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의 가짓수가 많고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내용이 결코 아니라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1. “가부장적”이라는 용어에 관해
인용하신 국역본 34쪽의 구절로부터 태양의 신화가 가부장적이라는 점을 알 수는 있지만, 해당 구절은 가부장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가부장적”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다른 구절을 참조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자연의 대표자로서 여자는 시민사회 내에서 저항 불가능성과 무력함에 대한 수수께끼의 상이 되었다. 이 점에서 여자는 자연의 화해 대신 자연의 극복을 정립하는 공허한 거짓말을 사회에 반사한다. 결혼은 이와 타협하기 위한 사회의 중간 길이다. 여자에게 위력[Macht]이 오직 남자를 통해 매개되어 속하는 한, 여자는 무력한 이로 남는다. 그와 같은 것은 오뒤세이아의 창녀적 여신의 완패 속에서 두드러지는데, 한편 페넬로페와의 교양 있는[ausgebildete] 결혼은 문학적으로는 초기이지만 가부장적 제도의 객관성의 후기 단계를 대표한다. 오뒤세우스가 아이아이아 섬에 등장함과 더불어 남자가 여자와 맺는 연관의 이중의미인 동경과 명령은 이미 계약을 통해 보호된 교환의 형식을 가정한다. 체념은 이에 대한 전제이다. (DA, 79-80)
이를 보면 아도르노가 자신의 계몽의 자연지배 이론에 근거하여 가부장적 질서를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계몽의 지배는 아도르노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와 궤를 같이합니다. 자연이 동일성사유나 목적-수단 관계의 합리성을 통해 계몽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일은 여성이 계약과 교환의 성격을 띠는 사회관계를 통해 가부장적 사회질서에 예속되는 일을 포함합니다.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여성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신화적인 위력을 잃어버린 채 무력하게 관리되는 처지에 놓입니다.
그러므로 39쪽(국역본 66쪽)에서 세이렌이 가부장적 질서를 위협한다고 할 때, 이는 계몽에 아직 속박되지 않은 세이렌의 신화적, 자연적 위력이 오뒤세우스로 상징되는 계몽의 합리적 질서를 위협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2. 왜 가부장적 질서는 생명을 돌려주는 대가로 생애의 시간을 거두어가는가?
확정적인 답은 아닙니다만, “가부장적 질서”가 “오직 그의 시간의 총량[sein volles Maß an Zeit]을 대가로 해서만 각자의 삶을 되돌려준다”(DA, 39/국역본 66)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해당 구절이 등장한 주변 맥락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해당 구절의 바로 앞에서는 오뒤세우스가 “자신의 삶의 통일성”을 획득하는 과정이 논의됩니다. 그에 따르면 오뒤세우스적 자기는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나누는데, 이 도식 속에서 과거는 신화적인 것으로 극복되고, 곧 현재에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실용적인 지식의 양분으로 활용됩니다. 그렇다면 오뒤세우스로 하여금 삶(의 통일성)을 획득하도록 해주는 것은 극복되고 관리되는 자기 자신의 “시간의 총량”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고, 위에서 가부장적 질서의 지배가 계몽의 자연지배와 궤를 같이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과거를 극복하고 관리하는 주체는 가부장적 질서를 체화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전도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해당 문단에서 아도르노가 직접 『정신현상학』을 인용하며 설명하고 있듯이, 지배 구조의 내재적 논리로 인해 지배계급이 자기의 주도권을 잃고 소외되고 예속된다는 점에서 헤겔과 아도르노의 주-노 변증법 양자가 연결됩니다. 주인은 스스로 노동을 통해 세계 내의 사물을 가공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고 노예에게 노동을 시킵니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주인은 자기와 세계 사이의 관계에 제3자를 개입시키고, 세계는 주인 자신에게 낯선 것으로 변모합니다. 이로써 당초 지배하는 위치에 있던 주인은 그 지배력을 잃고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상태로 전락하게 됩니다.
Ps. 두 가지 예술?
저는 @Dirtytroll 님께서 구별하신 예술의 두 가지 층위의 구별을 아도르노에 귀속시킬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과거를 살아있는 것으로 구제하려는 충동을 지닌 예술과 사회 속에서 무력한 채 남아있는 예술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우리가 이야기 나눈 적이 있었지만, 예술은 사회와 단절되고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상실함으로써 사회를 부정적인 상 속에서 담아내고 비판할 힘을 지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