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방되고 고립되었던 예술은, 철학과 신앙이 실패했던 작업인 기호와 상의 통합을 전체로서 화해시킬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다.
11.1. 철학은 기호와 상의 분리에 대응하는 개념과 직관의 분리를 봉합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했다.
11.2. 한편 철학은 개념의 편에 서서 상을 배척하였다.
11.3. 상, 주술의 원리(미메시스)는 예술의 영역으로 추방된다.
11.3.1. “자연은 다른 것에 비슷하게 하기를 통해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으며 노동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DA, 25)
11.4. 추방된 예술은 작용력 없는 가상으로서 실제로부터 분리되어 대립관계를 이룬다.
11.5. 바로 이 대조로 인해 예술은 주술의 유산을 잘 계승하며, 실제(=“살아있는 실존”)에 흡수되지 않고 오히려 실제의 요소를 지양하여 품고 있다.
11.5.1. 주술이 발했던 효력의 원인이자 미적 가상의 힘은 바로 특수한 것을 통해 전체가 현상한다는 점이다.
11.5.2. [특수한 것과 전체적인 것의] 중첩(Verdoppelung), 이로써 총체성을 표현할 능력이 바로 예술작품이 갖고 있는 힘이다.
11.6. 그러나 사회는 예술보다 항상 철학, 개념적 인식에 우위를 부여하였으며, 종종 지식을 제한하고 화해를 달성하고자 하였을 때도 그 기대를 예술이 아니라 신앙에게 걸었다.
11.7. 그러나 신앙은 화해에 실패하고 “근대의 특별한 기만”이 된다.
11.7.1. 신앙에서는, 태고의 말에 상징적 힘을 불어넣었던 진리의 원리에 도달하는 대가로, 말에 대한 복종이 강요되었다.
11.7.2. 신앙은 지식과의 (대립적이든 친연적이든) 관계에 묶여있음으로써만 성립한다.
11.7.3. 이런 필연적 의존 관계 때문에 분리는 고착화되고, 신앙은 광신주의, 잘못된 화해로 나아간다.1
계몽에서 언어는 개별자에게 보편적 지배질서를 강제하고 그로써 지배질서의 자기보존에 시중을 들었으며, 학문적 중립성을 표방하여 이 질서를 현실과 일치하는 지위로 끌어올리고자 했다.
12.1. “언어가 역사 속으로 등장하자마자, 사제들과 주술사들이 언어의 지배자로 존재한다.”(DA 26)
12.1.1. 주술사들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장소들을 마나가 유출되는 곳으로서 고정시키고, 여기에 제전들을 부가한다(DA 27).
12.1.1.1. 이 제전을 통해 제전의 전문적(zünftig) 지식과 폭력이 개진된다.
12.1.2. 사회가 전개될수록 자연운행(Naturlauf)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구성원 모두의 역할이 아니라 특정한 계급의 특권이 되고, 지배와 복종은 분리된다.
12.1.2.1. 물론 그 이전의 단순한 사회질서에서도 “자연운행은 굴종을 요구하는 규범으로 올라서게 되었다”(DA 27).
12.1.3. 그리하여 부자유하고 반복된 사회적 속박을 통해, 자연의 동일한 반복적 질서가 강제적 구성원들에 의해 주입된다.
12.1.4. 이런 지배질서의 과정 속에서, 상징은 자연의 반복을 의미한다.
12.2. 개념, 학문은 이런 상징의 폭력적 특성을 계승한다.
12.2.1. 뒤르켐이 지적한 바 있듯, 모든 개념적 질서는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관계들, 즉 분업에서 기초 세워진다.
12.2.1.1. 이 질서는 당연하게도 사회의 연대가 아니라 내재적 통일성을 반영한다.
12.2.2. 분업은 이 사회적 전체(das gesellschaftliche Ganze)의 자기보존에 봉사한다.
