 대한 직접적 인식이 가능하려면 개별자들을 동종(同種)이나 이종(異種)으로 분류하고 상호간에 배제 및 공존 관계 등을 성립시키는 보편적 원리의 개입, 즉 “보편성으로서의 반복가능성”(Brandom, 2019: 135)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직접적 확실성은 참을 붙들지 못하는데, 그 진리가 보편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성은 이것만을 취하려 한다. 반면 지각은 지각에게 존재하는 것을 보편자로 취한다. 보편성이 지각의 원리 일반인 것처럼 자기 내에서 직접적으로 구별되는 지각의 계기들도 보편적인바, 자아도 보편적 자아이며 대상도 보편적 대상이다. (Hegel, 1986: 171, 번역 수정, 원저자 강조)

다름이 아니라 방금 언급한 보편적 반복가능성의 문제인 인식 내용들 사이의 무차별적인(gleichgültig) 차이, 상호 배제와 양립 등 여하한 관계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곳은 바로 지각이다.

사물은 α) 무차별적인[gleichgültige] 수동적 보편성, 다수 성질들 혹은 물질들의 또한[das Auch]이며, β) 또 단순한 부정 혹은 일자[一者], 대립하는 성질들의 배제 작용이기도 하고 γ) 다수 성질들 자체, 첫 두 계기들의 관계, 무차별적 요소들과 관계 맺고 그 안에서 일련의 구별들을 펼쳐내는 부정이다. (Hegel, 1986: 175, 번역 수정)

『정신현상학』의 첫 장에서 간략하게만 언급되었던 문제는 「지각」에서 대상과 성질, 그리고 성질과 성질 사이의 관계 문제로 명시화된다. 성질들은 처음에 하나의 대상 안에서 서로 무차별적으로 공존하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서로를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상호 배제적인 관계이기도 하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처럼 부정에 매개된 대상-성질의 구조가 내포하는 모순이 지각의 변증법을 구동하는 핵심 주제이다. 「지각」 장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위 구절은 감각적 확실성의 변증법에서 간략하게 언급되었던 주제들이 지각에 이르러 소상히 논의된다는 점을 잘 드러내준다.

정리하자면, 「감각적 확실성」에서 「지각」으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논리적 단초는 브랜덤이 “분류적 반복가능성 논증”이라 부르는 감각적 확실성의 변증법에서 찾을 수 있다. 앞장에서 이 주제는 개별자에 대한 직접적 인식이 보편성에 매개되어 있다는 점을 보이는 하나의 논증으로서 작동하며, 「지각」 장은 이 분류적 합리성의 명시화된 의식 형태로서 등장한다. 이 주제가 지니는 함의와 문제점, 즉 인식 내용들 사이에서 작동하는 분류적 반복가능성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성격을 지니고 어떤 문젯거리들을 배태하는지는 「지각」 장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상의 논의는 추론주의적 헤겔 해석이 변증법적 이행의 논리적 필연성을 보이기에 충분한 설명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대한 하나의 예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주용, 「감각적 확실성과 지표적 표현의 문제」, 『헤겔연구』 제48호, 한국헤겔학회, 2020, 73-100.
윤유석, 「[이 논문이 대단하다!] 지표사 이론으로 독해한 헤겔의 철학: 김주용의 「감각적 확실성과 지표적 표현의 문제」」, URL: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2022, 최종 접속일: 2022.05.25.

Graeser, A., “Zu Hegels Portrait der sinnlichen Gewißheit”, G. W. 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2. Aufl., hrsg. von Otto Pöggeler und Dietmar Köhler, Berlin: Akademie Verlag, 2006.
Hegel, G. W. F., Phänomenologie des Geistes, Werke in zwanzig Bänden 5, Frankfurt: Suhrkamp, 1986; 『정신현상학』, 제1권, 임석진 역, 지식산업사, 1982.
Houlgate, S., An Introduction to Hegel: Freedom, Truth and History, 2nd. ed., Oxford: Blackwell Publishing, 2005.
Houlgate, S., The Opening of Hegel’s Logic: From Being to Infinity, West Lafayette, Indiana: Purdue University Press, 2006.
Houlgate, S., Hegel’s Phenomenology of Spirit, London: Bloomsbury, 2013.
Brandom, R., A Spirit of Trust: A Reading of Hegel’s Phenomenology, Cambridge: The Belknap Press, 2019.


