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h. W. 아도르노, M.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계몽의 개념」 - 5

  1. 계몽은 1) 자기 내지 주체의 보존을 절대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2) 이성을 자기보존의 도구로 삼으며 3) 이를 통해 본성을 철저히 종속시키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이 이유에 의해 1) 주체성을 상실하고 2) 이성을 사물화된 세계에 봉사하는 도구로 만들며 3) 자기보존 본성의 고삐를 풀어놓게 된다.
    16.1. 계몽은 자기보존이라는 “제일이자 유일의 덕”, 서구 문명사의 핵심 준칙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것들에서 신화를 감지하고 추방한다.
    16.2. 자기(das Selbst)는 신화의 잔재라고 생각되는 모든 본성[자연]적 요소를 제거하고, 추상적인 초월적, 논리적 주체로서 이성의 “관계지점”이 되었다.
    16.2.1. 이 “관계지점”을 거치지 않고 생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거나, 자기에 의해 요청되지 않은 신을 숭배하는 자들은 계몽이 보기에는 다시 신화로 돌아가려는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16.2.2. (가령 시민사회 경제에서는) 개인의 일이 모두 자기 원리에 (자본가에게는 더 많은 자본의 증식, 노동자에게는 더 많은 노동을 위한 행위로) 매개되어야 한다.
    16.2.3. 그러나 시민사회적 자기 보존에의 매개가 심화될수록, 노동 분업 속에서, 개인은 기계 장치에 따라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형성하면서 자기로부터 소외된다.
    16.3. 마침내 사회적 질서 메커니즘이 주체성의 최후 흔적(추상적 초월적 주체)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를 꿰찬다.
    16.3.1. 이로써 사회와 개인의 행위 사이에 끼어들던 최소한의 간섭막조차 없어졌다.
    16.4. 완전히 사물화된 주체와 더불어 이성은 의미와 (세계해석의) 풍부함을 포기하고 도구적 이성으로, 자기보존의 제일의 도구로 된다.
    16.4.1. 논리 법칙의 배제성은 이러한 의미의 단조(單調)화와 더불어 성립하며, 자기보존의 강제성과 사물화를 반영한다.1
    16.4.1.1. 논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앞에서 사유를 정지시키는 입장은 사회에서의 인간의 사물화를 학적으로 용인하는 것이다.
    16.5. 이렇게 본성을 완벽히 통제 아래 두려는 바로 그 과정에 의해 자기보존으로서의 본성은 통제에서 놓여난다.
    16.5.1. 순전한 자연적 본성으로 되돌아가리라는 공포 때문에 계몽은 자신의 이전 시대의 비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에 대한 의식을 없애버린다.
    16.5.2. 욕구 또한 자기보존에 맞추어 적절히 통제 관리된다.
    16.5.2.1. (아리스토텔레스에서뿐만 아니라 쾌락주의에서도) 지나친 금욕이나 절제 없는 쾌락의 극단들은 배척되고, 정해진 적절한 법도에 따라 추구하도록 장려되었다.
    16.5.2.2. 호메로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인 정신”은 두 극단 사이에서 오로지 자기보존을 목적으로 하여 문명을 운영해나간다.
    16.5.2.3. 욕구는 교육과 규율을 통해 자기보존 욕구와 합치하도록 왜곡된다.
    16.6. 자기보존과 자연지배로서의 계몽은 자연의 공포와 자연에의 종속을 벗어날 대안으로서 출현했지만, 이 대안은 몇 번이고 다시 신화로 회귀한다.