12.2.2.1. 이성적인 것, 보편적인 것의 지배는 필연적으로 항상 특수한 것에 자신의 일반성을 강제하는 일로 귀결되며, 분업으로 주어진 각자의 일을 개별자들이 수행함으로써 보편적인 지배 질서의 힘은 다시 증대된다. (이로써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 되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 된다”.)
12.2.3. 철학적 개념들은 이러한 관계들을 “사실과 일치하는 현실의 지위로 끌어올렸다”(DA 28).
12.2.3.1. 가령 “아테네의 시장”으로부터 유래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들은 “자연(Physik)의 법칙들, 자유민의 평등, 여자들, 어린이들, 노예들의 열등함을 반영한다”.
12.2.3.2. “형이상학적인 강조, 이념들과 규범들을 통한 제재는 다른 게 아닌 바로 견고함과 배제성의 실체화였다.”(DA 29)
12.2.3.3. 사회적 권력의 강화에 종사하던 이념들은, 사회적 권력이 견고해져감에 따라 불필요하게 되었고 소멸되어갔다.
12.2.3.4. 형이상학을 대체한 학문적 언어는, 중립성/객관성을 참칭하여 지배질서를 현실로 끌어올리는 형이상학의 역할을 더 훌륭하게 수행한다.
규정된 부정, 변증법은 긍정성에 호소하지 않고 철저히 부정성과 비진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형상금령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유일한 희망이 된다.
13.1. 형이상학적 실체를 없애버리는 유명론으로서의 계몽은 이름, 고유명 앞에서 작동 정지한다.2
13.2. 유대교는 여하한 이름으로 지시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것, “형상금령”(Bilderverbot)의 계율의 충실한 이행에 유일한 희망을 건다.
13.2.1. 이는 참도 거짓도 모두 거부하고 체념으로 내려 앉는 추상적인 부정과 다르다. 추상적 부정은 “기만에 맞선 저항의 거짓된 형식”들이다.
13.3. 변증법, “규정된 부정”은 불완전한 우상들과 상(像)들을 배척함으로써, 언어와 글을 통해 상의 비진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13.3.1. 헤겔이 강조하듯, 변증법은 실증주의적 원리에 따라 상을 해체해버리는 작업과는 구별된다.
13.3.1.1. 물론 헤겔은 “체계와 역사에서의 총체성”을 절대화함으로써 금령을 위반하고 신화로 빠져들었다.
----이하 각주
1.다음의 주장을 하는 것처럼 사료된다. 종교는 개념적인 언어에서 나아가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지만, 근거를 물어 따지지 않고 주어진 말에 복종할 따름이며, 이는 지식과 근본적으로 상충되고 폭력적인 특성으로서 균열과 파괴를 낳는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얻어낸 결과물을 선뜻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논증의 구조를 읽다보니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겨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기술적 개념어 및 문장 이해 관련 질문:
아도르노의 책을 접근할 때 가장 큰 난점은ㅡ여타 프랑스현대철학자의 저작물들과 마찬가지로ㅡ중요하고 진지하게 쓰이는 개념어군들이 굉장히 metaphorical한 nuance를 지니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들 수 있을 듯 합니다. 가령, ‘마나’ '주술’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을듯 합니다.
TheNewHegel님께서 정리해준 내용 가운데:
12.1.1. 주술사들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장소들을 마나가 유출되는 곳으로서 고정시키고, 여기에 제전들을 부가한다(DA 27)."
위와 같은 내용은 “계몽의 이념 아래에서 진행된 보편학문의 이념과 그에 부합하게 고안된 학문언어가 어떻게 현상 세계를 한낱 세계상Weltbildes내지 표상Vorstellung으로 전락시켰는가?” 혹은 "계몽의 언어가 동일자의 전체주의적 폭력 행사가 실현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봉사하였는가?"라는 문제의식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에 놓이는지 궁금합니다. 위 문장을 평어로 해제해주실 수 있는지요?
