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술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다른 여느 학문들이 그렇듯이) 자신의 분야에서 논의되고 있는 입장들의 지형도를 파악하고, 쟁점이 되는 사안을 파악하고, 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가 누구인지를 파악해서, 그걸 바탕으로 자신의 입장을 확실하게 설정하고, 그 입장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여러 논문들을 조사하여, 자기 자신의 논문을 지속적으로 써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능력은 정말 대학원 이상의 '연구자'들이 갖춰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등학생분께 당장 요구하기는 어렵죠. 다만, 많은 철학 초심자분들이, 철학도 엄연히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학술적 연구 분야라는 걸 간과하는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철학을 어느 정도까지 공부할 것인지(가령, 교양으로 공부할 것인지 학술 연구로서 공부할 것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학술 연구'로서의 철학은 초심자분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전문화되고 세분화되어 있어서, 사실상 대학 바깥에서 혼자 공부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sophisten님과 Mandala님도 여러 가지로 잘 말씀해주셨지만, 철학의 이런 학술적 성격을 간과하신다면, 나중에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할 때 자칫 방황하시거나 실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생의 상황에서 철학을 위한 기본 소양을 어떻게 쌓아야 할 지 궁금하시다면, 저는 제일 먼저 논리학을 공부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전문적인 논리학은 대학에서 배워야겠지만, 기본적인 명제논리, 1차 술어논리, 비판적 사고론 정도는 혼자서도 몇 개월이면 충분히 익힐 수 있습니다. 논리학 교과서를 하나 잡아서, 거기 나온 연습문제들을 빠짐없이 꼼꼼하게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한국에서는 성균관대학교 이병덕 교수님의 책을 많이 보는 것 같지만, 영어권에서는 어빙 코피(Irving M. Copi)의 논리학 책이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논리학을 잘 공부해두시면, 나중에 어떤 텍스트를 읽더라도 (분석철학뿐만 아니라 대륙철학 텍스트를 읽더라도) 거기서 요점을 파악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3) 어학을 공부하는 것도 도움이 되죠. 특별히, '학술적인' 철학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최소한 영어로된 철학적 글들을 무리 없이 읽어낼 수 있어야 하고요. 외국에서 공부하시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 부분에서 유리한 면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어가 자유로우시다면, 공부하시고자 하는 철학 분야에 맞춰서 독일어, 프랑스어,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한문 등을 배워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2외국어를 잘 못하는 편에 속하지만, 이런 언어들을 배워두시면, 참고할 수 있는 텍스트의 범위가 훨씬 늘어나는 데다, 다른 연구자들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도 좀 더 능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4)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는 습관을 들이는 걸 당부드리고 싶네요. 초심자분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문제 중 하나가, 입문서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진다는 겁니다. 입문서를 많이 읽어둬야 그 다음에 고전적인 텍스트들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지만 입문서를 아무리 많이 읽어도 자신이 실제로 텍스트를 독해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입문서를 쌓아두고서 다 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죠. 정말 중요한 건, 입문서를 빠르게 대충만 훑고서, 자신이 정말 읽고자 하는 텍스트로 직진해서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텍스트를 아무리 지루하고 어렵더라도 반복해서 읽으면서 자기 논리로 정리하려는 성실함과 노력이죠. 사실 이런 태도가 없으면, 철학을 '겉멋으로만' 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신이 제대로 읽은 텍스트는 하나도 없는데도, 어디서 주워들은 (니체니, 하이데거니, 푸코니, 들뢰즈니 하는) 멋있는 이름들만 언급하면서, 아무런 내실 없는 인생관이나 도덕관 따위를 전문적인 철학인 것처럼 이야기하게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