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파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제임스 k. a. 스미스『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

원글: Homo Viator: 네이버 블로그

파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1. 들어가는 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사용된지도 벌써 약 50년이 지났다. 이제 더 이상 포스트모더니즘이 새로운 사조라거나 신선한 관점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른 여타의 사조들처럼 이제 포스트모더니즘도 한 때의 유행을 지나, 이전처럼 뜨거운 관심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언급이 반복해서 이뤄지고 있는 곳이 있다. 역설적이게 들리지만 바로 교회다. 특히 스스로를 복음주의라고 여기는 교단일수록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관심 아닌 관심은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는다. 물론 따스한 시선이나 학문적 열정으로 바라봐 주는게 아니라 교회를 파괴하고 복음을 왜곡하는 주범으로 삼아 그 책임을 묻기 위한 관심이라 할 수 있겠다. 꼭 개별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많은 그리스도교인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미지는 ‘종교다원주의’, ‘상대주의’, ‘좌파 철학’ 내지는 ‘인본주의’ 등 그리스도교 신앙과 배치되고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부정하는 사조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제임스 K. A. 스미스는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1)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사상을 간략한 구호로 축약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종의 신화적 이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즉,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라는 물음은 교회가 두려워하는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이 뿔과 박쥐 날개가 달린 악마가 아니라는 사실 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스미스는 더 나아가서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이 그리스도교를 더 그리스도교적으로 회복시켜 줄 수 있는 동료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친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교회는 당연히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파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그러나 스미스는 이렇게 의심하는 교회의 손을 붙잡고 이끌며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와서 보라!”

2.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 장별 내용

  1. 파리에서 온 마귀인가?

스미스는 프랑스 철학에 영향을 받은 20세기 후반의 일련의 철학적 흐름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과 건축, 문학, 예술 등 문화 현상의 집합체로서 탈근대성(postmodernity)을 구분한다. 대부분 포스트모더니즘을 떠올리고 비판할 때 전자와 후자가 혼동되고 있으며, 포스트모던을 비판하는 사람들조차도 정확히 무엇을 향해 비판하는지 모호한 경우가 많다. 스미스는 이 지점을 비판하면서 많은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에 덧씌워진 이미지는 철학적 흐름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기보다 문화 현상으로서 탈근대성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물론 탈근대성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스미스는 탈근대성이 여전히 근대적 영향력 안에 있어 “후기 근대성”(late modernity)으로도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곧, 포스트모던적이라고 비판하는 문제들, 개인주의나 소비주의 등은 사실 근대성의 연장에서 발생한 산물에 불과하다. 오히려 스미스가 보기에 철학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성의 전제를 비판하고 무너트리려는 사조라는 점에서 근대성과 그 영향 아래 있는 탈근대성도 함께 비판할 수 있는 사조다.

이런 점에서 누구보다도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해야 하는 자들은 근대성의 사유에 갇혀 있는 자들이지 교회가 아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했는가? 바로 이 지점이 논의의 시작점이다. 스미스가 보기에 교회는 여전히 근대성에 빠져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파리에서 온 마귀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교회에게 주는 것은 핍박이나 박해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교가 더 그리스도교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회복이다. 이는 오히려 근대성 이전 교회 전통과 전례를 다시 상기시키고 이 전통을 바탕으로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교와 교회를 만들어 나갈 힘을 발견하게 한다. 이것이 스미스가 주장하고자 하는 근원적 정통주의(Radical Orthodoxy)의 골자다. 이를 위해 스미스는 이른바 “불경한 삼위일체”라 불리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를 교회로 불러올 준비를 한다. 스미스는 그들의 사상에 대해 씌워진 신화를 제거하고 각각의 사유가 정통 그리스도교적 사유와 맞닿은 지점을 강조하며 이 파리지앵들을 통해서 어떻게 교회가 교회될 수 있는지를 보이고자 한다.


