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자율성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미리 알림: 여기서의 예술의 자율성이란 아도르노의 <미학 이론>에 등장하는 의미에서의 예술의 자율성임을 밝힙니다.

예술의 자율성이란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예술이 사회로부터의 자율성을 가지며 이는 더욱 자세히 설명하자면 예술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란 경험적 사회 (혹은 경험적 현존)에 관한 있는 그대로의 재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서 문제가 되는게, 아도르노는 예술을 통해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미학 이론>에서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아도르노는 예술을 통해서 내용과 형식 사이의 긴장 관계를 나타내야된다고 말하는데 ( 첫째로 이러한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에 대해 토론해보고 싶습니다.) 아도르노의 이 언술을 "예술이란 보편과 특수 사이의 갈등 관계를 나타내야 한다" 라고 풀이 할 수 있을지요 (마찬가지로 이 풀이가 타당한가에 대해서 토론해보고 싶습니다.)

셋째로 예술의 자율성에 관한 논의 중 아도르노의 견해 말고도 참고할만한 다른 철학자들의 논의를 소개해주시는 것도 좋은 쟁점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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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이론』은 본격적으로 공부해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된 답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얼마 안 남은 기억을 되살려봅니다. "아도르노에서 예술의 자율성이란 무엇인가?"는 상당히 광범위한 물음이어서 그 자체로 하나의 논문을 형성할 수 있을 주제로 보입니다.

뒤의 두 물음에 대해서는 잘 아는 바가 없어서, 첫째 물음에 대해서만 답합니다. 제가 아도르노를 이해하기로는, 예술을 통해 표현되어야 하는 것은 여전히 경험적 현존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술이 사회로부터 아예 고립되어 독립적으로 내용을 갖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예술은 사회 내에서 노동을 통해 생산되는 인공물이며 이 점에서 그 내용 역시 경험으로부터 이끌어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예술은 역설적으로 사회와 단절되는 방식으로 자기와 사회 사이의 소통 관계를 성취합니다. "그러나 바로 인공물들, 사회적 노동의 산물들로서 예술작품들은 이들이 거부하는 경험계[Empirie]와 소통하며, 예술작품들은 경험계로부터 그 내용을 끌어온다."(Adorno, Th. (1970). Ästhetische Theorie. Suhrkamp. 15.)

