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in, Ilya (2022), "The Promise and Peril of Epistocracy", Inquiry 65 (1): 27-34

1장

브레넌(Jason Brennan)은 대부분의 시민이 정치적 문제에 대해 매우 서툴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는 유권자를 '호빗', '훌리건', '벌컨'의 세 범주로 구분한다.

호빗은 정치에 거의 관심 없고 정치 지식 수준도 매우 낮다. 훌리건은 호빗보다 많이 알지만 편향적으로 정보를 평가하고 반대 의견을 곧장 기각하며 사회과학적으로 정교하지 (sophistication) 않다. 벌컨은 광범위한 지식과 분석적 정교함을 개방적 사고와 결부시켜 감정과 편견으로 흐려진 판단을 내리지 않는 이상적 인물이다.

대다수의 유권자는 호빗 또는 훌리건으로서 진리 탐구자 대신 정치적 팬, 팀의 응원단 역할을 한다. 이 문제는 합리적 무지에서 기인한다. 개별 투표가 결과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거의 없으므로 유권자가 유관한 지식을 얻거나 편견을 제어할 동기를 거의 갖지 않는다. 이때 지식을 습득하는 사람들은 거의 재미 (오락), 기존 관점에 대한 확인, 자신이 선호하는 팀에 대한 지원 등을 이유로 하여 지식을 얻는다.

이는 많은 경우 진리 탐구의 목표와 충돌한다. 정치적 팬덤은 자신의 선입견을 지지하는 정보를 과대평가하고, 반대되는 정보를 경시 또는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 Bryan Caplan: "합리적 비합리성"

정보 습득이 진리 탐구를 주된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편향적 정보 평가는 실제로 합리적일 수 있다.

가장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조차도 같은 정당과 이념의 지지자들과만 논의하는 편이다. 유권자의 무지와 편향은 그들을 기회주의적 정치인, 이념 지향가, 이해집단의 먹잇감으로 만든다. e. g. 2016년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이민 및 무역 캠페인 주제

Christopher Achen, Larry Bartels: "대중 주권의 이상은 현대 민주주의 이념에서 왕정 시대 신권 통치와 같은 역할을 한다."
vs.
Brennan: "대부분의 상황에서 사람들이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 유능함을 갖추지 않는 한, 타인을 위한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해서는 안 된다 (Competence Principle: 유능성 원칙)."

브레넌의 주장은 벌컨만이 통치권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호빗과 훌리건이 그런 권리를 결여한다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처럼 브레넌은 투표가 "타인에 대한 권력 행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권력은 반드시 책임감 있게 사용되어야 한다.

2장

브레넌은 민주주의가 독재나 과두정보다 일반적으로 더 잘 작동한다는 증거들을 인정하지만, 민주주의 대신 에피스토크라시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유권자 질을 개선하면서 대규모이고 인구통계학적 대표성이 유지되는 방안들 e. g. 기본 정치 지식 시험 통과자에게로 선거권 제한; 고득점자에게 금전적 보상 제공; 추가 투표권 제공 (밀의 제안에서 추동됨); 선거권 추첨; etc.

급진적으로 보이는 위 생각은 약간의 확장에 불과하다. 우리는 인구 20% 이상을 유사한 이유로 투표에서 제외한다 - 어린이, 시민권 없는 이민자, 주에 따라 범죄자와 일부 정신질환자 등.

그러나 브레넌의 문제 제기는 적절하지만, 대안은 크게 적절하지 않다.

  • 현실의 정부가 얼마나 공정하게 에피스토크라시를 실현할 것인가?
  • 정치 지식을 최소한으로 가진 유권자가, 여러 기준을 가진 참정의 여러 규범적 이론에서 파생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의 기준 가운데서 잘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 유권자가 선택할 기준과 선지를 결정하는 일은 편향과 조작에 면역일 것인가?

무지를 걸러낼 수는 있을지라도 편향을 걸러낼 수는 없을 것이다. 브레넌이 제안한 에피스토크라시의 메커니즘 중 무엇도 그렇게 할 수 없어 보인다.

그나마 시뮬레이션 예언자를 통한 통치는 일부 문제에서 면역일 수 있다. 시뮬레이션 예언자를 통한 통치는 모든 유권자가 최소한의 지식 수준에 도달했다고 가정한 경우의 투표 결과로 일을 결정한다. 실제로 이미 유권자 견해를 설문하고 정치 지식 수준, 소득, 연령, 인종, 성별, 당파성 등 표준 정치 관련 변수 영향을 통제하는 연구들이 수행되고 있다. 따라서 지식이 견해에 미치는 영향을 고립시키고, 모든 유권자가 일정 지식 수준에 도달한 경우의 의견 분포는 추정 가능하다.