  2. 『오뒤세이아』의 세이렌에 관한 장은 주체가 신화적 공포로부터 어떻게 단일한 주체로 성장했는지를 보여준다.
    17.1. 시간에서 과거-현재-미래의 삼분도식을 확립함으로써 주체성은 태고의 신화적 경험을 “다시 가져올 수 없”는 과거로 추방하고, 현재를 과거의 권력으로부터 해방시킬 진보의 도구로서 신화를 마주한다.
    17.1.1. 과거를 “진보의 소재”가 아닌 “살아있는 것으로서 구출하려는 열망”은 “지나간 삶의 서술”로서의 예술이 이어받는다.
    17.2. 무력한 가상으로서만 사회에서 용인되는 예술과 달리, 세이렌은 과거를 불러내어, 본성적 욕구, 귀향에의 갈망을 무기 삼아 주체성의 자기보존을 위협한다. 물론 그 귀향이란 허구에 불과하다.
    17.2.1. 이런 망아에의 유혹과 자아 보존에의 노력은 항상 뒤얽혀 전개되어 왔다.
    17.2.1.1. 가령 유포리아를 일으키는 사회적 행사들은 자기보존과 자기파멸을 매개하며, 이는 자기상실에 대한 공포가 행복에의 약속2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17.3. 이 유혹에 대해, 오뒤세우스는 두 가지 방책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오뒤세우스의 대원들이 밀랍으로 귀를 막듯, 피지배자들은 자신을 자연본성적 유혹으로부터 차단하고 충동을 노동으로 승화시킨다.
    17.4. 둘째, 오뒤세우스가 돛에 자신을 묶은 상태에서 노래를 듣듯, 충동을 중화(中和)시키는 한에서 그것을 향유하는 선택지가 있다.
    17.4.1. 오뒤세우스도 유혹에 끌리는 욕구를 붙들어 매고, 자기보존 메커니즘에 따라, 노동하는 대원들에 끌려가야만 한다.
    17.4.2. 자연본성에의 유혹은 예술로 중화된다.
    17.5. 이런 식으로, 사회지배를 근거로 하여 명령된 노동과 문화적 재화가 분리되어 성립한다.

  3. 지배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모두를 종속시키며, 역사의 진보에 따라 부단히 강화된다.
    18.1. 대표 가능성은 “지배의 척도”인 동시에 퇴행의 추동력이다.
    18.1.1. 지배계층도 종국적으로부터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어 불구가 되는데, 노동으로부터 제외된다는 것은 사물로부터 소외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3
    18.1.2.. 한편 노동하는 자들은 정신과 육체가 지배에 종속된 채로 강제된 노동에 시달린다.
    18.2. 역사는 주인과 노예의 약화라는 점에서 순환적이며, 자연본성의 억압은 분업과 기술의 발달과 함께 심화된다.
    18.3. 그런 이유에서, 진보는 동시에 퇴행이다.

----이하 각주
1.저자들은 논리적 법칙의 타당성까지도 사회의 작동 방식, 특히 자기보존 기제와 연관시켜 보고 있다. 아마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가령 ~(A&~A) 같은 논리 법칙의 “강제성” 내지 규범성 또한 그것의 준수가 인간과 사회의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성립한다. 이런 법칙을 멋대로 벗어나 행하거나 생각하는 일은 생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어리석은 일이다.
2.오뒤세우스와 대원들의 귀향에의 갈망과 상통하는 말이다. 신화적 위력은 문명사의 전개에 따라 무력하게 예술로 남아 있다.
3.『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 장 ‘자립성과 비자립성: 주인과 노예’ 부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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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안녕하세요. 아도르노 전공하는 입장에서 요약문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혹시 오디세우스와 사이렌의 일화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사이렌은 방금 지나간 과거를 직접 불러냄으로써 그들의 노래에서 들을 수 있는 저항할 수 없는 즐거움을 약속해주지만, 그와 함께 각자가 살아온 전체 시간을 지불할 때만 각자에게 생명을 되돌려주는 가부장적 질서를 위협한다. (국문본 p. 66.)

