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Rorty,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 2장 中

자아의 우연성(71-108)

“세계와 과거를 재서술하려는 어떠한 프로젝트도, 또 각자의 특이한 메타포를 부과함으로써 자아창조를 하려는 어떠한 프로젝트도 주변적이며 기생적”이다. … “메타포들은 낡은 낱말들을 낯선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용법은 이미 친숙한 방식으로 사용 중인 다른 낡은 낱말들을 배경으로 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전적으로 메타포’인 용어는 아무런 쓰임새가 없는 언어일 것이며, 따라서 언어가 아니라 단지 웅얼거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언어란 표상이나 표현의 매개물이 아니라고 우리가 동의한다고 해도, 언어는 의사소통의 매개물, 사회적 교섭의 도구, 한 사람을 다른 인간 존재와 묶어주는 방식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104).”

이는 니체가 진리를 탈 신격화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니체 자신의 시도에도 교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관조의 삶에 대해 플라톤이 그렇게 생각했듯이 자아창조의 삶이 완성될 수 있으며 자율적일 수 있다는 니체의 제안”은 그저 “전도된 플라톤주의”일 뿐이다(108). “전적으로 니체적인 삶, 반작용하는 삶이 아니라 순전히 작용으로만 이루어진 삶은 있을 수가 없다(106).” 오히려 니체는 “각 개인의 삶이 언제나 미완성이지만 때때로 영웅적이며 다시 짜여가는 그러한 그물망이라는 생각”을 내세워야 한다(108).


내 생각엔 니체는 이미 로티가 제안하는 식의 생각을 내세운다. 내세우지 않는 것은 니체가 아니라 ‘네하마스의 니체’, 그리고 그것을 읽은 ‘로티의 니체’일 뿐이다.

反 네하마스 니체 독법은 다음을 참고. 김도윤, 「니체 철학의 사회철학적 재구성 흐름에 대한 비판적 점검: 공동체주의와 대안적 독법을 중심으로」, 『사회와 철학』, 제45집,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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