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h. W. 아도르노, M.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계몽의 개념」 - 4

  1. 계몽은 세계를 동일한 것이 반복되는 닫힌 세계로 고정시킴으로써 함께 폐쇄적인 반복으로 고착화되며, 이로써 계몽은 신화로 되돌아간다.
    14.1. 형상금령의 위반은 계몽에게도 일어난다. “계몽에게는 과정이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다는 점”이 계몽의 문제점이다.
    14.1.1. 수학적으로 포착된 세계에서 대상들은 미처 알려지지 않아도 원리상 알려질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14.1.1.1. 가령 방정식에 굳이 어떤 값을 대입하지 않더라도 방정식의 미지수(das Unbekannte)가 알려진 것(das Bekannte)으로 생각되듯, 세계는 수학적, 자연과학적 원리에 의해 알려진 것과 마찬가지로 간주된다.
    14.1.2. 수학이 절대적 심급(Instanz)이 됨으로써 세계는 수학적 세계, 원리상 계산 가능한 “수학적 잡다”(eine mathematische Mannigfaltigkeit)로서 “이상화”된다.
    14.1.3. 사유 또한 반성적(“사유에 대한 사유”)이 되지 않고 과정을 처리하는 도구로서 사물화된다.
    14.1.4. 그리하여 수학적 처리방식이 현대의 제의(Ritual),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설정된 세계관에서 사물과 세계의 동등화라는 미메시스6가 이루어지며, “사실적인 것만이 유일무이한 것이 된다”.
    14.2. 이렇게 실증주의적이 된 세계에서, 사실들의 총체로서의 세계를 정렬하고 처리하는 사유 이외의 것은 (주술의 금기를 위반하는 일이 주술사에게 어리석은 짓으로 비치듯) 그저 어리석은 이탈로 취급된다.
    14.2.1. 실증주의적 검열은 경험을 넘어 예지계로 이탈하는 형이상학적 주장들을 애써 금지할 필요 없이 무의미한 주장들로 취급하면 된다. “사물화된 사고는 한 번이라도 문제를 제기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DA 32)
    14.2.2. 실증주의는 “사회적 작동성의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운 하나의 특별 영역으로서” 제의나 예술을 묵과한다.
    14.3. 자연지배는 칸트적 구획 안에서 공허한 동일성의 체계가 되는 일을 대가로 치르고서야 얻어진다.
    14.3.1. 진보적 사유와 자신의 한계적 사유를 조화시키기로 한 칸트의 결정은 계몽의 비극적 운명을 예견하는 전조인 셈이다. “학문이 침투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는 세계에 없다. 그러나 학문에 의해 침투될 수 있는 것은 존재가 아니다.”(DA 32)
    14.3.2. 이성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나는 사고한다”가 수반될 수 있는 동일한 것만을 인식할 뿐이며, 이 국면에서 주체와 객체, 정신과 세계의 공허하고 추상적인 통일이 이룩된다.1
    14.3.2.1. “추상적 자기(Selbst)”는 “추상적 재료”만을 기록(Protokollieren)하고 체계화하는 활동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추상적 재료는 추상적 자기의 소유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14.3.3. “모든 존재자의 논리적 형식주의에의 종속은 직접적으로 발견되는 것(das Vorfindliche) 아래 이성의 순종적 굴복을 대가로 얻어진다.”
    14.3.3.1. 인식은 단순한 “지각하기, 분류하기, 계산하기”가 아니라 직접적 소여에 대한 규정적 부정에서 성립하지만, 형식주의는 사유를 그저 주어진 사실의 반복에 묶어놓는다.
    14.4. 바로 그렇게 계몽은 신화로 되돌아간다.
    14.4.1. 신화가 사용하는 신화적 형상/형체들도 이미 사실적인 영원성의 특성을 띠며, 신화는 “순환, 운명, 세계의 지배”를 진리로 간주한다. 이 점에서 신화 또한 신화적 형체들을 통해 학문의 이상과 같은 “거대한 분석 판단으로서의 세계”를 꿈꾼다.
    14.4.2. 신화적 사건은 일회적이 아니라 동일한 것의 반복이다. “사실적 사건을 정당화한다는, 신화적 사건의 일회성은 기만이다.”(DA 33)
    14.4.2.1. 가령 신화가 봄과 가을의 교차를 페르세포네의 억류로 설명할 때, 이 억류라는 사건은 결코 일회성을 지니지 않고 봄이 오고 가을이 올 때마다 동일한 것으로서 반복된다.
    14.4.3. 신화나 학문은 모두 존재자들을 신화적 사건이나 범주적 개념에 관련 지음으로써 새로운 것을 오래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2. 사회적 불의의 은폐와 정신의 사물화, 집단적 지배에 힘입어, 계몽은 신화로 되돌아간다.
    15.1. 신화의 세계에서는 성과 속이 분리되었지만, 계몽된 세계에서는 신화적인 것이 세속 안으로 들어와 뒤섞인다.
    15.1.1. 신화적 개념들로부터 말끔히 분리된 현존재는 도리어 누멘적(numinos)2이 되어버린다.
    15.1.2. 사회적 불의는 파헤치기 어려운 신성불가침한 것이 되었다.3
    15.2. 자연지배는 지배 대상들로부터의 소외뿐만이 아니라,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 또한 신화로 되돌린다. “산업주의는 정신을 사물화한다.”(DA 34)
    15.2.1. 자본주의 경제 체계에 힘입어, 개인은 예상 가능한 행동양식의 다발, 객관화된 행동 패턴 등으로 환원된다.
    15.2.2. 이념에서 범죄에 이르기까지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학교 교실에서부터 노동조합에 이르기까지” 집단에 의해 철저히 감시되고 통제된다.
    15.2.2.1. 이 집단 자체도 비밀스럽게 작동하는 권력을 은폐하는 표면일 뿐이다.
    15.2.2.2. 이 집단은 물론 인간의 참된 질을 서술하지 못한다.
    15.3. 마나를 보다 특정한 개념으로 분화시키고 주술사들의 기만을 가능케 했던 신화적 형상들은, 빈틈없이 관리되는 세계 속에서 다시금 지배로 되돌아간다.

