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루만, 「구성으로서의 인식」 정리

Luhmann, Niklas (2006). “Cognition as Construction.” Trans. Hans-Georg Moeller. In: Luhmann Explained: From Souls to Systems. Hans-Georg Moeller. La Salle, Illinois: Open Court.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은 사실 철학자라기보다는 사회학자로 분류되는 인물이고, 사회학이론/사회이론에서 다루어집니다. 하지만 체계이론은 사회학을 넘어 생물학, 심리학 등 학제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패러다임이고, 철학의 주제들과도 무관하지 않은 여러 가지 재밌는 아이디어들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어서 서강올빼미에 한번 공유해봅니다. 이하의 글은 그 중에서도 인식론에 해당하는 주제와 관련한 체계이론의 입장을 요약적 개괄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글입니다.

I. 급진적 구성주의(radikaler Konstruktivismus)는 체계이론을 옹호하는 루만(N. Luhmann), 마투라나(U. Maturana), 바렐라(F. Varela), 폰 푀르스터(v. Foerster) 등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대두된 입장이다. 이들은 인식론적으로, 체계에서 일어나는 인식이 체계 자체에 의한 구성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 대해서는 곧바로 다음의 의문이 제기된다. 인식은 구성일 수 없다. 적어도 오로지 구성일 수는 없다. 인식은 어떻게든 외부 실재와의 연관 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동기에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식이 초월적 주관에 의해 구성되는 측면을 조명하는 동시에 실재론적 직관을 옹호한다. 특히 칸트는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개연적 관념론’을 반박하고 인식이 외부 실재에 의존한다는 논증을 펼친다.

이 실재론적 직관은, 인식이 외부 대상에 대해 일어나는 활동이 아니면 유아론과 같은 비상식적인 귀결에 이를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옹호된다. 한편 급진적 구성주의는 이러한 직관을 거부하고 인식자가 외부 실재에 접근할 수 없더라도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급진적 구성주의는 인식자가 외부 실재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급진적 구성주의에 의하면, 체계는 환경에 대해 닫혀 있는 재귀적 연결망이기 때문에, 따라서 환경이 체계에 간섭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식은 비로소 가능하다. 이는 의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체계이론적 구성주의의 급진성은 이 ‘~더라도’에서 ‘~때문에’로의 이행에 있다.

구성주의의 물음은 체계와 환경의 이 단절이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종래의 인식론은 주체와 대상의 구별에서부터 출발한다. 인식론적 주체 이론은 여러 주체에 공통된 단일한 세계를 가정하고, 의식의 구조를 탐구함으로써 의식 일반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아내고자 한다. 그런데 이런 접근법에서는 항상 주체와 대상 사이의 단절이 극복되지 못한 문제로 남으며, 이 단절은 인식의 가능 조건으로서는 주목되지 못한다. 대신에 구성주의는 주체와 대상의 구별을 체계와 환경의 구별로 대체한다. 급진적 구성주의는 체계/환경 구별 속에서 인식론의 문제를 이차 등급 사이버네틱스를 통해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II. “어떻게 체계는 환경 내에서 인식을 생산할 수 있는가?”는 “어떻게 체계는 환경과 단절할 수 있는가?”의 질문으로 재구성된다. 체계는 환경과 단절함으로써만 비로소 체계로서 (인식을 포함하여)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환경과의 단절은 체계에게 무제한의 자율성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를 체계로 구별함으로써 그것은 체계로서 자기에게 제약을 가한다.

체계와 환경의 단절은 재귀적 연결망 내부에서 자기를 재생산하는 활동을 통해, 즉 ‘자기생산’(Autopoiesis)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 자기생산적 작동이 비로소 체계를 환경과 구별 지운다. 한편 자기생산이라는 특성은 단절을 통해 체계를 형성하는 동시에, 인식을 포함한 체계의 모든 작동이 체계 내부에서만 가능하도록 만든다.