1)김주용, 「감각적 확실성과 지표적 표현의 문제」, 『헤겔연구』 제48호, 한국헤겔학회, 2020, 73-100.
2)윤유석, 「[이 논문이 대단하다!] 지표사 이론으로 독해한 헤겔의 철학: 김주용의 「감각적 확실성과 지표적 표현의 문제」」, URL: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2022, 최종 접속일: 2022.05.25.
3)논문에서는 「감각적 확실성」 장에서 지표사를 통한 개별자 인식의 가능성을 규명해내는 것을 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브랜덤 식의 독법에 ‘대용어 이론 독법’이라는 명칭을 붙였지만, 다음 장으로의 이행이 문제가 되는 국면에서는 논문의 주제를 넘어서는 논점들을 다루어야 하는 까닭에 ‘추론주의적 독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
4)「감각적 확실성」은 지표사와 순수 개별자에 관한 인식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이 장에는 그 경험을 기술하기 위해 보편적인 술어들이 계속해서 동원된다. 예컨대 “지금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지금은 밤이다”가 제시되고, “여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여기에 나무가 있다”는 식의 대답이 등장한다(Hegel, 1986: 158, 161). 그러나 이 “밤”, “나무”, “낮” 같은 개념들은 의식의 언어가 아니라 의식의 관찰자인 우리가 의식의 경험을 명시적으로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이다(Houlgate, 2013: 32; Graeser, 2006: 40). 이 문제는 『정신현상학』에 병존하는 의식과 우리라는 두 가지 관점의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일단 우리가 의식의 경험을 명시적으로 기술하기 위해 의식 자신의 것이 아닌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의식의 변증법의 전개 과정은 철학자의 것이 아닌 의식에 고유한 것이라는 점만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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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헤겔에 문외한이지만, 저도 예전에 이 이행의 문제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어 큰 도움이 됩니다. 물론 의문만 가지고 헤겔을 더 읽지는 않았으니 부끄럽네요. 제가 어설픈 잡식으로 다시 한 번 질문을 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좀 깨쳐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밤이다'와 '지금은 낮이다'가 다르다는 것을 애초에 어떻게 의식이 알게 되는지가 여전히 저에게는 명확치가 않아요. 분류적 합리성이 이미 이 초보단계의 의식에게 있다는 건 이 의식에게 자의식이 이미 있어야만 가능한 일 아닐까요? 분명 두 표상 사이에 어떤 지속하는 공통 분모가 있어야만 둘 간의 비교도 가능할테니까요. 그러나 자의식과 같은 반성 활동을 이 초보 단계의 의식이 하고 있는 것이라면, 헤겔은 자신이 비판하는 데카르트의 자아 같은 것을 스스로 전제하게 되는 것 아닌가요? 다시 말해 헤겔의 의식 개념도 마찬가지로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의식과 대상 세계의 이원론을 전제해야만 하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감각이 정말 그저 단칭적인 것에 머물러야 한다면, 그것은 마치 카메라 렌즈에 상들이 비치는 것과 같이, 혹은 거울이나 호숫가에 상이 비치는 것과 같이, 이 상에 대한 아무런 메타적 인지없이 이 상에서 저 상으로 순전히 넘어갈 뿐인 과정의 연속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만약 의식이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음을, 그 상들을 구분하는 것이라면, 이미 의식은 이 상과 저 상의 차이를 '자신에게 뜬' 어떤 것으로서 구분해야만 하고, 그렇다면 이는 다시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전제해야만 가능한 것이며, 종래에는 자신과 대상의 차이도 전제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의식의 변증이 '우리', 즉 철학자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그런 식으로 서술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지금 문제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의식의 관점에서 출발해서도 이것이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에 있잖아요?

제 질문이 불명확한 부분이 많을테니 차근차근 도와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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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설명해주신 내용이 어느 정도 납득은 되지만, 그래도 '변증법'이라는 헤겔의 전체 방법론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추론주의적 해석이 정당한지가 조금 의문스러워요. 특정한 규정 자체 안에 내재된 모순과 부정을 통해 이행을 설명하려는 헤겔의 변증법 기획을 만족시키려면, 추론주의적 해석은 단순히 감각적 확실성이 대한 '하나의 이론'에 그쳐서는 안 되고, 그 안에 모순과 부정을 담고 있는 '변증법의 필연적 계기'가 되어야 할 것 같아서요. 여기에 설명해주신 내용을 조금 더 다듬으면 어떻게든 추론주의적 해석을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 저에게는 어떻게 '변증법'이라는 방법론 속에 추론주의를 집어넣을 수 있을지가 아주 선명하지는 않아요. (사실, 이건 헤겔 본인이 자기 방법론과 세부적인 논의들을 개판으로 맞춰 놓은 책임이 크다고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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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저 글을 쓰고 부대로 복귀했다 다시 나와서, 이제야 질문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주신 질문이 ‘의식’과 ‘우리’에 관한 악명 높은 논쟁거리에 가 닿는지라 이것저것 찾아보고 여러 가지 고민을 하느라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일단 제 답변이 수많은 해석들 중 하나에 불과하고 얼마든지 반박될 수 있다는 점부터 말씀드립니다.

제 생각에는 말씀하신 대로, 헤겔의 논증은 의식이 개별자를 인식하기 위해 저 분류적 합리성을 전제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의식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편성으로서의 분류적 합리성과 회상 가능성을 전제하고, 나아가 대상을 통일하는 의식의 능동적인 작용도 전제하며 자기의식도 전제합니다. 브랜덤의 용어로 말하자면 헤겔은 의식이 앎을 갖기 위해 이런저런 “진정한 지식 조건”(Genuine Knowledge Condition)들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Brandom, 2019: 107).