2)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데리다, 해체, 성경

데리다의 사상으로 축약되어 이해되는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주장이다. 철학자가 텍스트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버클리 같은 형이상학적 관념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실재하는 사물은 없으며 관념만이 존재한다는 주장과 같아 보인다. 그리스도교 신학자들도 역시 데리다를 언어만 있고 사물은 없다고 주장하는 언어 관념론자로 여겼다. 그렇기에 신학자들은 데리다의 주장을 따를 경우, 텍스트 바깥에 존재하는 초월적 창조자인 신이 부정되는 무신론과 연결된다고 보았으며 또한 명백히 텍스트인 성서 바깥에 있는(성서가 지시한다고 생각되는) 성육신이나 부활 등은 실제가 아니게 되어 버린다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스미스는 이것이 데리다에 대한 왜곡된 이해에 기인한 오해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스미스는 텍스트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나타난 장-자크 루소의 논문 “언어의 기원에 관하여”에 대한 분석을 살펴본다. 루소는 언어의 기원에 대한 물음에 답하며 언어가 세계에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라고 간주했다. 언어는 세계에 대한 매개되지 않은 순수한 경험을 더럽히는 악 같은 것이었으며, 루소에게는 이런 ‘렌즈’가 없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던 예전 ‘자연 상태’만이 긍정적인 상태였다. 이 자연 상태에서는 우리는 대상을 해석할 필요 없이 직접적으로 그냥 알게 된다. 그러나 데리다에게 이러한 루소의 생각은 순진한 생각에 불과하다. 이 순진함은 해석을 수반하지 않는 순수한 읽기(혹은 순수한 경험)가 있다고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정은 우리가 결코 텍스트 이면에 존재하는 순수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인식일 뿐이다. 오히려 해석은 인간이 순수한 대상을 받아들이는데 존재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무언가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부분이다. 이러한 점에서 텍스트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주장이 의미하는 바는,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늘 이미 해석되지 않은 현실은 없다는 것”(p. 60)이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 일종의 텍스트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컵을 경험할 때도 컵을 둘러싸고 있는 역사와 배경, 맥락 등 다른 여러 가지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이 ‘텍스트’를 해석한다. 따라서 스미스는 데리다의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모든 것은 해석이다”라는 공리로 느슨하게 번역할 수 있다고 정리한다(p. 64).

그렇다면 ‘모든 것이 해석이다’라는 주장이 그리스도교와 복음에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만일 모든 것이 해석이라면 복음도 단지 해석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복음이 객관적이지 않다면 진리라고 할 수 있는가? 스미스가 보기에 이러한 비판은 여전히 근대성에 머물러 있는 사유에 불과하다. 근대적인 지식 개념에서 무엇인가 참이기 위해선 객관적이어야 하듯이, 복음 역시 객관적인 참이어야만 진리로 여겨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보고 누군가는 불쌍한 나사렛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는 반면, 누군가는 하나님의 자기비움 을 바라본다. 아무리 계시가 객관적으로 주어진다고 해서 모두가 그 계시를 동일하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듯, 우리에게 계시된 내용은 언제나 해석의 대상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지는 주관적인 신앙에 달려 있는 문제였다. 따라서 신앙은 원래 객관적인 참이기 때문에 확신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었다. 이는 객관성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럼 신앙은 단지 주관적으로 아무 말이나 해도 괜찮은 것으로 전락하지는 않는가?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꼭 그 해석이 좋거나 참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데리다는 오히려 콘텍스트에 대한 중요한, 정당한 결정이 있음을 강조한다. 이 콘텍스트는 어떤 것이 좋은 해석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합의에 도달한 해석자들의 공동체에 의해서 주어진다. 여기서 스미스는 성서를 해석하는 공동체인 교회와 그 전통의 중요성을 발견한다. 해석 공동체의 관습과 규칙 없이는 어떤 텍스트도 잘 해석해 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스미스가 제시하고 있는 해체적 교회는 고대의 신조와 해석으로부터 이전부터 동일하게 비춰 주시던 성령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전통을 그 자체로 고수하려는 전통주의에 빠지려는 것은 아니며 동시대의 목소리와 주변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언제나 더 나은 해석을 위해 끊임없이 해석해 나간다. 그리고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해석이기에 입증이 아닌 선포와 증언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소비주의, 쾌락주의라는 해석 앞에 훌륭한 대항문화적 해석으로 표출될 수 있다.