한편 질문 글에서 표현된 대로 예술작품은 자율성을 지니기 때문에, 그 내용은 순전히 재현이나 반영을 통해 있는 그대로 모사된 사회적 현실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술작품은 추함, 수수께끼적 성격, 특이체질적 계기, 불협화음 등의 요소들을 통해 사회적 현실을 부정적으로, 다시 말해 사회적 현존 속에서 발생하는 고통, 갈등, 불화, 세계고(Weltschmerz) 등을 상(像)의 형식 속에서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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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텍스트를 직접 확인할 수 없어 기억에만 의존하지만 한가지 뉘앙스를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아도르노는 예술이 사회와의 "단절"을 통해서 사회와의 소통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사회와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단절과 비판은 그 뉘앙스에서 아주 큰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술과 사회가 단절되어있다고 말하는 순간, 양자는 완전히 무관한 사이임을 언명하는게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비판이라는 것은 예술이 사회에 대해 아직 모종의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판적 계승'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판이라고 함은 무언가에 대한 개선을 암시하기도 하기 때문이죠. 물론 '단절'과 '비판'이라는 말의 뉘앙스 차이는 제 물음의 핵심도 아니었으며 뉴헤겔님의 근본적인 해석상의 차이인지, 혹은 단순한 언어 사용상의 차이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지적은 조금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다만, 어찌되었든 뉴헤겔님과 제가 공통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은 아도르노가 말하길 예술은 경험적 현존에 기반하지 않고서는 현실화 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통해서 경험적 현존을 (사실 이 부분에서도 논점이 하나 발생하게 되는데, '경험적 현존'과 '사회'는 어떻게 혼용될 수 있는 것일까요? 혹은 이러한 혼용이 아도르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아도르노에 대한 제 개인적인 해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까요?) 완전히 긍정하지는 않는다, 혹은 제가 말한 바를 다시 적어보자면 예술은 '사회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사회와의 관계를 구축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때 '사회에 대한 비판'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사회적 규범에 대한 비판', '(사회적) 총체성에 대한 비판', '(사회에 존재하는) 보편과 특수의 (바람직하지 않은) 종합에 대한 비판', 등등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아도르노는 예술이 사회에 대한 비판을 통해 보편과 특수, 형식과 내용 사이의 갈등 양상을 표현하게 되는 것임을 주장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여전히 '사회에 대한 비판을 통해 형식과 내용 사이의 갈등 양상을 표현하려고 했다' 라는 말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때 이것을 '사회적 규범과 이것을 답습하지 않는 예술가 개인의 주관 사이의 갈등 양상'으로 이해하려고 한 적이 있는데, 지도교수님과의 토론에서 이게 적절하지 않은 해석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뉴헤겔님께서 말씀하신 "예술은 자율성을 지니기 때문에"라는 언술이 약간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자율성이란 그것이 예술이라고 판명되는 순간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한에서 주어지는 예술적 특성이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예술 작품은 "그것이 자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순전히 재현이나 반영을 통해 있는 그대로 모사된 사회적 현실이 결코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재현이나 반영을 통해 있는 그대로 모사된 사회적 현실이 결코 아닌" 대상에게 주어지는 것이 예술의 자율성이다, 라고 말해야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이 논점 또한 "예술이 사회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라는 것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가, 라는 논점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댓글이 많이 난잡한데, 부분적인 코멘트라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뉴헤겔님의 마지막 문단을 다시 읽고, 재차 댓글을 답니다. 결국 돌고 돌아 아도르노가 말하고자 한 바는 예술을 통해 경험적 현존이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이 부정적으로 표현된다, 혹은 예술을 통해 사회적 현존 속에서 발생하는 불화, 갈등이 표현된다는 것인데 이 '갈등'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일까요?

아도르노 연구하시는 분들이 꽤나 많은 것 같은데 다른 분들의 고견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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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단절”(Brechung)은 제 표현이 아니라 『미학 이론』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당연히 이때 “단절”은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사회와 무관한 채 남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고립은 앞서 밝혔듯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물론 예술은 사회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사회와 관계를 맺지만, 그것이 예술이 사회와의 단절을 통해 사회와의 부정적 관계를 성취한다는 제 이해와 양립 불가능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미적 단절에게는 불가결하게 단절된 것이 남아 있다. 상상에게는 상상이 표상하는 것이 [불가결하게 남아 있다.] 경험적 실재와의 관계 속에서 예술은, 그곳에서 지배적인 자기보존 원리를 그 생산물의 자기존재라는 이상으로 승화한다.”(ÄT, 14, 인용자 강조)

다음으로, 아도르노 철학에서 경험적 현존이 사회적 현실과 크게 구별되어 쓰이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양자를 엄격히 구별하려고 하면 사회적이지 않은 경험적 현존이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인식과 경험이 세계의 탈주술화라는 사회적 과정과 불가분하다는 점을 주장해 왔던 아도르노가 비사회적인 경험적 요인의 존재를 인정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예술의 자율성이 오로지 사회비판을 수행하는 한에서만 주어진다는 해석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예술의 자율성은 계몽의 자연지배 속에서 상(Bild)과 기호(Zeichen)가 분리됨으로써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노동분업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동일시의 계기와 미메시스적 계기로 분리시킬 때, 혹은 개념과 직관으로 분리시킬 때 예술과 학문은 서로 분화되어 각기 독자적인 영역을 부여받습니다.

