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명제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 이병덕의 정당화 이론과 리쾨르의 상징이론을 중심으로

아울즈 영어 세미나 때 너무 부실하게 준비한 발표에 대한 A/S 버전의 글입니다. 역시 전 영어보다 한국어가 좋습니다. 세종대왕님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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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참인가 거짓인가? 무신론자 입장에서는 거짓이고, 유신론자의 입장에서는 참이겠지만 이 믿음들은 결정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았다(정당화되지 않았다고 가정하는 불가지론의 입장을 전제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이 명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이병덕(2017)은 이런 명제를 "잠재적으로 참 혹은 거짓인 명제"로 규정한다. 우리는 여기서 잠재적 참 혹은 거짓 개념을 수용할 수 있는지의 문제에 빠진다. 이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이병덕이 가정하는 정당화 개념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그에 따르면, 정당화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사회적 실천과 특정한 사회적 요구에 연관돼있다. 즉, 정당화는 합목적적 개념이며 사회적 실천과 사회적 요구의 변화에 따라 정당화의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역동적이다.

(2) 다른 믿음 외에는 다른 믿음을 유지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즉, 정당화는 믿음들 간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이지 믿음을 벗어난 토대 증거와 같은 것은 없다.

(3) 정합성은 가능한 모든 반대에 응답하고 경쟁 가설을 물리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특성으로 인해 이병덕의 정당화 개념은 맥락의존적이고 시간적인 개념이 된다. 그리고 이는 정당화에 잠재성이라는 맥락을 제공한다. 정당화에 현재와 미래의 차원을 구분함으로써 정당화가 잠재성의 영역에도 적용되는 개념이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이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현재로서는 정당화되지 않았지만 잠재적으로 참이라고 정당화되거나 거짓이라고 반증될 수 있는 잠재적 참이거나 거짓인 명제로 그 진리값을 가질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다른 종교적 진술들도 같은 맥락에서 정당화된 명제로서 의미있는 명제라고 볼 수 있다. "십자가는 십자로 조각된 나무 조형물이다"라는 명제는 금방 주어진 증거들로 참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명제이고, "십자가는 예수의 희생과 신의 구원의 증거다"라는 명제는 당장의 증거로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잠재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는 명제라고 우리가 규정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친다면 종교적 진술들은 "외계인은 실재한다"와 같이 아직 증거가 부족하여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는 잠재적 진술이다라는 위상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게 된다. 하지만 종교적 진술들은 증거를 요청하는 부류의 명제가 아니다. 즉, 종교적 진술은 잠재적 참, 거짓에서 실제적 참, 거짓으로의 상승이 요구되는 종류의 명제가 아니다. 오히려 정당화의 측면에서 볼 때 잠재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인 명제이기에 제 기능을 하는 명제이다.

이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을 상세히 해명하기 위해 리쾨르의 상징 이론을 빌려올 필요가 있다. 먼저, 리쾨르에게 있어 상징은 "일차의미를 넘어 이차의미를 제공하는 기능적 개념"으로 규정한다. 이 규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징에 대한 넓은 해석과 좁은 해석을 이해해야 한다. 먼저, 상징에 대한 넓은 해석은 우리의 유사성에 대한 사유가 전부 상징적이라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호랑이와 대한민국이 유사하다"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호랑이와 대한민국이 서로 상징관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넓은 상징론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상징을 이해하게 되면 상징의 특수성을 상실하게 된다. 반면 상징의 좁은 의미는 유비관계로 상징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런 유비관계로 상징을 규정할 경우, 상징은 비례식 A:B = C:D를 충족시키는 형식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상징은 일차의미를 넘어선 이차의미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의 총체로, 이런 1대1 대응관계를 지니지 않았기에 다양한 방식의 해석을 허락하는 개념이다.

