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핀카드, 『헤겔의 자연주의』 1장

몇 달 전에 테리 핀카드가 쓴 『헤겔의 자연주의』라는 연구서를 찾았습니다. 헤겔이 자신을 관념론자로 위치 지우는 까닭에 결국 정신이라는 특별한 층위를 도입하려는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통념에 정면으로 반하여 헤겔을 자연주의자로서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관심사에 맞아 흥미를 끕니다. 이런저런 일로 손을 못 대다가 이번에 1장을 읽고 정리해서 올려봅니다.


Pinkard, Terry (2012). “Disenchanted Aristotelian Naturalism.” Hegel’s Naturalism: Mind, Nature, and the Final Ends of Lif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7-44.

A: 헤겔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회

정신을 가진 동물로서의 인간을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지, 실천이성이 인간의 삶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어떻게 규명할 것인지에 관한 입장을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끌어낸다.

널리 알려진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의지 개념이 없었으며, 이 개념은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에 기독교 전통에 의해 도입되었다. 이 견해에 반하여,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의지, 자유, 의도 등에 관한 개념을 읽어낸다. 그 자체 목적으로 추구되는 좋은 삶 즉 행복(eudaimonia)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헤겔에 따르면, 우리가 완전한 삶을 위해 이성과 자연적 경향성 모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 법칙과 개별 행위자 고유의 특성들이 조화를 이루는 중용에 이르러야 함을 의미하며, 감정을 모두 사상한 순수 실천 이성만으로는 탁월성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한다. 핀카드는 여기서 ‘자기로 머물러 있음’(Beisichsein)이라는 헤겔의 자유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발성 개념을 연결 짓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행위의 자발성은 세 가지를 기준으로 한다. (1) 운동 원리가 행위자 내에 있다. (2) 행위의 기원이 행위자 자신이다. (3) 행위가 외적 강제의 결과가 아니다. 헤겔은 자발성 개념을 다음처럼 재서술한다. 자발적 행위는 행위가 행위자의 내적 의도에 따라 외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을 헤겔은 다음처럼 변형한다. 의도된 한 행위에 대해 행위자 자신의 해석과 타인의 해석이 일치할 때, 이 행위는 자발적 행위이다. 어떻게 헤겔은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가?

인간은 자기의식을 지닌다는 점에서 비자연적이지만, 이 자기의식의 출처는 자연세계와 존재론적으로 다른 형이상학적 세계에 기인하지 않는다. 즉 인간은 다른 자연물과는 다른 동시에 자연세계와 연속성을 지닌다. 이 지점에서 헤겔은 칸트 등의 철학자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근접한다. 헤겔에 의하면, 우리가 다른 동물과 분기하는 지점은 “자신을 동물로 사유함으로써”(Pinkard, 2012: 18) 자기를 해석하게(self-interpreting) 된다는 점 외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런 주장으로써, 헤겔의 ‘관념론’은 세계가 모두 주관의 표상이라거나 정신적 실체 등을 진정한 실재라고 주장하는 통념적인 관념론과 궤를 달리한다. 동물이 관념론자라고 주장하는 헤겔의 구절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는데, 헤겔에 의하면 동물은 맞닥뜨린 사물을 먹어치우기 때문에 관념론자이다. 이들이 관념론자인 이유는 자연이 물질이라는 점을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태의 자립성(Selbstständigkeit)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헤겔의 특이한 관념론 개념은 헤겔의 자연 개념에서도 드러나는데, 자연에 대한 헤겔의 입장은 요컨대 ‘탈주술화된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주의’라고 할 수 있다. 왜 핀카드는 헤겔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탈주술화된”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이는가? 첫째, 헤겔은 철학이 경험적 자연과학에 부합하는 정도를 넘어 자연과학을 철학의 전제조건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자연철학은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실제 자연과학 이론들이 자연에 대해 내놓는 설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그럼에도 자연철학은 이들 이론들이 제시한 대로의 자연이 진정 자연 개념의 전부인지, 헤겔의 용어를 쓰면 자연과학적 개념의 총체로서의 자연이 온전하게 절대자를 표현하는지 검토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의 자연철학은 개별 자연과학과 달리 하나의 형이상학을, 셀라스(W. Sellars)의 말대로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사물들이 어떻게 가장 넓은 의미에서 서로 관련되는지”를 밝히는 작업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자연과학과 자연철학의 구분은 후험적/선험적의 구분에 근거한다고 이해하면 안 된다. 헤겔은 논리학에서 선험과 후험의 엄격한 이분법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셋째, 헤겔은 당시 자연과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자연세계의 현실적(wirklich) 존재들에 대해 역학(기계론, mechanics), 화학, 생물학의 세 가지 설명이 존재한다고 결론 내린다. 역학은 전체를 부분들의 인과적 상호작용으로 설명한다. 화학은 서로 다른 물질들이 다양한 조합 속에서 지니는 유사성 또는 비유사성을 설명한다. 생물학은 한 부분. 기관이 전체 내에서 수행하는 생물학적 기능의 관점에서 전체를 설명한다. 자연철학은 이들 각각의 설명이 절대자에 대한 무제약적인 설명이 될 수 있는지, 그렇게 전제할 경우 어떤 모순들이 따라 나오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자연철학에 따르면 각각의 설명 모델은 모두 불충분한 시도로 밝혀지지만, 만물을 신성한 힘의 불가해한 표현으로 이해하는 주술화된 자연으로의 회귀는 대안이 될 수 없다. 자연과학의 성과는 그런 식의 세계관을 불가역적으로 폐기했기 때문이다. 주술화된 자연은 물론 자연과학 자체도 자연의 이념에는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나는 이 지점에서, 헤겔은 자연을 정신의 타자로 사유하기를 제안한다. 우리는 자연적 존재이면서도 우리 스스로를 자연으로부터 구별함으로써 정신적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정신과 구별된 자연은 여전히 다른 방식으로, 즉 인간의 욕구와 열망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이해될 여지를 남겨둔다. 다시 말해 탈주술화된 자연관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러한 자연에서 출현하는 정신 개념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자연철학은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에 자연과학을 반영하면서도 과학적 자연관에 평가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접근한다. 예컨대 자연철학은 법칙/사건 모델에 입각한 설명이 자연 전체에 대한 설명일 수 있는지, 탈주술화된 자연과학적 자연이 자체로 절대적인지, 사물을 독립적인 실체로 간주하는 동시에 인과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간주하는 물리적 사물 개념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견지될 수 있는지 등을 고찰한다.