그러나 정치 지식 시험의 설계, 시험 항목, 항목 비중과 "충분히 정보에 입각한" 상태의 결정이 필요하며, 이는 악용될 수 있다. 게다가 더 유능한 유권자 집단조차 현대 국가의 복잡다단한 활동 중 극소수의 부분만 효과적으로 감시 가능한 지식을 가질 수도 있다. 에피스토크라시를 실현할 지식은 벌컨을 포함한 세상 누구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가장 유망한 해결책은 정부 권력의 제한과 분권이다. 거주지 선택 (연방 체계)이나 "발을 통한 선거(foot voting)" (민간 부문)는 더 많은 동기 속에서 정보를 잘 얻어 덜 편향되게 정보를 평가하게 한다. 이는 조작 가능성도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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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브레넌의 주장이 왜 제기됐는지 이해되질 않네요. 애초에 많은 민주주의 정치철학, 정치학, 나아가 교육철학 연구자들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호빗'과 '훌리건'으로 분류되는 자들의 인식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니까, 민주주의의 대안을 제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수준을 높일 좋은 방안을 제시하는 게 더 나아보여요. 그래서 somin이라는 저자의 결론이 더 그럴듯해 보이네요.

이 서술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되질 않네요.

이것이 좋은 반박인지 모르겠어요. 브레넌이 "나는 벌컨들이 편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편향에서 '호빗'과 '훌리건'보다 더 잘 벗어날 경향성을 가진다"라고 말한다면, 브레넌 자신의 주장은 유지하면서도 반박은 피해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대단히 상식적인 주장처럼 보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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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2번을 제가 이해한 방식은

  • 정치 참여에는 여러 기준이 있다.
  • 그러한 정치 참여는 여러 규범적 기준을 갖는다.
  • 이 여러 규범적 이론에서 정치적 역량의 기준이 파생된다.
  • 정치 지식을 최소한으로 가진 유권자가 정치적 역량의 기준들 가운데서 (필요한 것/자기 생각에 맞는 것을) 잘 선택할 수 있을까?

였습니다.

1번 말씀을 듣고 보니, 인식적 수준을 높이는 것이 가능하다면 무지의 문제에서는 에피스토크라시의 도입 없이도 자유로워질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인식적 수준을 높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게 된다면 cost가 상당해진다는 점에서도, 그러한 접근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는 에피스토크라시가 무지의 문제 이상으로 도입될 동기를 찾을 필요가 있겠네요.

3번에서 소민의 지적을 제가 이해하기로는:

  • 에피스토크라시의 어떤 형태들은 정치 시험을 요한다.
  • 그런데 정치 시험은 누군가가 고안하고 출제해야 한다.
  • 이것이 편향과 조작의 문제에서 자유로운가?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의 결정을 벌컨이 한다면, sophisten 님 말씀처럼 브레넌이 주장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제가 Against Democracy를 전부 읽었다고 보기도 어렵고 앞부분도 읽은 지 꽤 되었다는 전제가 있기는 하지만, 벌컨이 (거의) 없다고 언급했던 듯합니다.

또, 누가 전문가인지에 대해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견지한다면, 누가 벌컨인지 승인하는 데도 문제가 발생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지점은 sophisten 님이 지적하신 부분에서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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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전제가 "모든 시민권자의 이해관계가 동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원칙을 따르는 정체를 만드는 것이겠죠. 그런데 자신의 이해관계는 자신이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1인칭 특권" 그리고 벌컨 유권자들이 다른 유권자들의 이해관계를 자신들과 동등하게 반영할 동기가 뚜렷하지 않은거죠. 결국 투표에서 배재된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과연 반영되겠느냐는 질문이 나올 법하겠죠.

러프한 저의 이해입니다만, '투표에서 배제될 정도로 정치 지식이 뚜렷하지 않다면 자신에게 걸린 이해관계가 어떠하고 얼마나 높이 걸려있는지 충분히 인지할 수 없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있어 보입니다. (브레넌에게, 그리고 아마 저에게도)

또한 말씀하신 첫 문장을 생각해볼 때, 자비롭지 못할 수도 있지만, 브레넌의 에피스토크라시가 그런 동기를 가진 것으로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소민에 대한 말씀이시라면 이 부분은 저의 오해입니다. (지금 보니 소민에 대한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벌컨 유권자들은 정치적인 견해에 편향되지 않는다는 것이 브레넌의 전제였지만, 말씀하신 "이해관계의 동등한 반영", 즉 실천의 측면에서 벌컨이 마찬가지로 편향되지 않는다고 한 적은 없으며, 따라서 그 부분은 합당한 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