한편 체계 내의 여러 가지 작동 중에서도 인식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루만은 인식이 관찰 또는 기술(=관찰의 기록)을 포함한다고 규정한다. 이는 관찰의 관찰, 기술의 기술 또한 포함한다. 이때 관찰과 기술은 다른 작동과 마찬가지로 자기생산적 활동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찰하는 체계를 환경과 구별하지 못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만에 의하면, 관찰은 구별과 지칭에 의해 일어난다. 구별은 삼각형/비(非)삼각형, 생물/무생물, 파충류/비파충류 등 공간을 둘 이상으로 분할하는 차이를 뜻한다. 지칭은 구별을 통해 출현한 여러 가지 면들 중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상기의 개념적 틀 속에서 구성주의적 입장은 다음처럼 정식화된다. 구별은 환경이 아닌 체계에만 속한다. 그리고 인식되는 모든 것은 체계의 구별에 의존한다. 따라서 모든 인식 대상은 체계에 의한 구성물이다. 삼각형/비삼각형, 생물/무생물 등의 다양한 구별들은 환경 자체에 실존하는 구별이 아니며, 이 구별들은 인식 체계에 의해 채택되고 차용된다. 따라서 인식 체계가 하나의 삼각형을 인식한다고 할 때, 그 삼각형은 삼각형/비삼각형의 구별을 사용하는 체계 자신에 의해 비로소 ‘삼각형’으로서 구성된 것이다. 마치 환경 속에 삼각형이 먼저 존재한 후 체계가 이를 인식하는 듯한 착각이 생길 수도 있지만, 환경에 구별을 도입한 다음 특정한 부분을 구획 지워 삼각형으로서 바라보는 것은 온전히 환경이 아닌 체계의 작업이다. 이런 의미에서 “관찰될 수 있는 모든 것은 관찰자 자신의 성취이다”(Luhmann, 2006: 246).

이는 인식 체계만이 존재하고 환경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구성주의는 오히려 그런 류의 주장 자체가 존재/비존재 구별을 사용하는 체계의 인식이라고 말한다. 실재/비실재, 세계/비세계, 심지어는 체계/환경 구별조차도 인식 체계 자신에 의해 사용되고 도입되는 구별이다. “실재”, “세계”, “의미” 등의 개념은 자기의 짝을 이루는 반대 면(비실재, 비세계, 무의미 등)을 포괄하는 특수한 개념들이지만, 이들 또한 체계가 구별을 사용함으로써만 성립하는 까닭에 환경에 대한 체계의 폐쇄성을 전제해야만 한다.

또한, 체계가 사용하는 구별은 인식의 조건이 되는 한편 해당 구별을 사용하는 체계의 맹점으로 작용한다. 구별이 구별 자체에게 동시에 적용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구별을 구별 자체에게 적용하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구별을 상정해야 하며, 그 구별은 다시금 맹목적으로 된다.

III. 구성주의 인식론은 인식을 일종의 체계의 작동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인식은 다른 작동과 마찬가지로, 체계가 해당 작동을 통해 자기생산을 지속하는 한에서만 발생한다. 인식이 참을 생산하는지 거짓을 생산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물리적, 신경생물학적, 의식적, 소통적 체계의 작동들은 참/거짓 구별을 근본적 구별로 삼아 참이나 거짓을 생산하지 않는다. 인식 체계들은 참/거짓 구별과는 무관하게 작동한다. “그럼으로써만 오류가 거짓되게도 참처럼 나타난다는 점, 그리고 오류의 제거가 관건이라는 점을 설명할 수 있”(Luhmann, 2006: 248)으며, 참/거짓 구별이 이들 인식 체계의 작동에 적용되는 일을 설명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참/거짓 구별은 다른 구별과 마찬가지로 관찰자에 의해 채택되는 구별이며, 그런 한에서 맹목적으로 채택된다. 참/거짓 구별은 인식 작동을 관찰하는 관찰자에 의해 채택될 수 있다. 따라서 “A이다”와 “A는 참이다” 사이의 구별은 다음처럼 설명될 수 있다. 전자가 인식 체계의 작동이라면, 후자는 그 작동을 관찰하는 관찰자(이차 등급 관찰자)에 의해 산출된 결과이다.

