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인식적 겸손'에 대한 생각들 - Rae Langton의 『Kantian Humility』

랭턴은 저서 Kantian Humility (1998)에서 칸트가 일종의 '인식적 겸손'(epistemic humility)을 주장했다고 말하는데, 책을 읽을수록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네요. 최근에 완독했으니 기억나는 대로 몇 자 적어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인식적 겸손이란 '우리는 사물들 자체의 내적인 것에 대해서 알 수 없다'라는 테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때 그녀는 그것의 영어번역상 "intrinsic nature of things in themselves"라는 구절에 주목하며 논증을 시작합니다.

그녀는 우선 조나단 버넷(J. Bennett)의 이른바 '현상주의' 독법—즉, 현상을 순전히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독법—에 반대해서, 칸트의 현상을 실체의 relational properties로, 사물 그 자체를 실체의 intrinsic properties로 읽는데, 이때 전자는 후자를 수반하지 않고 따라서 우리는 사물 자체를 알 수 없다는 주장이에요. 그런데 그녀는 이를 (칸트가 말하길 "현상을 사물 자체로 간주했다"는)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과의 비교 속에서 고찰합니다. 즉, 라이프니츠의 경우 사물들의 intrinsic properties는 relational properties에서 수반된다고 말하고, 이를 '관계들의 환원가능성'으로 본 데 반해, 칸트는 철저히 그것을 환원불가능하다고(irreducibility) 말한다는 것이에요.

결국 그녀는 (사물 자체와 현상의) 구별(Distinction), 수용성(Receptivity), 그리고 관계들의 환원불가능성(Irreducibility)으로부터 겸손함(Humility)이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위해 그녀는 칸트와 라이프니츠, 칸트와 로크 등도 참조하며, 스트로슨이 칸트가 인식적 겸손을 논증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것에 반박하고자 합니다.

또한 그녀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이해하기 위해 「형이상학적 제1원리에 대한 새로운 해명」같은 전(前) 비판기 논고들도 참조합니다. 가령 칸트의 제1유추의 실체 규정을 '현상적 실체'로 규정하거나, 관계들의 환원불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 공존(coexistence) 또는 계기(succession)의 원리를 그런 물리학적 저술들을 통해 설명해요. 물리적 힘(force)의 인과적 작용으로 생기는 사물들의 공존 관계를 근거로, 게다가 그런 관계 자체는 '신에 의해' 주어진다는 전 비판기의 언급의 아이디어 자체가 비판기에도 존재한다고 봐요. 이 점들이 저에게는 굉장히 의문스러웠어요. 과연 칸트의 전 비판기 저술을 어디까지 비판기에 유효한 것으로 인정해야만 하는가 하는 점에서요.

또한 랭턴은 마지막 장에서 칸트를 실재론자 쪽으로 기울어서 해석하려고 합니다. 물론 그녀가 칸트의 관념론적 측면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그녀 역시 Guyer나 Strawson처럼 그런 측면들을 떼어내려고 하는 듯이 읽혔어요. 이런 점에서는 결론이 굉장히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칸트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얻을 수 있어 좋았네요. 앞으로 이와 비슷한 야심찬 칸트 연구서들을 국내에서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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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의 내용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라이프니츠의 표준적인 입장은 "relational properties가 intrinsic properties로 환원된다"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닌데요, 아래에서

라이프니츠의 경우 사물들의 intrinsic properties는 relational properties에서 수반된다고 말하고, 이를 '관계들의 환원가능성'으로 본 데 반해, 칸트는 철저히 그것을 환원불가능하다고(irreducibility) 말한다는 것이에요.

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반대로, 라이프니츠의 환원가능성 논제는 relational properties 가 intrinsic properties에로 수반/환원된다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지 조심스럽게 말씀드려 봅니다. Rae Langton 책의 85페이지를 보시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It may be that Leibniz holds that all relational properties and relations are reducible in this way : that all are reducible to the intrinsic properties of their relata taken together -- in other words, that they are what I shall call bilaterally reducible.

나아가 칸트에 있어서 "사물 자체에 대한 humility"가 성립한다고 논증하는 것이 가능해지려면, 제가 제시한 Rae 텍스트의 라이프니츠에 대한 구절과 달리 "우리가 오직 relational properties만 인식할 수 있는데, 그것이 intrinsic properties로 환원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129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도 있습니다.

...since those relational properties supervene on the intrinsic properties of monads...