  1. 메타내러티브는 모두 사라졌는가?: 리오타르, 포스트모더니즘, 그리스도교 이야기

장-프랑수아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극단적으로 단순화하자면,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메타내러티브를 불신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p. 97).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메타내러티브, 곧 ‘큰 이야기’를 의심하고 불신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창조부터 구원과 부활과 같은 거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한, 큰 이야기를 불신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스미스가 보기에 이러한 판단은 역시 부당하게 오해된 것이며 이 역시 세심하게 탈신화화할 필요가 있다. 스미스는 리오타르의 주장을 살펴보기 위해서 그가 어떤 의미로 ‘메타내러티브’를 사용하고 있는지 먼저 알아내고자 한다. 만일 우리가 메타내러티브를 “현실에 대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대한 서사시 내러티브”(p. 99)를 가리킨다고 여긴다면, 그래서 그것을 전 지구적 범위에 미치는 보편적인 이야기로 여긴다면 성경에 나타난 창조, 타락, 구속 등의 내러티브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의심될 것이다. 그러나 리오타르가 말하는 메타내러티브는 그 이야기의 범위가 핵심이 되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야기를 들려 주는 방식이다. 리오타르는 메타내러티브가 분명히 ‘근대적 현상’이라고 간주한다. 성서는 물론이고 오뒷세이아나 여타 고대의 이야기도 거대하고 넓은 범위에 이르는 내러티브를 제시하고 있지만 이들이 메타내러티브로 분류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근대적 현상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리오타르가 말하는 근대성에 기인한 메타내러티브는 거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뿐만 아니라, “보편적 이성에 호소함으로써 그 이야기를 정당화하거나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야기”(p. 100) 다. 이에 따르면 리오타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메타내러티브는 바로 과학이다. 내러티브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 하기보다 이야기 안에서 주장을 보여주려하는 반면, 근대의 과학 문화는 정당화를 바깥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근대적 민족의 동질성이 해체된 이후 즉각적으로 서로 동의 한 일치된 의견에 이를 수 없기에 특정한 언어 게임 바깥에 있는 보편적 기준—곧 보편적 이성— 과 같은 메타내러티브를 바탕으로 정당성을 호소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밝혀내고 있는 것은 과학이 기대고 있는 보편적 기준 같은 메타내러티브는 스스로 다른 내러티브를 모두 넘어 있는 것 처럼 가장하지만 사실 그것도 어떤 내러티브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모든 지식은 어떤 내러티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서로 경쟁하는 내러티브 사이에 위계를 설정해 줄 메타내러티브나 중립적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근대성 안에서 과학은 과학적 지식과 우화적 지식을 구분하기 위해 보편적인 이성이라는 메타내러티브에 기대어 종교에게 이성적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모든 내러티브가 동등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신앙이 보편적 기준에 맞추기 위해 변증하거나 변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 대신 그리스도교 신앙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내러티브적 특성이 강조되고, 교리 모음집이나 신앙 진술서로 요약되지 않은 하나님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신앙으로의 회복이 가능해진다. 이제 교회는 ‘이야기하는’ 교회로서 내러티브를 특정 교리 로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살아낼 수 있는 공간을 가지게 된다.

  1. 권력/지식/훈육: 푸코와 포스트모던 교회의 가능성

푸코는 감옥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단지 교도소에 대한 내용을 넘어 사회 전체가 감옥을 반영하고 있는 방식에 대해서 발견한다. 푸코의 사례 연구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공리는 감옥은 물론이고, 병원, 학교, 기업 등 사회의 기관의 근간에는 권력관계의 그물망이 펼쳐져 있다는 깨달음이다. 이는 푸코가 “권력은 지식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연관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지식과 권력이 동일하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지식과 권력의 떼어 낼 수 없는 관계를 말하고 있다. 지식과 권력의 관계가 말하고 있는 것은 지식이 결코 중립적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지식으로 결정되는 것은 언제나 권력의 그물망 안에서 구성된다는 사실이다. 푸코가 강조하는 것은 권력이 지식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푸코는 니체가 그랬던 것처럼 진리라고 불리는 것들의 계보를 타고 올라가 그 이면에 감추어진 권력의 이해관계를 발견해 낸다. 스미스는 이를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드러 난 사례 연구를 통해 집중적으로 다룬다. 푸코의 책은 고문에서 처벌로, 그리고 훈육으로 이어지는 형벌 이론의 역사적 발전을 추적하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 세 시대 사이에 질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인본주의적으로 진보한 것처럼 보이는 처벌의 약화는 사실 하나의 지배 형태가 다른 지배 양식으로 대체되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푸코는 이러한 계보학적 분석을 통해서 그가 “훈육 사회”라 부르는 것의 형성을 기술한다. “훈육 사회는 푸코가 ‘훈육’이라 부르는 특 정한 권력 기술에 의해 제작된 현실이다”(p. 139). 이에 따라 훈육 사회의 목적은 그 사회의 이미 지에 따라 개인을 ‘생산해 낸다.’ 이런 의미에서 푸코는 “권력은 현실을 생산한다”(p. 139)고 덧붙인다. 권력이 무엇이 정상적인지 결정하고 나면, 사회 전체에서는 그 정상성에 벗어나 있는 일탈 자를 정상화하려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이 안에서 개인은 사회가 원하는 모습으로, “즉 국가에 순종하는 유순하고 생산적인 소비자로” 빚어진다.

