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h. W. 아도르노, M.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계몽의 개념」 - 2

  1. 신화가 이미 계몽이었듯(5), 계몽도 그 도정에서 점점 신화로 된다.
    7.1. 계몽은 기존에 정립된 이론들이 “그저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통해 이론을 주술의 지위로 끌어내고, 대신 새로운 이론을 앉힌다. 그리고 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로써 계몽은 신화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7.1.1. 신화에서도 학문에서도 합리주의적인 모든 체계는 필연성의 형식을 띤다.
    7.2. 계몽은 신화적 상상력에 맞서 내재성, 반복의 원리를 내세우지만, 바로 그 점에서 계몽은 신화와 동일하다.
    7.2.1. 인간은 반복의 체계에 편입된 것들의 “대상성”(Vergegenständlichkeit)이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 만들어준다5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간도 그 체계에 편입된 대상의 하나일 뿐이다.
    7.3. “아무것도 동시에 자기 자신과 동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대가로 모든 것과 모든 것의 동일성이 얻어진다.”(DA 18)1 바로 이 “보편적 매개”(universale Vermittlung)를 통해 계몽은 (마치 칸트가 “가능한 경험의 한계들”을 정립하듯) 경험을 자기의 기준대로 한계 지워버린다.
    7.3.1. 계몽은 추상화라는 도구를 통해 자신이 헤아릴 수 없는 것, 통약 불가능한 것(das Inkommensurable)을 제거하고 세계를 균일화한다.
    7.3.2. 이와 같이, 실재에서 인간은 그 자체로서의 개별 인간임을 부정당하고 사회 내에서 개별성, 정체성을 부여받아 속박된다.

  2. “객체에 대한 주체의 거리는 개념 형성의 전제조건”(DA 19)이며, 주체와 객체의 거리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거리에 근거한다.
    8.1. 일반성을 특징으로 하는 개념적 사유는 확고한 지배질서를 갖춘 사회 질서의 구조를 객체에 대한 주체의 지배라는 형식으로 충실히 반영한다.
    8.1.1. 정주 생활과 더불어 소유관계가 확립되면서 사회의 지배질서도 확고해졌으며, 이로부터 고차적인 신화 체계가 출현했다.
    8.1.2. 개념적 사유는 미메시스적 사유, “대상을 현실적으로 적중시키는[만나는] 인식”을 금지하고 정렬하는 사유만을 진리에 이르는 사유로 인정한다.

  3. 동등성(Gleichheit)의 원리에서 주술과 문명은 같으며, 문명은 이 동등성의 원리를 심화시켰을 따름이다.
    9.1. 제전과 종교는 (가령 선악이나 행/불행의) 미구별성(Ungeschiedenheit)을 아직 보존하고 있었다.
    9.1.1. 가령 마나는 미분화 상태의 미지의 실체로서, 인간에게 생동하며 초월적인 것으로 경험되는 자연의 위력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9.2. 이 경험의 두려움의 표현(“공포의 외침”)은 그러나 불안의 표현으로서 이미 개념적 구별로 자연을 고정시키는 작업을 수행한다.
    9.2.1. 사물들은 이미, 신성한 존재들의 거처로서 생동하는 것과 그 밖의 것으로 분류되고 고정된다.
    9.3. 개별 사물들은 언어의 객체[대상]로 포획되어 개별자 자체가 아니게 됨으로써 동일성을 얻는다(7.3 참조). 이것이 객체화 과정이며 개념과 사물이 분리되는 과정이다.
    9.4. 이로써 계몽은 모두 알려져 있음(=내재성)을 산출하여 불안을 해소하고자 한다. 계몽은 불안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신화적 공포와 다르지 않다.
    9.4.1. 이 내재성은 영구히 닫힌 것으로 상정되는 동일성의 체계이다.
    9.5. 내재성 안에서 마찬가지로 정의(正義)도 동등성의 원리로 격하된다. 정의는 단순한 징벌과 포상의 체계로 된다. “따라서 신화적 정의에게는 계몽된 정의에게처럼 죄와 벌, 행복과 불행이 방정식의 변들(Seiten der Gleichung)로서 유효하다.”(DA 22)

  4. 언어는 기호(Zeichen)와 상(Bild)이 점차 분리되면서 진리성을 상실하게 된다.
    10.1. 본래 말(Wort)은 기호와 상의 결합이었다는 의미에서 상징적인 것이었다(상징은 기호와 상의 결합이다).
    10.2. 그럼에도 상징은, “반복되는 자연”인 신화가 보여주듯이, 영원한 반복을 특징으로 한다.
    10.2.1. 신화의 신들은 단순히 개별성, 일화,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일반성과 개별성을 모두 가지는, “일반적인 권력”으로서 자연의 구체화였다.
    10.3. 신화의 이야기들 가운데 “요소들의 혼합, 압박, 충돌(Stoß)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이 형성되었고, 학문은 신화를 해체하면서도 이 부분을 계승하였다.
    10.4. 학문과 문학의 분리, “언어의 노동분업”과 함께, 말에서 기호와 상의 분리가 일어난다.
    10.4.1. 학문언어는 인식을 위해 미메시스를 버리고 계산으로 전락하며, 예술언어는 미메시스를 위해 인식을 버리고 모사, 모방으로 전락한다.
    10.4.1.1. 한편 “진정한 예술작품들만이 어떻든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한 단순한 모방으로부터 벗어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DA, 24).
    10.5. 이렇게 출현한 예술과 학문의 분리는 심화되어, 종국에는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되며 관리된다.
    10.6. 둘의 고립 및 대립으로 인해 기호와 형상 각각의 두 원리는 진리성을 잃어버린다.
    10.6.1. 역설적이게도, 학문은 한낱 “떼내어진 기호의 체계”인 유희가 된다는 의미에서 예술처럼 되며, 예술은 단순한 모사에 불과해진다는 점에서 실증주의적으로 된다.

----이하 각주

1.계몽은 개별자를 개별자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체계 속에 동일화하여 사유한다. 여기서 개별자는 개별자 자신과의 동일성을 잃어버리고 계몽 내의 다른 사물들과 동일한 것이 된다. “… 동일화 사고는 ‘개별적인 특수한 것’을 ‘일반적인 것의 강제적 틀’에 들어가도록 몰아붙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개별적인 것이 개별적인 것으로 존재하게 되는 동질성을 무효화시킨다.” 문병호, 『아도르노의 사회 이론과 예술 이론』, 문학과지성사, 1993,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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