제가 이 책을 다 읽어본 것이 아니라서 저의 지적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라이프니츠의 주장에 대한 부분은 한번 확인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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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표현을 잘못 쓴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가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바와 동일해요. 혼란을 드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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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괜찮습니다. 덕분에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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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면, 사실 저는 랭턴의 이 구별에 대해 약간 회의적이에요. 그녀가 humility thesis에서 물자체의 존재 주장과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성분 주장을 구별하고 전자에 의해 이것이 정당화된다고 한 것은 훌륭하지만, 또한 칸트가 여러 부분에서 라이프니츠를 참조한 것은 맞지만, 과연 사물 자체를 '실체의 내재적 속성들'로 동일시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칸트가 라이프니츠를 비판하는 것은 라이프니츠의 체계에 대한 반박을 하려는 것이지, 라이프니츠의 속성 구별을 받아들인 뒤에 그와 반대되는 논증을 주장하는 것은 아닌 것 같거든요. 특히 저는 랭턴이 칸트를 '과학적 실재론자'로 해석하는게 꽤나 부당하게 느껴져요. 그녀는 칸트가 자신의 철학이 관념론이 아니라고(quite opposite) 주장하는 대목에서 그것을 지지하지만, 제가 보기에 칸트는 관념론 자체의 부정이 아니라, '변증학부분에 나오는' (질료적) 관념론을 주장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지 여전히 형식적/비판적 관념론은 타당하다고 봐요. 특히 저는 그녀가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칸트의 전비판기 저술을 가져오는 것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데, 이는 제가 공부가 부족해서인지 크게 반박할 근거는 아직 찾지 못했네요. 다만 칸트가 '주관성으로의 전환'을 하게 된 시기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더 아쉬운 점은 그녀가 Opus Postumum(『유작』)에 대해 (출판시기상의 한계로) 언급을 일절 안한다는 점이에요. 유작에서는 초월적 조건의 '질료적인' 측면을 형이상학에서 물리학으로의 이행에서 찾는데, 거기 나오는 에테르라던지 그런 점에서 보면 더 주장이 단단해질 수 있지 않았나 싶네요. 물론 유작의 자연철학과 전비판기의 자연철학은 조금씩 크고 작게 다르지만, 만일 유작에서의 정당화가 더 이루어졌다면 제가 보기에는 전비판기와의 연속성 주장도 확보되리라 생각해요.
가령 이 책에서 인력과 척력의 개념을 통해 물리적 힘으로 인식가능성(ch.9)을 논증한 것은 '초월적'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학적실재론자 같지만, 제가 보기에 『유작』에서 에테르의 초월적 침투불가능성 같은 개념을 사용했으면 더 나은 논증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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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칸트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긴 합니다만, 선생님의 주장에 깊이 공감합니다.

칸트가 라이프니츠를 비판하는 것은 라이프니츠의 체계에 대한 반박을 하려는 것이지, 라이프니츠의 속성 구별을 받아들인 뒤에 그와 반대되는 논증을 주장하는 것은 아닌 것 같거든요.

말씀하신 것처럼 칸트가 라이프니츠를 비판하는 이유는 "relational properties가 intrinsic properties로 환원될 수 없다"는 칸트의 형이상학적 논제 때문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칸트가 라이프니츠의 관계론적 논제를 비판하려는 것이 정말 핵심이라면, 시공간을 관계가 아닌 일종의 실체적인 것으로 보는 뉴턴의 절대론적 관점은 칸트가 비판하지 않아야 하겠죠. 하지만 칸트는 뉴턴도 비판합니다. 라이프니츠와 뉴턴 모두 시공간을 인식 주체의 수용적 형식이 아닌, 대상에 귀속시키는 입장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칸트가 라이프니츠를 비판하는 것의 핵심은 시공간적 관계가 인식 주체의 수용적 구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초월적 관념성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정합적일 것 같습니다. 칸트에 있어서 인식 주체를 제거하면 이러한 관계들 자체가 사라져 버리게 되죠. 그런데 랭턴은 "relational properties vs intrinsic properties"라는 구도를 너무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칸트의 겸손함을 이야기하려 한다면 물자체에 대한 무지를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르겠어요. 과연 이런 속성들과 환원불가능성까지 다루어야만 했는지에 대해 논리적이고 합당한 또다른 이유가 제시되지 않는다면, 이는 형이상학적으로 과도하거나 불필요한 논의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오늘 덕분에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저도 칸트에 대한 새로운 연구서들이 국내에 번역되어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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