스미스는 푸코에 대한 여러 해석 중 은밀한 계몽주의 사상가 푸코로서 푸코 상(像)을 해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논의를 이어 간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기술되어 있는 언어 표현은 “이미 현재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전달하면서 개혁과 혁명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인다”(p. 149). 이런 점에서 은밀한 계몽주의 사상가 푸코는 자율적 행위 주체로서의 개인을 우선시하고 권력에 의한 훈육이 지배적이고 억압적이라고 바라보고 이로부터의 해방을 요청한다고 볼 수 있다. 스미스 에게 이러한 계몽주의적 푸코는 그리스도교적이지 못하다. 그가 보기에 훈육의 메커니즘이 개인을 형성하는 푸코의 분석은 정확하지만, 이 모든 훈육 과정을 부정적으로 본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스미스가 보기에 그리스도인은 훈육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오해의 여지가 다분하다. 특히 권력에 반대하는 자유를 부정적으로 봐야 한다고 읽힐 수도 있기에 마치 전체주의나 파시즘과 같다고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스미스는 모든 권력과 훈육이 악하다는 전제 자체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본다.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부름받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 훈육을 거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훈육 자체를 문제 삼는 게 아니라, 그 훈육이 좋은 훈육인지 나쁜 훈육인지 구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전 장에서 다뤄진 데리다와 리오타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스미스는 푸코를 교회로 데려오면서 이 두 가지 훈육을 중요하게 받아들인다. 푸코의 연구가 제공하는 것은 인간을 특정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훈육 메커니즘에 대한 사실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소비주의적 문화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진 상황을 직면할 수 있다. 여기서 스미스는 이러한 문화적 형성이 만연하다는 것을 단순히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종류의 사람으로 형성하기 위한 ‘대항 훈육’을 제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제자도가 예수를 닮은 사람으로 빚어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만드는 하나의 훈육이라는 점을 활용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빚어내는 훈육 사회로 스스로를 이해하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근대 문화에 반하는 대항 문화로서 기능할 필요가 있다.

