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역사는 오독의 역사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새로운 철학자들이 언제나 과거의 거인들을 오독하면서 등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독이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창조적 오독을 통해 기존 철학에서는 없었던 통찰이 생겨나기도 한다. 로티의 데리다 해석이 바로 이러한 창조적 오독의 좋은 사례다. 로티는 「글쓰기로서의 철학: 데리다에 관한 에세이」라는 유명한 글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매우 독창적인 방식으로 해석한다. 그는 데리다가 철학 전체를 일종의 '글쓰기(writing)' 활동으로 파악하였다고 설명한다.
데리다는 […] 철학에 대해서는 해줄 말이 대단히 많은 것이다. 그의 저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다음과 같은 물음에 대답하고 있다고 간주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철학은 실제로 일종의 글쓰기이다라고 볼 때, 이 제안이 왜 그렇게 거센 저항을 받는가?" 그의 저술에서 이 물음은 좀더 구체적인 형태의 물음으로 바뀐다. "이와 같이 특징짓는 것을 반대하는 철학자들은 '글쓰기'란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글쓰기라는 발상은 그들은 왜 그토록 공격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로티, 1996: 223)
즉, 로티에 따르면, 데리다는 철학을 통해 형이상학적 실재를 그려낼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인물이다. 그는 철학자들이 제시하고자 하는 '엄격한 논증(rigorous argument)'과 우리가 일상적으로 떠올리는 '사적 판타지(private fantasy)'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데리다에게 철학이란 더 이상 숭고하고, 공적이고, 초월론적인 활동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자아', '세계', '지식', '도덕', '종교'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해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는 새로운 판타지를 만들어내고자 매 순간 텍스트를 써내려가는 작업이 철학일 뿐이다. 로티는 자신의 해석을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서 이끌어낸다.
로티의 『그라마톨로지』 인용
그러므로 좋은 글쓰기와 나쁜 글쓰기가 있다. 좋고 자연스러운 것은 가슴과 영혼 속에 담겨 있는 신의 새김이요, 심술 궃고 예술적인 것은 신체의 바깥으로 추방당한 테크닉이다. 플라톤적인 도식의 변형이 잘도 들어맞게 된다. 마치 양심의 소리와 육신의 소리가 있듯이, 영혼의 글쓰기와 육신의 글쓰기, 내적인 글쓰기와 외적인 글쓰기, 양심의 글쓰기와 정념의 글쓰기 […] 등으로 말이다.
따라서 좋은 글쓰기는 언제나 이렇게 이해되어 왔다. 그것들은 창조되었건 않았건 간에 자연이나 자연법의 테두리 내에 있으며, 무엇보다도 영원히 현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며, 이해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므로 좋은 글쓰기는 전체의 테두리 내에서 이해되었으며, 한 권이나 한 꾸러미의 책 속에 담겨졌다. 책이라는 아이디어는 완결되거나 미완이거나 간에 기표(the signifier)들이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는 아이디어다. 만일 기의(the signified)에 의해 구성되는 어떤 전체가 미리 존재해서 그 문자와 기호들을 지도하며 그 관념성이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면, 이와 같은 기표들의 전체는 하나의 전체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언제나 자연적 전체를 지시하는 책이라는 아이디어는 글쓰기의 취지와는 근본적으로 낯선 것이다. […] 만일 책과 텍스트를 내가 구별해 말할 수 있다면, 지금 모든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바와 같은 책의 파괴는 텍스트의 겉껍질을 벗기는 일이라고 나는 말하겠다. (로티, 1996: 225-226 재인용)
여기서 로티는 '책'과 '텍스트'라는 개념쌍에 주목한다. 그는 '글쓰기'라는 활동이 책보다는 텍스트를 생산하는 활동이라고 지적한다. "언제나 자연적 전체를 지시하는 책이라는 아이디어는 글쓰기의 취지와는 근본적으로 낯선 것이다."(로티, 1996: 226 재인용) 즉, 책은 바깥에 미리 존재하고 있는 세계의 원리를 하나의 완결된 질서 속에 담아내고자 한다. 그러나 '세계의 원리' 따위가 어딘가에 기성품처럼 놓여 있다는 생각은 허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책'이라는 형태로 우리의 글쓰기를 종결시킬 수가 없다. 오히려 글쓰기는 끊임없이 '텍스트'라는 미완성품을 생산하는 활동으로 남을 뿐이다. 우리가 '책'이라고 불러온 체계조차 사실 세계의 원리를 담고 있지 않은 '텍스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의 파괴는 텍스트의 겉껍질을 벗기는 일이라고 나는 말하겠다."(로티, 1996: 226 재인용)
그러나 로티가 『그라마톨로지』에서 강조한 '글쓰기'라는 용어는 사실 글을 쓰는 행위와는 무관하다. 데리다는 철학이 글쓰기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글쓰기'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다. 영어로 '글쓰기(writing)'라고 번역된 단어는 본래 프랑스어로는 '에크리튀르(écriture)'이다. 데리다의 맥락에서 '에크리튀르'라는 말은 대부분 '문자 언어'라고 번역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즉, 데리다는 '음성 언어/문자 언어'라는 이분법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지, '글쓰기'라는 활동의 의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국내의 『그라마톨로지』 역본에서는 로티가 인용한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김성도의 『그라마톨로지』 번역
따라서 좋은 문자 언어와 나쁜 문자 언어가 있다. 선하고 자연적인 문자 언어는 마음과 영혼 속에 각인된 신의 문자요, 타락하고 기교적인 문자 언어는 육체의 외면성 속에 유배된 기술이다. 이것은 플라톤적 도식의 내적 변형이다. 마치 영혼의 목소리와 육체의 목소리가 있는 것처럼 영혼의 문자 언어와 육체의 문자 언어, 의식의 문자 언어와 정념의 문자 언어로 나뉜다.
