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오개념

저는 미디어나 SNS에서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용어로 사회적 갈등을 비평하는 논객들을 접할 때면 종종 답답합니다. 이 용어가 갈등의 원인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변덕스러운 감정으로 너무 쉽게 환원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개념은 문제가 되고 있는 사안의 윤리적이고 법적인 쟁점을 간과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자주 작동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여기서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개념을 ‘감정’, ‘박탈’, ‘상대적’이라는 세 가지 하위 요소로 분석하여 이 용어가 갈등의 본질을 덮어버리는 방식을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본래 ‘상대적 박탈감’은 사회학자 월터 런시먼(Walter Runcimun)이 정의한 개념 ‘relative depriviation’의 번역어이지만, 이 글에서는 학술적 의미의 ‘relative depriviation’보다는 이 개념이 국내에서 ‘상대적 박탈감(the feeling of relative depriviation)’이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1. -감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개념은 흔히 일종의 감정적 반응이라고 받아들여집니다. 사회적 갈등을 상대적 박탈감에 근거하여 분석하려는 시도는 그 갈등이 본질적으로 감정 갈등이라는 관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실제 정치, 경제, 문화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이 옳음/그름, 윤리/비윤리, 합법/위법 등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게 만듭니다. 어떠한 집단 A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의 문제는 대립 집단 B가 그 행위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는지 아닌지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층위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가령, 기득권 집단 A가 부동산 투기를 하였다고 피기득권 집단 B가 비판하고 있는 현상을 “A에 대해 B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서 분노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논평하는 것은 문제의 쟁점을 흐리기만 할 뿐입니다. 이 사안에서 핵심은 “A의 행위가 정말 부동산 투기인가?”, “부동산 투기는 정당한가?”, “B는 A의 행위가 부동산 투기라고 고발할 만한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등입니다. A의 행위가 정당한지는 B가 박탈감을 느끼는지와 무관합니다. 마찬가지로, 피기득권 집단 B가 정부로부터 너무 과도한 사회적 지원을 받고 있다고 기득권 집단 A가 비판하고 있는 현상을 “B에 대해 A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서 분노하고 있다.”라고 분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 논쟁에서 두 집단이 서로 갈등하는 문제는 “B에 대해 주어지는 사회적 지원이 정말로 과도한가?”입니다. B가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지원의 적정선이 어디까지인지는 A가 얼마나 박탈감을 느끼는지와 무관합니다. (적어도, A가 느끼는 박탈감 자체만으로 B가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지원의 적정선이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정당성의 문제에서 ‘감정’은 결코 본질적 쟁점이 될 수가 없습니다. 대립하는 두 집단 A와 B는 갈등의 상황에서 모두 나름대로 불만족스러운 감정을 느낍니다. 어느 한쪽이라도 감정적 불만족을 느끼지 않았다면, 애초에 사회적 갈등은 일어나지조차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정된 재화를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라 분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한, 우리 사회에서 불만족을 느끼지 않는 집단이란 존재할 수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쟁점이 되는 것은 어느 집단이 불만족스러운가가 아니라, 어느 집단의 불만족이 정당한가입니다.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구분을 뒤섞고 있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둘러산 갈등을 분석하는 틀로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정당성의 문제를 상대적 박탈감으로 환원하는 논평은 감정감정의 정당성 사이의 차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2. 박탈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개념은 사회적 갈등이 재화를 빼앗거나 빼앗기는 관계에서 벌어진다는 생각을 함의합니다. 그러나 갈등이 반드시 빼앗는 쪽과 빼앗기는 쪽 사이의 대립 때문에 발생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특히, 윤리적이고 법적인 문제에서는 어떠한 행위가 미리 규정된 원칙을 위반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설령, 그 행위를 한 사람이 상대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정당하게 비판받을 수 있고, 상대가 그 행위를 한 사람으로부터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정당하게 비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기득권 집단 A의 부동산 투기에 대해 피기득권 집단 B가 비판하는 상황을 다시 떠올려 봅시다. 설령 A의 투기로 인해 B가 아무런 실질적 피해를 않았다고 하더라도, B가 A를 비판하는 것은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 정당합니다. 여기서 쟁점은 B가 무엇인가를 박탈당했는지 박탈당하지 않았는지가 아니라, A의 행위가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 정당한지 정당하지 않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피기득권 집단 B가 정부로부터 너무 과도한 사회적 지원을 받고 있다고 기득권 집단 A가 비판하고 있는 상황을 다시 떠올려 봅시다. 설령, B가 받는 지원에도 불구하고 A가 부담해야 하는 세금이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A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B에 대한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는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 정당합니다. 여기서 쟁점은 A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박탈당했는지 박탈당하지 않았는지가 아니라, A가 제시하는 비판이 과연 정당한지 정당하지 않은지입니다. (적어도, A가 무엇인가를 박탈당했는지 박탈당하지 않았는지가 곧바로 A의 비판이 정당한지 정당하지 않은지를 결정해주지는 않습니다.)