라는 구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 생각에 아도르노는 지금 두가지 층위의 예술 개념을 상정하고 (물론 이 지점에서 '아도르노는 예술을 두가지의 층위로 나누어서 바라보고 있다.'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가벼운 예술'과 '진지한 예술'은 변증법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겠죠. 그러나 아도르노 스스로가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는만큼 이러한 구분을 완전히 부정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한 가지 층위를 "과거를 살아 있는 것으로 구제하려는 충동"을 지닌 예술로, 그리고 다른 한가지를 "인식으로 간주되기를 포기한 예술"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데, 위의 인용에서 "지나간 과거를 직접 불러냄으로써 ~ 즐거움을 약속해주는" 예술이란 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쉽게 이해가 됩니다만, 이후에 나오는 서술은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인지 잘 가늠이 안가네요.

  1. 우선 "가부장적 질서"라 함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요? 여태까지의 <계몽의 개념>장의 서술에 비추어보건데 일차적으로 이 가부장적 질서라 함은 원시적 신앙이 비교적 정교화된 신화로 나아가는 과정을 나타낸 것이라고 이해가 됩니다. 아도르노는 특히 그리스 신화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각 신들의 위계가 나뉘어지고 그 신들이 관장하는 영역이 정립되는 과정을 두고 '가부장적 신화'라고 묘사 했었습니다.

"예전의 신화적 믿음인 민간 신앙을 누르고 언어로 펼쳐진 총체성을 지니면서 진리를 요구하고 나선 태양 중심적인 가부장적 신화는 그 자체가 이미 '계몽'으로서 이러한 계몽은 철학적인 계몽과도 충분히 같은 차원에 놓고 비교해볼 만한 성질의 것이다. (p. 34.)

이 맥락에서의 '가부장적 신화'와 66쪽에서의 '가부장적 질서'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1. 둘째로 이러한 '가부장적 질서'가 "각자가 살아온 전체 시간을 지불할 때만 각자에게 생명을 되돌려준다."라는 말의 의미는 전혀 가늠되는 바가 없네요. 가부장적 질서의 의미를 34쪽에서의 맥락에서 비추어보자면 한마디로 '계몽의 이념,' 즉 대상을 질서화하고 위계화하여 이성적 방식, 혹은 과학적, 체계적, 실증적인 방식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사고 방식을 칭한다고 할 수 있을텐데... 여기서 더 이상 사유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보다 큰 맥락에서 사이렌이 제공하는 "살아있는 것으로서의 구제된 예술"이 이렇듯 추상화 및 위계화를 수행하는 가부장적 질서를 위협한다는 말 자체는 이해가 갑니다만, 가부장적 질서가 왜 "각자가 살아온 전체 시간을 지불할 때만 각자에게 생명을 되돌려주는지"는 잘 파악이 되지 않네요. 아도르노가 생각하는 계몽의 이념, 즉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사유의 방식은 '개인들의 삶이 지니고 있는 모든 특수한 국면들의 고유성'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개인을 그저 추상화된 하나의 단위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그들의 삶을 - 개별적 국면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 전체 시간으로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인간'이라는 추상화된 의미를 생성해낼 수 있기 때문일까요?

3.『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 장 ‘자립성과 비자립성: 주인과 노예’ 부분과 <<계몽의 변증법>>의 위 부분은 어떤 맥락에서 연결지어보면 좋은 것일까요?

만약 제 질문이 잘 이해되지 않으신다면 제 사고가 아직 명료하지 않은 탓일 겁니다. 게시한지 4년이 지난 글인데.. 한번 살펴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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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풍부한 질문들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재 제가 밖에 나와 있어 『계몽의 변증법』 원문에 접근할 수 없는 관계로, 추후 여력이 될 때 차차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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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가짓수가 많고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내용이 결코 아니라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1. “가부장적”이라는 용어에 관해