헤겔이 당시의 자연과학에 따라 당초 제시했던 여러 세부적인 논점들은 오늘날 자연과학의 발전에 따라 의문시되었다. 예컨대 헤겔은 유기적 전체가 역학적 전체와 달리 부분으로 분석되지 않으며, 따라서 생명에 대한 순수 역학적 및 화학적 설명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헤겔은 이 주장을 당시의 생물학적 성과에 기초하였다. 그러나 유기화학의 출현은 생물에 대한 화학적 설명의 불가능성을 의문시한다. 그밖에도, 가령 20세기의 양자역학 및 양자화학의 출현은 헤겔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법칙적인 역학적 설명 모델을 의문시한다. 그러나 여전히 이 발전들은 헤겔의 전체 자연 개념과는 정합적이다. 헤겔의 전체 논지는, 자연이 탈주술화된 자연이라는 것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는 좋거나 나쁜 방식으로 조직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어떤 것이 그 생물에 좋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도 그 자체로는 더 좋은 것으로 자신을 조직하거나 하지 않는다. “전체로서 자연은 어떤 것도 목표하지 않는다. 자연의 질서 속에 어떤 것들을 목표로 하는 생명체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말이다.”(Pinkard, 2012: 23)

이런 의미에서 자연은 진정으로 전체를 구성하지는 않으며, 자연에 대한 어떤 파악도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자연이 전체로 파악될 수 없다는 점은 자연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이것이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우리가 자연을 파악함으로써이다. 우리는 행위자로서 우리 자신을 최선의 형태로 실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체로서의 자연은 이상(Ideal)이다.

  1. 동물의 생

유기적 생명에 이르러 자연에 대한 두 가지 상이 충돌한다. 자연은 과학적으로는 역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의 총체로 간주될 수 있는 한편, 기관이 생명체 전체에서 작동하는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와는 상이한 목적론의 개념을 차용해야 하는 듯 보인다. 이 충돌은 칸트의 이율배반 중 하나이기도 했다. 칸트는 목적 개념을 우리의 객관적이 아닌 주관적 타당성에 한정함으로써, 유기체적 목적론과 인과 법칙적 자연 개념을 조화시키고자 했다.

헤겔은 이러한 제안에 반하여 동물 스스로가 주관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즉 헤겔은 동물이 적절한 수단들을 이용하여 동물 자체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는 자기관계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동물에게는 내면과 외면의 구분이 존재한다. 동물은 단순히 물리적·공간적으로 몸 안쪽에 있다는 의미를 벗어나 내면의 삶(inneres Leben)을 갖는 것이다.1 동물의 내면성은 어떤 사적인 심적 사실이 아니라, 자기보존을 위해 자기와 환경을 구별하는 데에서 성립한다. 동물에게 환경은 감각(Empfindung)을 통해 외면으로 인식되는 것, 동물 자신의 목적(=보존과 번식)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물의 내면성은 이처럼 환경과의 경계를 지움으로써 성립한다.