논리학자들은 여기서 일차 등급 관찰과 이차 등급 관찰 사이에 층위를 나누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층위의 구별(예컨대 대상언어/메타언어 구별)은 또 다시 그 구별이 맹목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역설로 되돌아온다. 구성주의자들은 대신에 인식 체계가 자기 관찰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다시 말해 체계가 자기 자신의 오류를 어떻게 구별하고 교정하는가에 대해 묻는다. 이에 대한 답은 이진 코드화(binäre Codierung)에 있다.

이차 등급 관찰인 인식론의 경우, 인식 체계의 관찰자는 다음의 여러 가지 구별을 차용해야 한다.

  1. 작동과 관찰의 구별

  2. 일차 등급 관찰자의 체계지시(Systemreferenz)와 이차 등급 관찰자의 체계지시 사이의 구별

  3. 타자관찰과 자기관찰의 구별

  4. 관찰되는 관찰자(관찰 대상)가 관찰하는 것과 관찰하지 못하는 것 사이의 구별

  5. 참/거짓 이진 코드 그리고 다른 (타자 및 자기)관찰 형식 사이의 구별

이 다섯 가지 구별을 모두 차용함으로써만 인식의 재생산을 원인이 아니라 비로소 구별의 관점에서 추적할 수 있다. 만일 인식론이 다루는 대상이 생물학적 인식이나 심리학적 인식이라면, 인식론자는 자신을 외부적 관찰자로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학적 인식 개념을 취할 때 인식론은 더 이상 자신을 외부적 관찰자로 간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로지 하나의 사회체계만이 있으며, 인식론자는 그 안에 포박된 채 다른 피(被)포박자들을 관찰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때 인식론은 통일적, 절대적인 지위가 아니라 그에 앞서는 차이에 기반한 지위를 담보할 수 있을 뿐이다.

IV. 구성주의는 역사 속에 출현한 전통적인 인식론들과 비교했을 때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의 논리학 정도를 제외하면, 전통적 인식론은 신학과의 본질적 차이 때문에 구성주의적인 발상들을 포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신학은 이미 구성주의적인 생각들을 선취하고 있다.

루만은 이러한 생각을 개진하기 위해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를 인용하고 있다. 니콜라우스에 의하면, 신은 다른 것이 아닌 것(non-aliud)이다. 모든 대립하는 것들은 구별을 넘어서 신 안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에서 주창한 삼위일체의 교리와 양립 가능해야 했으며, 따라서 신은 하나이자 셋이면서 동시에 만물의 신비로운 본질로 취급되었다. 니콜라우스에 의하면, 인식론은 자신이 관찰하는 사물들을 모두 신 안에서 구별 가능한 대립물들로 상정해야 한다. 이때 인간은 사물의 궁극적인 본질(신적인 것)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신의 지복(beatitudo)에 의해 구별된 사물들에 대응하는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 신에 대한 어떤 인식도 불가능하다는 주장과 신에 대한 어떤 인식도 가능하다는 주장을 모두 피하기 위해 신학은 모종의 이차 등급 관찰 테크닉을 개발해야 했다.

이런 이유에서 급진적 구성주의는 전통 인식론이 아닌 전통 신학의 발상들에 상응한다. 전통 신학과 마찬가지로, 급진적 구성주의는 관찰자의 구별과 관찰 대상(인식론)을 세계 내지 실재(신)과 구분하고 있다.