박탈의 문제가 때로 커다란 사회적 갈등을 낳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회적 갈등이 항상 박탈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 특히, 정당성에 대한 의문은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박탈당하지 않은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제기할 수 있습니다. 만일 실질적으로 박탈당한 사람만 정당성을 평가할 수 있다고 한다면, 모든 사회적 갈등은 순전히 이해관계의 당사자들끼리만의 문제로 축소되어버릴 것입니다. 윤리나 법을 근거로 해당 갈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비판하거나, 중재를 시도하는 행위는 원천적으로 차단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즉,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개념은 박탈과는 무관한 갈등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갈등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사회 문제 일반을 분석하는 틀이 될 수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그 개념은 실질적인 박탈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만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상대적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개념은 사회적 갈등의 상황에서 제기되는 정당한 의문이나 비판 을 단순히 특정 집단의 근거 없는 불평 인 것처럼 상대화합니다. 이 점은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개념이 지닌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애초에 ‘박탈감’이라는 단어에는 정당성에 대한 호소를 그저 감정 갈등인 것처럼, 혹은 이해 갈등인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 따라붙는 ‘상대적’이라는 또 다른 단어는, 그 감정 갈등과 이해 갈등조차 특정 집단이 일방적으로 제기하는 허구의 문제인 것처럼 만들어버립니다. 실제로는 아무런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데도 상대적으로는 마치 문제가 있는 것처럼 특정 집단이 무엇인가를 착각하고 있다는 가치 평가가 이미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개념에 녹아들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적 박탈감’으로 사회적 갈등을 분석하려는 입장에서는 윤리적이고 법적인 정당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마치 애초부터 편협하고 속 좁은 투덜거림이기라도 한 것처럼 취급됩니다.

가령, 기득권 집단 A의 부동산 투기에 대해 피기득권 집단 B가 비판하는 상황은 ‘상대적 박탈감’에 근거한 논평에서는 단지 B의 열등감 표출 정도로 평가받습니다. B는 사실 아무것도 잃는 게 없는데도, A가 부동산 투기로 막대한 재산을 모으는 것이 배가 아파서 분노하는 집단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B는 객관적 정당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지 상대적 분노를 표출한 것이 아닙니다. A가 우리 사회의 윤리적이고 법적인 원칙을 어겼다면, B가 배가 아프든지 아프지 않든지에 상관 없이, A는 객관적으로 정당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피기득권 집단 B가 정부로부터 너무 과도한 사회적 지원을 받고 있다고 기득권 집단 A가 비판하고 있는 상황은 ‘상대적 박탈감’에 근거한 논평에서 단지 A의 속 좁은 불만 정도로 치부됩니다. A는 기득권이면서도 약자를 배려하기는 커녕 사회로부터 혜택을 받는 B를 아무 이유 없이 혐오하는 집단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A는 적성선의 객관적 기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지 혐오를 표출한 것이 아닙니다. B에 대한 사회적 지원의 적정선이 어디까지인지는, A가 어떻게 느끼는지와 상관없이, 우리 사회에서 합의된 윤리적이고 법적인 기준에 따라 객관적으로 결정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구분을 옹호하기 위해 우리가 절대주의/상대주의 같은 메타윤리학적 관점에 개입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윤리적이고 법적인 정당성의 문제를 단순히 허구인 것처럼 취급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정당성의 기준이 형이상학적 실재인지 인간 공동체의 문화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회적 갈등 상황에서 부각되는 정당성의 문제는 (형이상학적 실재에 따라 평가되든지 인간 공동체의 문화에 따라 평가되든지) 단순히 특정 집단 A나 B에 의해 자의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정당한지 정당하지 않은지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정당성의 기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지, 정당성 이외의 다른 기준에 따라 평가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개념은 정당성의 문제를 ‘박탈-감’의 문제로 환원하고 ‘박탈-감’을 다시 거짓 문제로 취급해버립니다. 결국, 이 개념에 근거한 사회적 갈등의 분석에서는 무엇이 정당하고 무엇이 정당하지 않은지가 다루어질 수조차 없습니다. ‘정당성’이라는 개념이 애초에 부정되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4. 결론

따라서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논평은 많은 경우 사회적 갈등에 대한 분석에서 심각한 혼란만을 낳을 뿐입니다. 즉, (a) 이 개념은 윤리적이고 법적인 정당성의 문제를 단순히 감정 갈등의 차원에서 보려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b) 이러한 감정 갈등은 다시 빼앗거나 빼앗기는 이해 갈등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c) 이렇게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 전체가 이해 갈등에서 발생하는 감정 갈등의 문제로 상대화되는 과정에서는 정당성 자체가 마치 허구인 것처럼 취급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갈등들이 옳음/그름, 윤리/비윤리, 합법/위법 등 정당성에 대한 논쟁인 한,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개념을 마치 사회 갈등 일반에 적용될 수 있는 프레임인 것처럼 사용하려는 시도는 결코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프레임으로서의 ‘상대적 박탈감’은 오개념입니다. 무엇이 정당하고 정당하지 않은지는 ‘상대적 박탈감’이 상정하고 있는 분석의 기준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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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님의 입장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사회에 이미 탈권위, 감수성 담론이 전략적으로 성공해버렸고, 윤리나 법적인 정당성을 권력의 네러티브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상 "상대적 박탈감"에 호소하는 입장은 유지될 듯 합니다. 애초에 '정당성'이라는 개념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기도 하구요. 걱정되는 점은

라는 비판을 그들이 전혀 괘념치 않아 할 것 같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전략이 유효했다는 피드백으로 느끼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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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가령, 저는 유니콘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유니콘인지에 대한 개념적 구분은 여전히 가능한 것처럼, 정당성이 단단한 형이상학적 실재성을 확보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정당성인지에 대한 개념적 구분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즉, (a) 정당성에 대한 절대주의/상대주의 같은 메타윤리학적 논의와 (b) 무엇이 정당한 행위이고 무엇이 부당한 행위인지에 대한 윤리적-법적 논의는 서로 다른 층위의 문제라고 봅니다. 그래서 "탈권위, 감수성 담론" 등을 근거로 일상의 윤리적-법적 논의를 무시해버리려는 시도가 논의의 층위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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