인용하신 국역본 34쪽의 구절로부터 태양의 신화가 가부장적이라는 점을 알 수는 있지만, 해당 구절은 가부장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가부장적”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다른 구절을 참조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자연의 대표자로서 여자는 시민사회 내에서 저항 불가능성과 무력함에 대한 수수께끼의 상이 되었다. 이 점에서 여자는 자연의 화해 대신 자연의 극복을 정립하는 공허한 거짓말을 사회에 반사한다. 결혼은 이와 타협하기 위한 사회의 중간 길이다. 여자에게 위력[Macht]이 오직 남자를 통해 매개되어 속하는 한, 여자는 무력한 이로 남는다. 그와 같은 것은 오뒤세이아의 창녀적 여신의 완패 속에서 두드러지는데, 한편 페넬로페와의 교양 있는[ausgebildete] 결혼은 문학적으로는 초기이지만 가부장적 제도의 객관성의 후기 단계를 대표한다. 오뒤세우스가 아이아이아 섬에 등장함과 더불어 남자가 여자와 맺는 연관의 이중의미인 동경과 명령은 이미 계약을 통해 보호된 교환의 형식을 가정한다. 체념은 이에 대한 전제이다. (DA, 79-80)

이를 보면 아도르노가 자신의 계몽의 자연지배 이론에 근거하여 가부장적 질서를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계몽의 지배는 아도르노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와 궤를 같이합니다. 자연이 동일성사유나 목적-수단 관계의 합리성을 통해 계몽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일은 여성이 계약과 교환의 성격을 띠는 사회관계를 통해 가부장적 사회질서에 예속되는 일을 포함합니다.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여성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신화적인 위력을 잃어버린 채 무력하게 관리되는 처지에 놓입니다.

그러므로 39쪽(국역본 66쪽)에서 세이렌이 가부장적 질서를 위협한다고 할 때, 이는 계몽에 아직 속박되지 않은 세이렌의 신화적, 자연적 위력이 오뒤세우스로 상징되는 계몽의 합리적 질서를 위협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2. 왜 가부장적 질서는 생명을 돌려주는 대가로 생애의 시간을 거두어가는가?

확정적인 답은 아닙니다만, “가부장적 질서”가 “오직 그의 시간의 총량[sein volles Maß an Zeit]을 대가로 해서만 각자의 삶을 되돌려준다”(DA, 39/국역본 66)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해당 구절이 등장한 주변 맥락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해당 구절의 바로 앞에서는 오뒤세우스가 “자신의 삶의 통일성”을 획득하는 과정이 논의됩니다. 그에 따르면 오뒤세우스적 자기는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나누는데, 이 도식 속에서 과거는 신화적인 것으로 극복되고, 곧 현재에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실용적인 지식의 양분으로 활용됩니다. 그렇다면 오뒤세우스로 하여금 삶(의 통일성)을 획득하도록 해주는 것은 극복되고 관리되는 자기 자신의 “시간의 총량”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고, 위에서 가부장적 질서의 지배가 계몽의 자연지배와 궤를 같이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과거를 극복하고 관리하는 주체는 가부장적 질서를 체화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전도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해당 문단에서 아도르노가 직접 『정신현상학』을 인용하며 설명하고 있듯이, 지배 구조의 내재적 논리로 인해 지배계급이 자기의 주도권을 잃고 소외되고 예속된다는 점에서 헤겔과 아도르노의 주-노 변증법 양자가 연결됩니다. 주인은 스스로 노동을 통해 세계 내의 사물을 가공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고 노예에게 노동을 시킵니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주인은 자기와 세계 사이의 관계에 제3자를 개입시키고, 세계는 주인 자신에게 낯선 것으로 변모합니다. 이로써 당초 지배하는 위치에 있던 주인은 그 지배력을 잃고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상태로 전락하게 됩니다.

Ps. 두 가지 예술?

저는 @Dirtytroll 님께서 구별하신 예술의 두 가지 층위의 구별을 아도르노에 귀속시킬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과거를 살아있는 것으로 구제하려는 충동을 지닌 예술과 사회 속에서 무력한 채 남아있는 예술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우리가 이야기 나눈 적이 있었지만, 예술은 사회와 단절되고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상실함으로써 사회를 부정적인 상 속에서 담아내고 비판할 힘을 지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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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감사합니다. 특히 2번에 대한 답변이 정말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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