V. 구별(distinction)과 지칭(indication)은 어떻게 두 개의 구성요소를 지니면서 단일적으로 이루어지는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체계가 이중성을 단일성으로 간주하는 능력을 지닌다는 점이다. 또 작은 차이를 크게 증폭하는 체계의 능력 또한 전제되어야 한다. 이 증폭 능력은 물론 체계의 폐쇄성을 전제하는데, 특히 여기서는 체계 자신만이 갖는 고유시간(Eigenzeit)을 전제해야 한다. 고유시간 속에서의 체계의 증폭 능력은, 기억 능력 즉 포착되는 비일관성들을 개산(開散)하고 증폭하는 한편 각각의 상이한 구조들 속에서 일관성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관념론 반박」에서 칸트는 시간을 이용하여 외부 세계에 관한 옹호 논증을 편다. 이때 칸트는, 인식 작동과 달리 환경 내에는 지속적인 것이 있다는 취지의 논증을 개진한다. 인식 대상이 시간 속에서 지속 및 반복될 수 있기 위해서는 환경에 지속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루만은 그 반대의 시간 관계를 상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식 체계는 지칭된 대상이 바뀌었을 때에도 같은 대상을 지칭할 수 있다. 예컨대 체계는 운동과 같은 가변적인 대상을 지칭하기 위해 ‘운동’과 같은 불변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심리학자 하이더(F. Heider)가 제시한 형식/매체(Form/Medium) 구분을 차용한다면 이 점이 보다 명확해진다. 하이더는 의식이 대상을 지각하는 데에는 세계에 대한 두 가지 접속 방식이 개입한다고 주장했다. 그 접속 방식이란 느슨한 접속과 엄밀한 접속으로, 전자가 매체, 전자가 형식에 해당한다. 예컨대, 의식은 매체인 빛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사물이라는 형식을 대상으로 지각한다. 이 구별은 어렵지 않게 일반화된다. 우리는 돈을 매체로 하여 상품의 가격을 인지하고, 언어를 매체로 하여 문장을 형성한다.

나아가 루만은 다음과 같은 언급을 덧붙인다. 관찰이 일어나고 있을 때에 인식 체계는 형식만을 인식할 뿐 매체에 대해서는 동시에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매체인 빛, 돈, 언어 등등에 대해 인식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아까의 구별에서 매체에 속하던 것들이 인식되기 위해서는 이들이 다시 형식이 되어야 하고, 이는 인식되기 위해 또 다른 매체를 필요로 한다. 다르게 말하면, 인식은 적절한 매체가 제공되는 환경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작동이다. “따라서 인식은 ‘임의의’ 환경에서가 아니라 인식에 적합한 환경에서만 가능하다.”(Luhmann, 2006: 255) 그렇다고 해서 인식이 실재에 ‘적응’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의 연구들은, 체계가 자기 교정을 수행해서 적응을 시도할 때 여러 가지로의 분화가 일어난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의 물음은 어떻게 인식이 실재에 점진적으로 적응해나가는가가 아니라, 거듭되는 분화 증폭 속에서 어떤 인식이 잘 기능하는가이다.