따라서 좋은 문자는 언제나 포괄되었다(comprise). 마치 무엇에 의해 포괄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즉 자연 또는 자연법(창조되었건 그렇지 않건)은 무엇보다 영원한 현전 속에서 사유된 자연의 내부에 포괄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좋은 문자 언어는 하나의 총체성 안쪽에 포함되며 한 묶음의 책 또는 한 권의 책 속에 포장된다. 책이란 관념은 유한한 또는 무한한 총체성, 이를테면 기표라는 관념이다. 기표의 이러한 총체성이 있는 그대로, 즉 하나의 총체성이 되는 것은 오직 기의로부터 성립된 총체성이 기표보다 먼저 존재하고, 그 문자 표기와 여러 기호를 감시하며, 자신의 관념성 속에서 기표와 별개일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언제나 하나의 자연적 총체성으로 귀결되는 책이란 관념은 문자 언어의 의미와 근본적으로 무관하다. […] 만약 우리가 책과 텍스트를 구분한다면, 오늘날 모든 영역에서 예고되는 바 그대로, 책의 파괴는 텍스트의 표면을 노출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데리다, 2010: 61-62)
데리다에게 '음성 언어'란 자기 자신에 의해 정당화되는 지식의 토대를 은유적으로 가리키는 용어이다. 가령, "하나님은 존재해!"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면, 그는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에게 다시 성경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는 "성경은 진리야!"라고 대답할 것이다. 여기서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라는 주장은 그 자체만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지식의 토대인 것처럼 제시되고 있다. 데리다는 바로 이러한 자기 정당적(self-justificatory) 구조가 마치 자신이 말한 것을 자신의 귀로 듣는 음성 언어의 자기 촉발적(auto-affective) 구조와 유사하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자기 정당적 구조/외부 정당적 구조'라는 이분법을 '음성 언어/문자 언어'라는 이분법에 대응시킨다. 문자 언어(에크리튀르)가 음성 언어에 선행한다는 데리다의 주장이란 바로 외부 정당적 구조가 자기 정당적 구조에 선행한다는 의미이다. 자기 자신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조가 사실 다른 정당성의 토대를 다시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데리다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인 것이다.
데리다를 통해 철학이 일종의 글쓰기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로티의 해석은 주석적으로 완전히 틀렸다. 로티는 데리다의 '에크리튀르' 개념을 잘못 파악했고, 데리다가 비판하고자 한 '음성 언어/문자 언어'라는 이분법을 놓쳐버렸고, 데리다의 해체주의 전체를 정합적으로 왜곡하고 말았다. 실제로, 크리스토퍼 노리스( Christopher Norris)는 「글쓰기가 아닌 것으로서의 철학(Philosophy as Not Just a 'Kind of Writing')」이라는 논문에서 로티의 데리다 해석을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로돌프 가셰(Rodolphe Gasché) 역시 그의 유명한 데리다 연구서 『거울의 주석판(The Tain of the Mirror)』에서 '에크리튀르' 개념에 대한 로티의 오독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로티가 데리다를 오독하였다는 사실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학은 실제로 일종의 글쓰기이다."라는 로티의 논제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와는 별개로) 그 자체로 매우 매력적이다. '글쓰기로서의 철학'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열어준다. 즉, 이러한 관점에서는 철학과 문학 사이의 엄격한 경계가 사라진다. 철학만이 탐구할 수 있는 고유한 문제에 대한 질문도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철학의 실용성에 대한 회의에 빠져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반대로, 철학의 영역과 방법은 무한히 확장된다. 참신한 상상력과 독창적인 문체를 가지고 글을 쓰는 모든 활동이 철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 연애, 영화, 소설 등에 대한 일상적 단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정치, 경제, 종교, 법 등에 대한 사회적 비평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비전이 필요한 모든 영역이 철학의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B판 초월론적 연역 부분에 나타난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의 의미에 대한 고찰 같은) 매우 특수한 학술적 담론만을 철학의 문제로 다루고자 하는 오늘날의 소위 '강단철학'보다는 로티가 말한 '글쓰기로서의 철학'이 우리가 철학에 기대하는 모습에 훨씬 더 가깝지 않은가?
바로 이러한 점에서 나는 로티의 데리다 해석이 창조적 오독의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로티는 데리다를 오독하였지만, (그것도 완전히 오독하였지만,) 바로 그 오독을 통해 데리다에게도 없었고 로티 자신에게도 이전까지는 없었던 철학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이끌어내었다. "철학은 실제로 일종의 글쓰기이다."라는 로티의 통찰이 어떠한 의의를 지니는지는 그 통찰이 실제로 데리다에게서 나온 것인지와 완전히 무관하다. 적어도, 우리가 데리다의 텍스트 자체에 주석적으로 집착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라면, 우리는 로티의 통찰이 오독에 근거한 것이라고 비난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참고
데리다, 자크., 『그라마톨로지』, 김성도 역, 민음사, 2010.
로티, 리처드., 「글쓰기로서의 철학: 데리다에 관한 에세이」, 『실용주의의 결과』, 김동식 옮김, 민음사, 1996, 217-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