----이하 각주

1.『순수이성비판』 B판의 초월적 연역을 언급하고 있다.
2.“누멘적”이라는 말은 오토(R. Otto)가 Das Heilige (1917)에서, 불가지하고 전율적인 존재에 당면했을 때 인간이 겪는 종교적 경험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다. 본래의 용법에 의하면, 인간은 누멘적인 것에 직면했을 때 “두려운 신비”와 “매혹적 신비”라는 양가적 감정을 느낀다.
3.어떤 의미에서 누멘적이고 신성불가침한 것인지를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각종 테크놀로지적,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에 의해 은폐되어 있는 상태를 이렇게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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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이 세계를 수학적으로 파악한다는 설명은 갈릴레이 이후에 자연이 수학화되었다는 후설의 한탄이나 근대의 세계상에서는 수학적으로 기획투사된 것들만 존재하게 되었다는 하이데거의 비판과 유사하네요. 이런 이론철학적 작업에서의 문제를 지적하여 실천철학적 변혁까지 지향한 방식도요. (그런데 왜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는 현상학이 사회비판과 무관한 '전통이론’이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보다 현상학을 좋아하면서 본심을 숨기는 비판 이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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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보셨습니다. 『계몽의 변증법』에는 안 나와 있지만, 『부정변증법』을 비롯해서 여러 곳에서 아도르노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이 그런 과학주의적 세계상으로의 "사물화"에 대한 저항을 내포하고 이들이 그러한 환원 불가능한 요인들을 구제하려 한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다만 아도르노는 이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죠. 비판을 여러 군데에서 해서 정확히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대략적으로는, "유럽 학문의 위기"로부터 학문을 구제해서 새로이 확고부동하게 정초 지으려고 했던 후설의 시도가 전통 형이상학으로의 회귀라는 혐의가 있고, 의식의 주관적 내재성이나 직접성이라는 계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식으로 비판합니다. 하이데거로부터는 반(反)합리주의적인 경향을 꼬집거나, 존재자 전체로부터 변별되고 어떻게든 존재적으로 규정 불가능한 존재 개념이 공허하고 동어반복적이라고 비판하거나, 기초존재론의 구도가 여전히 관념론적이라고 비판하거나 합니다. 뭐 현상학을 잘 모르는 저로서는 이런 비판이 온당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