비유기적 사물들은 이런저런 상태에 놓여 있을 수 있지만, 그 사물이 그렇게 하기로 행동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반면 동물은 이런저런 행동들을 통해 자기의 존재를 보존한다는 목적을 추구하며, 이런 의미에서 자기 삶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동물이 목적론적 자기관계성을 지닌다는 점은, 동물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성립함을 의미한다. 이 특수한 자기관계성 때문에 동물은 잘 기능하거나 잘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일 수 있다. 즉 건강하거나 아플 수 있다.

그리고 이 목적성과 관계된 설명 방식은 한낱 주관적 타당성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를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객관적 타당성을 지닌다. 예컨대 동물의 병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물리학과 화학의 틀을 넘어 동물이라는 유기체를 목적을 가지고 기능을 수행하는 전체로 간주해야 한다. 이러한 설명은 생기론과 같은 의심스러운 형이상학을 도입하고 세계 전체에 목적론적 질서를 부여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목적성은 자연 내에 존재한다. 자연 전체가 목적적이지는 않더라도 말이다.”(Pinkard, 2012: 25)

  1. 동물의 생의 내면성

헤겔은 동물의 의식 일반의 특징인 감각과 인간적 의식에 특유한 표상을 구분한다. 동물의 감각은 경험적 내용을 가져다주지만, 이 내용의 형태는 반성적 의식에서 나타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처럼 헤겔은 의식의 여러 가지 계기들을 구분한다. 그 중에서도 원초적인 단계라 할 수 있는 영혼(Seele)은 여러 동물적 운동 기능을 통해 세계 및 타자와 상호작용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는 인간적 의식에 미처 모두 포착되지 않는 전반성적인 반응방식들이다. 동물적 영혼은 규범성과 비규범성(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뚜렷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인, 신체에 대한 내감의 단계에 불과하지만, 보다 고차적인 의식의 기저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한다.

브랜덤은 규범성을 통해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했지만, 헤겔의 체계에서는 동물의 의식 역시 규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영혼의 단계에서도 목적에 대한 좋음/나쁨의 구별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의식은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으며, 몇몇 종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여 계획을 수정할 능력도 있다. 이들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은 규범성/비규범성의 구분에 있다기보다는, 목적을 목적으로서 자각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있다. 다르게 말하면, 동물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이유(목적)를 지닐 수는 있지만, 이 이유를 이유라고 인지하고 그것을 추론적 관계에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뿐만 아니라 동물은 자신의 이유를 이유로 자각할 방법 또한 모른다. 동물은 개체 자신의 존속과 재생산을 목적으로 행위하지만, 이 목적 자체를 의문에 붙일 능력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동물적 의식은 목적을 목적으로서 향유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영혼에서 목적은 즉자적이지 대자적이지는 않다.

인간의 의식과 동물의 의식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즉 두 가지 의식 모두 경험 속에서 유의미한 내용을 획득한다. 그러나 동시에 양자 사이에는 날카로운 단절 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오직 인간만이 자기의식을 통해 이 내용을 온전히 개념적인 형태로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속성 가운데의 단절은, 동물적 의식에서 인간적 의식까지의 단계를 생각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보다 고차적인 단계는 그 이전의 단계와 구분이 되지만, 선행 단계가 전제되어야만 그 이상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동물적 의식의 특징들을 포함하면서도 동물적 의식 자체와는 구분되는 인간적 의식의 지위는, 상호 매개된 일련의 단계를 추적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한 헤겔 자신의 설명은 당대의 자연과학 이론을 동원하기 때문에 상당수 틀리고 낡은 것이다. 이는 헤겔의 자연철학뿐만이 아니라 당대의 과학 이론과 밀접하게 얽혀있을 수밖에 없는 자연철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B. 동물의 주체성에서 인간의 주체성으로

헤겔에 의하면, 동물의 의식(내지 헤겔이 ‘영혼’이라 부르는 단계)은 자신과 세계를 구분하고 세계를 자신의 표상으로 맞세우지 못한다. 다시 말해, 동물의 의식에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다. 한편 인간의 의식만이 자기를 주체로서 인식하고 나머지 세계를 자기와 구별할 능력을 갖는다. 이 점은 판단이나 추론 능력에 결정적인 차이로 직결된다. 동물은 세계에 대한 믿음(또는 믿음과 유사한 무언가)을 형성하고 그에 따라 행동을 조절할 능력은 있지만, 자신을 반성적으로 세계와 분리하여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으며, 다른 믿음과 연결할 능력(즉 추론 능력)도 없다.