VI. 인식은 자기 자신의 가능 조건을 구별의 형식으로 가져올 수 없다. 인식이 구별에 근거한 유일한(unique) 구성물인 한, 인식은 자기에 대응하는 그 어떤 것도 외부에서 찾을 수 없다. 한편 외부(=인식이 자기지시/타자지시 구별을 사용하여 타자지시의 영역으로 지칭하는 면)에 인식의 가능 조건이 위치할 수는 있지만, 이때 인식은 다시금 자기지시/타자지시, 내부/외부 구별을 무시함으로써만 작동적 폐쇄성을 담보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신, 세계, 실재와 같은 무차이적(differenzlos) 개념들에 관한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세계는 체계와 환경의 통일로, 실재는 인식과 대상의 통일로, 의미는 현행성(Aktualität)과 가능성의 통일로 정의된다. 이 개념들의 부정은 다시 해당 개념 안으로 포섭된다. 비세계를 지칭하는 관찰은 세계 속에 있어야 하며, 비실재를 지칭하는 관찰은 다시 실재 속에 있어야 하고, 무의미를 지칭하는 관찰은 다시금 의미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무차이란, 지칭된 면이 그 반의어가 아니라 특정한 구별에 의해 정의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위에 언급된 구별들은 임의의 구별들이 아니라 굉장히 특수한 일차적 구별들이다. 이는 인식이 굉장히 특수한 종류의 작동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위의 한계개념들은 오로지 인식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또한, 위의 개념들은 인식/대상, 체계/환경 등의 구별이 비대칭적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이들의 면들 중 오직 한 면에서만 연결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은 스펜서 브라운 논리학에서의 의미로 오직 한 면에서만 재진입(re-entry)을 허락한다[.]”(Luhmann, 2006: 257) 다시 말해 인식과 대상의 구별은 인식에, 체계와 환경의 구별은 체계에 내재적인 구별이다. 인식/대상 구별은 인식이, 체계/환경 구별은 체계가 행하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V장에서 제시된 이중성과 단일성의 합일의 역설을 해결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은 항상 이차 등급 관찰자의 입장에서만 발생한다. 일차 등급 관찰에서 이 역설은 드러나지 않지만, 관찰에 대한 관찰을 위해서는 이 역설을 맞닥뜨려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인식론의 과제이다.

VII. 인식 자신의 가능 조건에 대해 인식은 얼마든지 물을 수 있으며, 이 가능 조건을 물을 때도 인식은 그러한 조건들을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구성주의 인식론은 그것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급진적 구성주의는 그러한 질문 대신 “체계는 어떻게 인식적 폐쇄라는 조건 아래 자신의 복잡성을 구축하며 어떻게 인식적 효력을 증대할 수 있는가”(Luhmann, 2006: 258)를 묻는다.

여기서 혹자는 해당 문제를 언어의 문제와 착종시켜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체계이론가인 마투라나나 글라저스펠트를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언어학적 연구와 인식론적 구성주의 사이의 연결에 주목했으며, 언어가 바로 관찰을 해명하는 데 핵심적 요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루만이 보기에 이런 주장은 오히려 문제의 핵심을 은폐한다. 언어는 고도화된 관찰 방식으로서 인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인식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은 아니다. 루만에 의하면, 언어는 그 자체로 자기생산적 체계를 이루지 않는다. “언어의 효력은 그 대신에 의식과 소통 사이의 구조적 접속에 있다.”(Luhmann, 2006: 259) 언어는 여전히 의식과 소통 사이의 구조적 접속과 관련하여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지만, 구성주의적 인식론의 문제로 남지는 않는다. 의식적 및 사회적 인식 작동에서는 언어적 분석에 의해서가 아닌, 자기지시적 및 자기생산적 체계에 대한 심리학적 및 사회학적 분석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런 연구 과제들은 ‘연결’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체계를 정의하는 한 결코 제시되지 못하는 것들이다. 물론 의식과 소통은 전통 이론들이 양자를 정확히 구별하지 못했을 정도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체계 개념을 ‘내적으로 촘촘하게 연결된 대상’이 아닌 체계/환경 구별로부터 출발시킬 때, 우리는 완전히 다른 이론 구성에 이른다. 여기서 떠오르는 물음들은, ‘어떤 작동들이 체계를 폐쇄하는가?’, ‘이 폐쇄가 발생할 때 어떤 형태의 구조적 접속이 체계와 환경 사이의 연결을 담보하는가?’ 등이다.

자기생산적 체계이론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예측하기 어려운 결과들을 내놓고 있다. 인식론의 경우, 체계이론은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 체계가 환경으로부터 작동상 닫혀 있어야 한다는 급진적인 구성주의적 인식론을 내놓는다. 물론 이는 인식이 비실재적인 것이라거나 하는 뜻이 아니다. 인식이 환경 자체에서 찾을 수 없는 것들을 구성하며 닫혀 있는 작동이 아니라면, 체계는 체계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환경 속으로 해소되어버릴 것이다. 급진적 구성주의는 바로 이 점을 가리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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