학문과 문학의 깨끗한 분할과 더불어, 이 분할의 도움으로 이미 야기되었던 노동분업은 언어로 확산된다. […] 기호로서의 언어는 자연을 인식하기 위해 계산에 순종해야 하며, 자연과 유사하려는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 상으로서의 언어는 완전히 자연이기 위해 모상에 순종해야 하며, 자연을 인식하려는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 진보하는 계몽과 더불어 오직 진정한 예술작품들만이 이미 존재하는 것의 모방으로부터 벗어날 능력이 있었다.(Horkheimer, M., Adorno, Th. (1969). Dialektik der Aufklärung. Fischer. 24)

그리고 미메시스의 언어인 상이 사회에서 실재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고 자기 폐쇄적으로 되는 일도 언어의 노동분업과 더불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계몽과 자연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노동을 통한 지배관계에 들어서면서, 자연에 자기를 비슷하게 함으로써 자연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방식인 미메시스는 계몽의 진보와 더불어 사장됩니다. 요컨대 예술의 “단절” 혹은 “닫혀 있음”은 예술이 주술과 달리 그 실제적 영향력을 포기하게 됨으로써 획득되는 것이며, 예술의 자율성도 이 가운데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연은 더 이상 비슷하게 하기[Angleichung]를 통해 영향받지 않고 노동을 통해 지배되어야 한다. 예술작품은 아직 주술과 공통되게도, 하나의 고유한, 자기 내에서 닫혀 있는[abgeschlossen] 영역을 정립하는바, 이 영역은 세속적 현존의 관련으로부터 밀려나 있다. 이 영역 안에서는 특수한 법칙들이 지배한다. 주술사가 제전에서 첫째로, 신성한 힘들이 유희한다는 장소를 모든 환경에 반해 한계짓는 것처럼, 각각의 예술작품에서는 그 주위가 현실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두드러진다. 예술은 영향에 대한 포기를 통해 마법적 공감과 자기를 구분하는데, 바로 이러한 포기는 마법적 유산을 더더욱 깊이 고수한다.(Horkheimer, Adorno, 1969, 25, 인용자 강조)

다시 말해 상의 언어가 그 실재적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사회와 단절되는 일은 계몽이 신화를 해체하고 미메시스의 영향력을 소거해서 무력화시킴으로써 발생하지, 처음부터 예술이 사회비판을 수행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라는 제 서술은 틀렸다고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예술이 사회비판적인 한에서만 자율성을 획득한다”는 주장이 과도하다고 보입니다.

그 외에 예술에서 내용과 형식 사이의 긴장이라든가, 보편자와 특수자 사이의 거짓 화해에 대한 비판이라든가 하는 논의는 정확히는 질문의 둘째 물음에 해당한다고 보이는데, 저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깊게 공부해보지 않아 그 물음에 답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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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남겨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천천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빕니다

  1. 예술은 원래 미를 표현합니다. 적어도 19세기까진 그게 통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엔 안 통합니다. 돈과 경쟁이 지배하고, 분노와 혐오가 만연한 현대 사회는 결코 아름답지 않기에 그러한 세상을 아름답게 묘사하면 거짓이나 키치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반성적인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현대 세계를 이해할 수 없고, 버림 받고, 고통스러운 곳으로 묘사합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베케트 연극에 나오는 황폐한 무대와 배우들의 무의미한 대사는 아도르노가 생각하는 현대 예술의 풍경을 잘 보여줍니다.

  2. 주체와 객체, 보편과 개별, 정신과 신체, 이성과 감성 같은 근대적 이분법을 지양하고자 한 철학자는 헤겔입니다. 그는 주체, 보편, 정신, 이성을 그 반대되는 것들의 우위에 놓았습니다. 아도르노는 이에 반대하며 객체, 개별, 신체, 감성에 우선권을 부여하고자 했습니다. 예컨대 신체가 없으면 정신도 없습니다. 예술은 이렇게 합리적 사고가 열등한 것들로 취급한 것들을 대변합니다. 아도르노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이 현대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3. 오늘날 예술의 자율성 논의에 새롭게 불을 지핀 철학자는 자크 랑시에르입니다. 그는 칸트와 실러의 미학을 자율성 미학의 원형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는 아도르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랑시에르의 책은 꽤 여러 권이 번역되어 있어서 쉽게 구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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