자기의식이란, 의식 내부적으로 주관과 객관을 구분할 능력에 다름 아니다. 구체적으로, 헤겔은 인간과 동물의 의식 사이에 존속하는 세 가지 구별을 제시한다. 첫째, 양자는 세계를 의식하고 사물에 대한 호오를 판별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둘째, 양자는 느끼거나 감각한 바를 질서 속에 정렬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셋째, 양자는 자기 자신을 신체와 구분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서 차이를 보인다.

인간과 동물의 의식의 공통점은 무언가를 감각한다는 점에 있다기보다는2 모종의 자기관계라는 점에 있다. 한편 둘의 차이는 자기관계의 방식에 달려 있는데, 인간의 의식은 세계를 자신과 독립적으로 파악하고 관점에 따라 세계를 달리 보는 능력에 그 특성이 있다. 나아가 인간 의식은 세계와 자기 사이의 구별을 동물적 의식의 단계에서 구현할 능력이 있다. 물론 이는 동물의 의식 자체가 그러한 능력을 지닌다는 뜻은 아니다.

헤겔이 보기에 제한된 동물적 의식과 인간적 의식의 능력을 변별하는 요소는 바로 습관이다. 습관은 동물이 지니는 제한적인 규범성을 인간적 규범성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능력을 갖는다. 이는 습관이 갖는 규칙성이 동물적 행동을 보편적인 행위 양식으로 상승시키기 때문이다.3 습관을 통해 내면은 비로소 내면으로서 자기에게 현시한다.

습관을 가진 의식인 ‘현실적 영혼’(die wirkliche Seele)은 더 이상 영혼이 아닌 자기의식적 행위자이다. 현실적 영혼은 자기와 세계를 구분하며, 자기와 세계 사이의 구별을 이루는 규범을 따르기 때문이다. 자연적 경향성이 아닌 자기 고유의 규범을 따르는 까닭에 의식은 칸트적 의미에서 자유롭다. 한편 이 의식은 칸트에서처럼 세계 밖에서 자유의 근거를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자연으로 말미암아 자유롭다.

동물적 의식에서 인간적 의식으로의 이행에 대한 헤겔의 설명이 일원론적이라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헤겔은 동물과 인간이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층위를 도입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관계가 어떻게 인간에서 반성적인 형태로 성립하는지를 설명함으로써 이 이행을 설명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입장은 주관적 관념론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주의자에 훨씬 가깝다. 실제로 헤겔 자신은 주관적 관념론의 이원론을 “기적에 대한 믿음”이라고 비판했으며,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극복한 유물론의 성취를 높이 평가했다.

C. 동물의 생과 의지

우리는 의지가 사유와 별개의 층위에서 작동하는 추가적인 기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통념적으로, 의지는 판단 능력에 더하여 판단을 행위로 옮기기 위해 요구되는 특별한 능력이다. 이러한 입장은 자연법칙과 별개로 자유의지가 갖는 특별한 종류의 인과성을 상정하려는 아우구스티누스식 주의주의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헤겔은 이러한 입장이 사유와 실천, 의도와 행위 사이에 이원론적 간극을 설정하기 때문에 거부한다. 대신 그는 의지가 사유를 현실로 ‘번역’하는 특별한 종류의 사유이며, 사유는 의지를 통해 실현됨으로써만 비로소 현존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실천의 내면과 외면, 구체적으로 의도와 행위가 실천을 이루는 불가분한 두 계기라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원론을 벗어나고자 한다. 이 입장에 따르면, 의도는 실현 중에 있는 행위이며 행위는 실현된 의도이다. 헤겔의 ‘번역’ 모델에 따르면 행위와 의도는 상호 번역 관계에 있는데, 의도는 행위를 통해 현실 속에서 번역되고, 우리는 드러난 행위를 다시 번역함으로써 그 의도를 이해한다.

그리고 자연적 욕구 및 정념과 독립적인 차원에서 의지를 설명하려는 입장과 달리, 헤겔은 사유된 바를 실현하려는 욕망으로 의지를 이해한다. 이성적 의지는 동물과 형이상학적으로 독립된 인과적 힘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 이유를 이유로서, 목적을 목적으로서 인식하는 욕구이다. 그리고 이성적 의지는 사회적 공간 속에 위치함으로써 “이것이 아니라 저것을” 욕망하는 의지, 즉 스스로 제한을 두는 의지가 된다.


1 이 점에서 동물적 삶은 헤겔에 의하면 관념론으로 진입하는 첫 번째 단계이다. 이때 관념론이란 모든 사물이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식의 주장과 다르다.
2 오히려 헤겔은 “느낌”(Gefühl)과 “감각”(Empfindung)을 구분한다.
3 한편 헤겔은 이러한 규칙이 완전히 규칙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인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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