흥미 있게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해주신 문장은,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 등장한 원시제전 시대의 사유와 행위가 어떤 양상을 띠는지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한 평이하게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인류 역사의 초기에 바다는, 배를 타고 나간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무시무시한 영역이었을 것입니다. 이때 무당(“주술사”)은 이 바다를 세계의 나머지와 구분지어 바다용왕이 깃든 장소(“마나가 유출되는 곳”)라고 이름붙인 후, 바다를 잠잠하게 하기 위해 용왕제를 지냅니다(“제전들을 부가”).
종래의 시각에서 봤을 때 이런 사유와 행위 방식들은 계몽 이전적인 것이었습니다만, 아도르노가 보기에 이는 (원초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이미 계몽적 사유방식의 시작을 형성합니다. 첫째로, 주술사들이 저 장소를 "신성한 힘의 장소"로 부르는 것은 개념을 통해 대상을 파악하는 계몽적 사유의 단초이며, 이는 동일자인 개념을 통해 다양한 대상을 추상하는 폭력의 단초이기도 합니다. 둘째로, 신성한 힘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내며 주술을 읊는 행위는 특정한 수단을 통해 대상을 의도대로 조작하려는 계몽적 실천의 단초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원시적인 민간신앙과 종교의식이 사회에서 성립하는 과정에서 그 구성원들은 믿음들을 믿고 종교의식을 위해 노동하고 희생하도록 강제됩니다.
제가 요즘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종종 읽고 있는데, 아마 아도르노가 이 책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게 아닌가 싶네요. 프레이저가 주술의 종류와 특징을 범주화하면서, 주술이 전제하고 있는 여러 사고 방식들(가령, 붙어 있던 것들은 서로 떨어져도 영향을 준다)이 근대과학의 기초가 되었다고 주장하더라고요.
윤님의 의견에 부가적인 설명을 추가하자면, 대략 종교에 대한 두 가지 정도의 견해가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는 주술/마법에 대한 의견입니다. 에드워드 타일러 - 제임스 프레이져 - 에밀 뒤르켐/마르셀 모스 - 말리노프스키 같은 학자들은 모두 ‘주술을 과학 혹은 근대 학문과 구분합니다.’ 강조점은 다 다르지만, a) 과학 이전에 '닮음/유사성’에 기반을 한 일종의 분류 체계라는 점과 b) 그런 점에서 단순한 광기와 구분되어야하는 '전문적 영역’이라는 점입니다.
둘째는 저들과 결을 달리하는, 종교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특히 주술(종교)를 이데올로기와 사실상 동일시하고, 이를 통해 지배/피지배 - 사회의 유지 등을 말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두 지점에서 모두 비판이 가능해 보입니다. 우선 주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호하며, 따라서 그것이 실제로 현실에 있는 것을 지칭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고로 홉스나 루소마냥 단순한 사고 실험으로 보는게 나을수도 있어 보입니다.)
둘째는 강한 마르크스적 향취입니다. 우선 종교가 ‘무언가를 강제한다고’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종교를 그 외부자의 관점에서만 기술한 것으로 읽힙니다. 예를 들어, 무당이 굿을 하고 금기로 팥을 먹지 말라는 금기를 준다고 합시다. 굿의 당사자는 이 금기를 수행할 겁니다.
외부자의 관점에서, 이는 철저한 이데올로기적 행위로 보일 수 있습니다만, 실제 종교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겐 이 행위는 자신의 믿음 - 자신의 구원을 위한 행위로 보는게 타당해보입니다. 그렇기에 당연히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고요.
종교를 가짜 혹은 미신으로 보지 않는 이상, 이걸 ‘강제함’, ‘사기’ 등의 이데올로기적 언어로만 보는 건 위험해보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정말 종교적/주술적 전문지식이 '일방향적인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종교적/주술적 전문지식들을 ‘다른 방식으로’ 읽어서 현재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사례를 무수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다른 방식으로 읽는 통일교/라스타파리즘이나 불경에 대한 급진적인 해석을 제시했던 삼계교 등을 그 예시로 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주술/종교 역시 어떠한 체계라는 점에서, 이는 당연히 그래야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도르노 이해에 관한 두 가지 논점은 저도 대부분 동의가 되고, 세 가지 비판 논점도 제가 공부하기로 실제로 학자들 사이에서 많이 제기되는 비판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세 가지 비판점에 관해 여쭙고 싶은 질문이나 재반론의 여지가 있는 것을 간략히 적어보겠습니다.
