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junctive Mood - 약간의 정리

얼마전 질문 게시판에 올린 Subjunctive Mood라는 글에 열정적으로 답변해주신 @wildbunny 님과 @Mandala 님, 그리고 Mandala님과 함께 타이포 상의 오류를 지적해주신 @YOUN 님 모두 감사드립니다. 논의를 이어가던 도중 어딘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건 아닌가 하여 참고문헌으로 올려두었던 Kai Wehmeier의 "Modality, Mood, and Description"이라는 논문을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뒷부분에 기술적인 내용이 심화되기 전까지 일단 읽고 정리를 해보았는데, 역시나 제 의문 자체가 문제의 핵심에서는 약간 벗어난 내용이더라구요. 물론 영어 접속법 문장을 한국어 문장으로 온전히 옮길 수 있는가, 혹은 두 언어의 의미론이 근본적으로 같은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답이 있진 않습니다.
흥미로운 논쟁을 해주신 분들을 위해 제가 정리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1. 크립키의 양상 논증과 베마이어의 비판

가. 양상 논증과 그 비판

(1) Aristotle would not have taught Alexander.
(2) The teacher of Alexander would not have taught Alexander.

크립키의 양상 논증은 (1)과 (2)의 진릿값이 다르다는, 혹은 적어도 두 문장의 진릿값이 달라질 수 있는 (2)의 독해가 있다는 것에 의존한다. 즉, 만일 ‘Aristotle’과 ‘the teacher of Alexander’가 동의어라면 두 표현은 인용 맥락을 제외한 모든 맥락에서 진릿값의 변화 없이 상호 대체가능해야 하는데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렇지 않다.

베마이어는 크립키가 ‘the teacher of Alexander’를 애매하게 쓰고 있다고 지적한다.
만일 ‘the teacher of Alexander’가 ‘the man who taught Alexander’를 의미한다면

(2a) The man who taught Alexander would not have taught Alexander.

는 참이기 때문에 양상 논증의 결론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 반면, 만일 ‘the teacher of Alexander’가 ‘the man who would have taught Alexander’를 의미한다면

(2b) The man who would have taught Alexander would not have taught Alexander.

는 거짓이므로 논증은 건전하지만 이것이 ‘Aristotle’과 동의어라고 할 수 없을 뿐더러, ‘the man who would have taught Alexander’는 지시어가 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 표현의 지시체가 무엇인지 정해지기 위해서는 ‘would have taught’를 평가할 맥락이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와 같은 지표사를 생각해보라.)

크립키의 논증은 ‘the teacher of Alexander’가 위와 같은 두 가지 의미로 애매하게 쓰였기 때문에 ‘Aristotle’에 대한 적절한 대체 지시어이면서 동시에 (2)가 거짓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크립키의 논증을 방어하려면 이 직설법-접속법 차이를 설명해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나. 크립키 입장에서의 반박

크립키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반박 중 하나는 (2a)가 여전히 거짓 혹은 해당 문장을 거짓일 수 있는 독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반박의 중추는 “어떤 술어가 indicative mood인지 subjunctive mood인지의 차이는 술어가 양상 연산자의 범위(scope) 안에 속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구분된다”라는 주장이다. 표준 일차양상논리에서 (1)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Tx : x taught Alexander, a: Aristotle)

(1') ◇~Ta

반면 직설법 문장 “Aristotle taught Alexander”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3) Ta

즉, ‘taught’와 ‘would have taught’의 차이는 ‘taught’를 표현하는 술어 ‘T’가 양상 연산자의 범위 안에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문제가 되는 문장인 (2a)를 살펴보자.

(2a) The man who taught Alexander would not have taught Alexander.

이 문장에서 주어인 ‘the man who taught Alexander’는 직설법으로 쓰인 술어를 포함하는 특정기술구이다. 즉, ‘the man who taught Alexander’는 ‘there is a man who taught Alexander’와 ‘there is at most one man who taught Alexander’의 연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자가 ‘would not have taught Alexander’의 주어가 된다. 그렇다면 (2a)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2a') ∃x(Tx & (y)(Ty → y=x) & ◇~Tx)
*동치 : ∃!xTx & ∃x(Tx & ◇~Tx)
: [(⍳x)(Tx)]◇~T(⍳x)(Tx)

그런데 (2a)는 (1)에서 ‘Aristotle’을 ‘the man who taught Alexander’라는 특정기술구로 대체하여 얻는 문장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1') ◇~Ta

에서 ‘a’를 특정기술구 ‘(⍳x)(Tx)’로 대체하면 (2a')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1')에서는 이름이 양상 연산자 안에 등장하는데 (2a')에서는 특정기술구가 양상 연산자 밖에서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립키는 특정기술구가 양상 연산자를 포함하는 넓은 범위로 주어질 때 양상 논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즉, (2a)에서 특정기술구가 넓게 해석되면 양상 논증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핵심은 (2a)가 거짓이 되는 다른 독법이 존재하느냐이다. 즉, 특정기술구가 양상 연산자를 포함하지 않는 좁은 범위로 주어질 경우가 이제 문제된다.