그런데 이런 조건들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런 조건들이 의식의 관점에서 논의의 출발점에 전제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서 말한 분류적 합리성이나 넓게는 매개, 부정, 보편자가 저런 전제조건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은 순수한 개별자를 직접적으로 포착하려는 의식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난 이후입니다. 의식이 밤인 지금과 낮인 지금을 구별하게 되는 것은 의식이 처음부터 분류적 합리성을 자각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밤을 ‘지금’으로서 붙들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가 붙잡은 것을 놓쳐버리는 경험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식의 조건들은 의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제가 아닌 결론부에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의식이 ‘밤’, ‘낮’, ‘보편자’ 같은 개념을 사용해서 자신의 경험을 기술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지금’이라고 사념하고(meinen) 있었던 것이 소멸하고 ‘지금’은 당초 자기가 사념했던 무언가가 아니게 된다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깨닫는다고 보아야 합니다(Houlgate, 2013: 36). 이와 관련해서 덧붙여야 할 것은, 의식이 이런 초보적인 좌절을 경험할 만한 정도의 메타적 인지는 논의의 출발점에서도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헤겔에 의하면 “의식은 한편으로는 대상에 대한 의식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 다시 말해 의식에게 참인 것에 대한 의식과 그에 대한 지(知)의 의식이기 때문”(PhG, 77)입니다. “우리가 확실성과 진리간의 순수하고 단순한 동일성에 머물러 있다면, 이 의식은 진보해 나갈 수 없을 것이며, 더욱이 동일한 이유로 해서 그것은 더 이상 의식이나 知일 수 없을 것이다.”(Hyppolite, 1986: 110) 그러니까 대상에 대한 의식과 자기 자신의 앎에 대한 의식(헤겔의 용어로는 대타존재와 즉자존재에 대한 의식)이 없는 의식은 의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이 요소가 의식 스스로 자신의 진리 규준을 검토하고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척도가 됩니다. 의식이 ‘우리’의 언어처럼 자기의 진리 기준을 명시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척도는 의식이 외재적이 아닌 내재적인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Hyppolite, 1986: 30-31 참조). 구체적으로 감각적 확실성의 초두에서 의식의 지는 “순수 존재 혹은 단순한 직접성”이며 대상 역시 “순수한 이것 혹은 개별자”인데(PhG, 82-83), 이것이 감각적 확실성을 평가하는 척도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감각적 확실성의 의식은 “자신과 대상의 차이”를 전제한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여하간 헤겔의 논의 방식은 의식이 학문의 길로 들어서는 도정에서 이른바 “진정한 지식 조건”들을 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칸트 식의 초월적 논증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식은 K 유형의 경험을 갖고 있다.
p가 없다면 K도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p이다.

위 논증은 어떤 경험을 하기 위해서 p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p를 논증의 전제로 두고 출발하지는 않지요. p는 경험의 전제이지만 논증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물론 초월적 논증의 모델이 헤겔의 저작을 독해하는 데 얼마만큼 타당한지는 비판적으로 검토해봐야 할 문제이긴 합니다.1

이처럼 헤겔의 논증이 이런 다층적인 구조를 띠고 있는 이유는 정신현상학의 전개 과정이 의식의 고양인 동시에 정신의 회상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지닌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각 장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조건들’은 의식의 변화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신이 의식의 각 형태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정신현상학은 순전히 의식이 정신으로 변모하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의식이 사실 자신이 정신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인 것이지요.


1)찰스 테일러나 피핀이 헤겔을 일종의 유사-초월철학자로 이해하는 반면, 홀게이트는 이런 독해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Taylor(1972), Pippin(1989), Houlgate(2015) 참조.


참고문헌

Hegel, G. W. F., Phänomenologie des Geistes, Werke in zwanzig Bänden 3, Frankfurt: Suhrkamp, 1986.
Houlgate, S., Hegel’s Phenomenology of Spirit, London: Bloomsbury, 2013.
Houlgate, S., “Is Hegel’s Phenomenology of Spirit an Essay in Transcendental Argument?” The Transcendental Turn, ed. Sebasian Gardner, Matthew Gris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173-193.
Hyppolite, J., 『헤겔의 정신현상학』, 제1권, 이종철, 김상환 역, 문예출판사, 1986.
Pippin, R., Hegel’s Idealism: the Satisfactions of Self-Consciousnes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
Taylor, Ch., “The Opening Arguments of the Phenomenology”, Hegel: A Collection of Critical Essays, ed. Alasdair MacIntyre, London: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72, 151-188.
Wieland, W., “Hegels Dialektik der sinnlichen Gewißheit”, Materialien zu Hegels Phänomenologie des Geistes, Frankfurt: Suhrkamp, 1973, 6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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