아도르노의 주술 개념은, 적어도 저자의 의도에 의하면, 다분히 "현실에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용된 개념입니다(물론 저자의 의도가 보기좋게 빗나갔을지도 모릅니다만). 아도르노의 의도를 감안해서 해석을 가한다면,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처럼 고도의 복잡성을 가지고 체계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많은 종교들이 저 '주술’이라는 범주에 포함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예컨대 저자들이 『계몽의 변증법』에서 폴리네시아 신화로부터 “마나” 개념을 직접 차용하고 있듯 그러한 민간신앙들이 '주술’의 예시로 간주될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덜 복잡한’ 종교들이 '덜 합리적’이라거나 하는 것이 되는 건 아니겠지요.)
아도르노의 주장은 종교 및 주술이 강제 및 이데올로기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강한) 주장이라기보다는 강제적 및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는 (보다 약한) 주장에 가깝습니다. 일단 종교 참여자들이 자발적으로 믿고 행한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아도 아도르노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일이 가능합니다. (종교뿐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란 사회 구성원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층위에서 현존하는 지배질서를 정당화하고 긍정하는 데에 그 성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아도르노가 종교에 대해 말하는 강제적 성격이란, 종교가 사회 질서로서 구성원의 사유와 행위를 특정한 방식으로 제약하는 구속력을 지닌다는 데에 있습니다. 구성원들은 좋든 싫든 해당 종교에서 기대되는 양식에 자신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 정도의 약한 논점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종교를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도 아도르노의 주장은 충분히 수용 가능한 듯합니다.
종교 및 주술의 체계 자체가 억압이 아닌 비판 및 전복의 가능성으로 차용될 수 있다는 것은 아도르노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견해입니다. 사실 외부적 관점을 끌어들여 비판하지 않는다면, 가능한 비판의 방법은 내부의 교리를 “다른 방식으로 읽어서” 비판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이 방식은 말하자면 체계 내적인 믿음들을 척도로 체계 자체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변화시키는 방법인데, 이런 종류의 비판은 바로 아도르노 자신이 제시하는 ‘내재적 비판’ 개념의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아도르노는 이런 내재적 비판이 가능한 유일한 비판의 방법이라고까지 주장합니다.)
주술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과연 기독교/불교 등의 종파불교든 다른 비종파 상태의 속칭 민간신양이든, 이걸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주술’이라는게 정말 실체가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a) 일례로, 주술을 단순히 '잘 정의된 어떤 단위’가 아니라 '가족 유사성’으로 비슷해보이는 걸 뭉뚱그려놓은 정의로 보는게 더 타당할지도 모릅니다. 과연 문화적 맥락이 다다르고, 하나하나의 내용이 다 다른 - 기독교, 이슬람, 불교, 나이지리아 요루바족, 폴리네시아에서 ‘동일하게 잘 정의될 수 있는’ '주술’이라는 카테고리를 주장하는 건, 위험한 견해로 보입니다.
특히, 아도르노가 종교-진화론/발전론적 전제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고대인/최초의 종교/주술 = 오늘날의 부족 종교라는 동일시가 여기에 전제되어 있어 보입니다. 제대로 된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동일시가 옹호될 수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b) 설사 주술이라는 잘 정의된 카테고리가 있다고 해도, 과연 그게 아도르노가 설명하는 주술과 동일한 의미 - 기능일지 의문스럽습니다. 지나치게 자신의 견해를 투영한 것 아닐까, 라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c) 그렇기에, 아도르노의 ‘주술’ 개념은 현실에 있는 무언가를 설명하는 개념이라기보단, 아도르노가 자신의 이론을 위해, 현실에 있는 여러 자료들을 재구성한 '사고실험’으로 보는게 더 나을거 같다는 의견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