(2a'') ◇[(⍳x)(Tx)]~T(⍳x)(Tx)
*동치 : ◇[∃!xTx & ∃x(Tx & ~Tx)]

(2a'')는 명백히 거짓이다. ‘∃x(Tx & ~Tx)’가 필연적으로 거짓이고, 따라서 양상 연산자 안의 문장이 참이 될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즉, (2a)는 처음 크립키가 주장했던 것처럼 거짓인 독법이 존재한다.
따라서 직설법과 접속법의 차이를 양상 연산자의 범위 차이로 이해하면 크립키의 논증은 여전히 성립한다.

다. 베마이어의 비판

조금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2a'')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양상 연산자 내부의 술어는 접속법으로 해석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2a'')를 자연 언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2a''-N) There is a man who would have taught Alexander and would not have taught Alexander and exactly one man who would have taught Alexander.

이것이 (2a)와 같은 의미인가?

베마이어의 전략은 앞 절에서 소개한 크립키식(Kripkean) 방어 논변을 직접 깨부수는 것이 아니다. 크립키식 방어 논변은 표준 일차양상논리학이 우리의 양상 언어를 표현하는 적합한 체계라는 것을 전제(presuppose)하고 있다. 이 전제를 깸으로써 크립키식 방어를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 그 전략이다.

premise를 깨는 것과 presupposition을 깨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상대방의 논증이 가지는 premise를 깨는 것은 곧 논증이 건전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인 반면, presupposition을 깨는 것은 그 논증 자체가 갖는 힘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표준 일차양상논리학은 양상 언어를 표현하는 적합한 체계가 아닌가? 다음을 보자.

(4) Everyone who has flown to the moon would have not flown to the moon.

이 문장이 표현하는 바는 현실 세계에서 달에 갔던 모든 사람들이 달에 가지 않은 가능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표준 이론에 따라 번역을 해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Fx : x has flown to the moon)

(4') ∀x(Fx → ◇~Fx)

이는 (4)와 같은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4')가 표현하는 바는 현실 세계에서 달에 갔던 사람들 각각에게 그가 달에 가지 않은 가능세계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4)를 올바르게 표현하려면 양상 연산자의 범위 안에 보편 양화사가 포함된 꼴이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놀랍게도 (4)와 같은 문장의 진리조건을 표현하는 양상 문장은 표준 이론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표준 이론에서 (4)와 같은 문장은 표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Harold Hodes에 의해 증명된 바 있고 Wehmeier 역시 같은 내용을 짧게 새로 증명한 게 있다. 이 증명에 대한 이해는 아직 못했다)

형식적인 증명은 제쳐놓고 양화사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고 대략 짐작만 해보자. (2''-N)을 보면 표준 이론을 전제하고 접속법을 범위로 구분하는 설명 하에서는 양화사 내부에 있는 모든 술어가 접속법으로 쓰이게 된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4)를 표현하려면 양상 연산자의 범위가 보편 양화사를 포함해야 하는데, 그 말인즉슨 직설법으로 쓰인 술어(‘Everyone who has flown to the moon’)가 양상 연산자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마이어는 접속법이 단지 어떤 술어가 양상 연산자의 범위 안에 있다는 것만을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라 술어가 양상적으로 구속(modally bound)되어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제안하는 Subjunctive Modal Logic의 모티브인 것 같다.)
다시 말해, 직설법과 접속법을 연산자의 범위로 구분하려는 설명 방식은 잘못 되었고, 형식적 증명에 의해 (4)를 표준 이론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한, 크립키식 방어는 성공적이지 못하다.

  1. 문제의 해소

필자의 최초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K)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를 가르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2a-K) 알렉산더를 가르쳤던 바로 그 사람은 알렉산더를 가르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2b-K) 알렉산더를 가르칠 수 있었던 바로 그 사람은 알렉산더를 가르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여기서 (2b-K)가 왜 모순인가 하는 것이 최초의 물음이었는데, 이는 보다시피 논점과 그다지 관계가 없다. 오히려 진릿값이 없는 문장이라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맥락이 없기 때문)
또한 원 질문글에서 'would have'와 관련된 기타 여러 가지 추측들 역시 본 논문의 내용을 미루어 보면 가능성을 기술하는 것 이외에 다른 요소는 의미와는 무관한 요소인 것으로 보인다. 생각건대 'would have'와 'could have', 'might have' 등이 갖는 차이는 화자의 태도를 나타내는 화용론적 요소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필자가 수업 때 제기했던 '한국어에는 접속법이 없는데 이 의미론은 접속법이 있는 언어에나 의미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 역시 흥미롭게 들렸을 수는 있지만 전체 논지에는 큰 지장이 없는 것으로 일단 보인다. 지금까지 읽은 바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문법적 카테고리인 접속법이 아니라 표준 양상논리학이 표현할 수 없는 가능성 문장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이기 때문이다. 물론 개선된 체계에 'subjunctive'라는 표현을 붙이는 건 여전히 마음에 안 들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정리하면서 짜릿함을 느끼게 해준 논문이네요! 종종 논문 읽으면서 짜릿함을 느끼긴 하지만 이번 논문은 좀 색다른 박력이 느껴지는 논문이었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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