3.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것

제임스 K. A. 스미스가 파리에서 난 난해한 사상들을 통찰력 있고 또 평이하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오래전 전통 신앙을 부활시키는 데 이르는 사유는 놀랍게도 설득력이 있다. 경건한 복음주의 신학자나 영향력 있는 교부들을 바탕으로 전통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이라고 간주된 악동들을 바탕으로 오히려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풍부한 전통에 이르게 되는 사고의 흐름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는 점은 놀라울 따름이다. 스미스는 자신이 집요하게 파헤쳐 내려고 하는 것이 교회가 전통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던 근대성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면서 단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을 끌어오기 위해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근대성을 무너트리는 가장 적합한 동료로 서 선택했다는 것이 인상 깊다. 또한 본 요약문에는 깊게 담지는 못했지만 스미스는 데리다와 리오타르, 푸코의 통찰을 단지 이론적 차원에서 다루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등장하는 포스트모던적 교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실천적으로 고민한다. 그 점에서, 단지 이론가일 뿐 아니라 포스트모던을 살아가는 신앙인 누구에게나 실천적으로 다가가도록 서술했다는 것은 스미스가 얼마나 신앙적이고 실천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지 느끼게 한다. 특히 인상 깊은 지점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전통에 대한 재사유를 발견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를 받아들이는 급진신학(radical theology)이 자주 범하는 실수는 우리의 인식론적 한계—데리다의 사상처럼 모든 것은 해석에 불과하다는 사유—를 적절히 받아들이면 서도 그 결과 그리스도교적인 계시나 전통에 대한 정당성을 발견하지 못하기에 그것들을 포기하 는 사유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스미스의 지도교수였던 존 D. 카푸토와 같은 학자는 종교로 자처하는 것들, 교리나 신조, 정통과 같은 것에서 종교적인 것이나 계시를 발견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술과 과학, 윤리학과 종교 등 도처에서”2) 그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여러 내러티브 사이에서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계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면 스미스도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겠지만, 카푸토의 의도가 전통적으로 고백되어 오던 하나님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약화라면, 그래서 신이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불가능한 가능성”과 같은 상징으로서 받아들 여지게 된다면 이것은 적어도 그리스도교적이지는 않다. 이러한 사유는 돌고 돌아서 돈 큐핏(Don Cupitt)이 모든 특정 종교적 사유 대신 ‘태양처럼 살아가기’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거나 존 힉 (John Hick)이 하나님이라는 표현 대신 궁극적 실재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는 사유와 닿 아 있다. 결국 우리가 그 안에 서 있는 그리스도교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철학자 잔니 바티모(Gianni Vattimo)가 올바르게 지적하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3)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의 해석은 언제나 전통과 문화, 역사적인 맥락 안에서 이뤄진다. 이런 점에서 바티모는 서구 유럽인이라면 설령 그리스도교 교인이 아니어도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스미스는 이러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오히려 논의의 핵심으로 가져온다. 특히 데리다의 사상을 전유하면서 어떤 해석이 좋은 해석인지 판가름하는 기준을 우리의 전통과 성서 해석 공동체에 맡기므로 교회와 그리스도교적인 것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서 있는 지평 없이는 그 어떤 실천도 신앙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지평 없는 “궁극적 실재”는 그 어떤 신자도 가지지 못한 채 철학자와 신학자의 논문에나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다뤄지게 될 뿐이다. 그러나 스미스의 작업처럼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더 실천적으로, 더 정통적으로 신앙할 수 있는 방법이 열리게 될 때, 다른 대항문화적이고 실천적인 함의를 가진, 빛과 소금으로서 교회가 돌아올 수 있게 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다시 떠오르는 요즘이다. 반대로 말하면 가장 한국적이지 못한 것은 가장 세계적이지도 못하다. 마찬가지로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것을 자랑하지 않을 때 이 이야기는 이도 저도 아닌 무언가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그리스도교적으로, 가장 그리스도교적 이야기를 사랑할 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이 땅에 실현하는 소명을 다시 실천할 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스미스의 사유는 다른 포스트모더니즘을 전유한 학자와는 달리, 더 실천적이고, 더 신앙적이고, 더 그리스도교적이라는 점에서 가장 유의미하다.

  1. 제임스 K. A. 스미스,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 설요한 옮김(고양: 도서출판100, 2023)

  2. 존 D. 카푸토, 『포스트모던 해석학』, 이윤일 옮김(서울: 도서출판b, 2020), p. 295.

  3. Gianni Vattimo, et al., The Future of Religio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7), p. 54

위의 서평은 인문학&신학 연구소 에라스무스 Critical Book Review 2024년 11월 첫째 주에 실렸다. 에라스무스 연구소의 안내에 따라 원고의 독점 사용기간인 6개월이 지나 블로그에 게시하였다.

11개의 좋아요

우리나라의 상황이 파리 철학자의 소리에 귀기우릴 필요가 있을까요? 이런 해석 저런 해석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들이 근대성을 후회할 수도 있고 그들의 근대성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의 경우에도 성경으로 돌아 갈 수 있고 성경을 재해석하자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우리 실정에서 보면 수도권으로 편중되어 지방이 소멸되고 출산율이 저하되는 한국적 고질병이 더 걱정스럽지 않은가요? 올바른 존재론이니 인식론은 이 땅을 고쳐달라고 기도해야 할 듯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