일차의미에 덧붙여진 이차의미에 대한 진술의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종교적 진술이다. "십자가는 십자모양으로 조각된 나무다"라는 일차의미 명제에서 "십자가는 구원의 증거다"라는 이차의미 명제가 덧붙여진다. 이 이차의미 명제의 진리값은 무엇인가? 참은 확실히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거짓인가? 하지만 이 명제를 반증하는 것도 불가능해보인다. 결국 거슬러 올라가, 우리가 잠재적 참 혹은 거짓으로 진리값을 매긴 "신은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명제도 잠재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인 명제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 잠재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인 명제는 추가적인 정당화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아론의 자리를 열어준다. 잠재적 참 혹은 거짓이 현재 정당화되지 않은, 완결되지 않은 정당화에 불과하다고 규정되고 더 많은 정당화를 요구한다면 이 이차의미 명제를 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학은 물론 정신분석학적 해석이론, 문학 등은 온전한 학문으로 인정될 수 없다. 현재 정당화된 일차의미 명제에서 다양한 이차의미 명제, 잠재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인 명제가 도출되고 그것들은 온전한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종교 뿐 아니라 세계를 다의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해석하고자 하는 이론 전반을 수용할 수 있다.

또한 리쾨르의 이론은 이런 이차의미 명제들이 기능적으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정합성의 차원에서 규제되어야 함도 같이 제시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위에서 이차의미 명제들이 추가적인 정당화로부터 면제된다고 했을 때 여기서의 정당화는 잠재적 참에서 실제적 참으로 전환되기 위한 추가적인 증거를 요청하는 의미에서의 정당화지 다른 명제들과 정합적이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요구로부터 면제됐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리쾨르는 이차의미를 산출하는 상징들이 반성을 일으키며, 반성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여기서 리쾨르는 반성을 자기반성으로 규정하는데, 이것은 내성(introspectio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타자, 그리고 자신을 정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주체의 반성작용을 의미한다. 즉, 이차의미 명제는 우리의 정합적인 개념적 틀에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여 그 틀의 정합성에 대한 재고를 요청하면서 다른 한편 그 이차의미 명제도 우리의 개념적 틀의 정합성에 포섭되어야 한다. 이렇게 리쾨르의 자기반성을 이병덕의 정당화 개념으로 파악하게 되면 이차의미 명제들이 어떤 맥락에서 정당화의 요구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우리의 지식으로 포섭될 수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리쾨르의 상징은 이차의미 명제로 실제적 참으로의 전환을 요청받지 않고 세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토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상징은 실제적 참으로의 전환을 요청받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정당화로부터 면제되지만, 우리의 개념적 틀과 정합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정당화의 요구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리쾨르가 상징은 자기반성을 야기하면서도 자기반성에 의해 규제된다고 할 때 바로 이런 맥락에서 반성이 수행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병덕의 정당화 이론은 리쾨르의 상징 이론에 형식을 부여하고, 리쾨르의 상징 이론은 이병덕의 정당화 이론이 다루지 않은 잠재적 참의 고유한 역할과 기능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 이론으로 두 이론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논의가 부당하게 해명해야할 논점을 선취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상기의 논의에서 나는 세계가 다의적이고, 다의적이기에 다양한 해석이론을 허용해야한다는 주장을 단순하게 가정하고 넘어갔다. 이런 맥락에서 해석이론을 굳이 우리가 수용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우리가 잠재적으로 참인 명제들 중 이차의미 명제들의 유의미성을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그것들이 실제로 참이거나 거짓인 명제들만큼 학적으로 유의미하다고 인정해주고 정당화의 요구로부터 벗어난는 특권을 제공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한 명확한 반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우리의 인식적 능력의 한계로 현재 정당화되지 않는 명제들에 대해 그것들이 현재 정당화되기 전에는 학적 연구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이용하여 세계에 대한 유의미한 지식을 낳을 수 있고, 오히려 잠재적으로 참이기에 다양한 이론의 여지를 남겨준다는 의견 중 어느쪽이 "세계에 대해 더 많은 유용한 지식을 산출해야 한다"는 인식적 목표를 성취하기에 적합한 입장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후자가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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