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athan Schaffer(2009), 무엇이 무엇을 근거지음에 관하여(1)

무엇이 무엇을 근거지음에 관하여
On What Grounds What

Jonathan Schaffer

실체는 이 탐구의 주제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찾는 원리와 원인은 실체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우주가 전체로서 여겨진다면, 실체란 그것의 첫 부분이며, …

—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069a18– 20)

현재 지배적인 콰인주의적인 관점에서, 형이상학은 무엇이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형이상학은 속성이 존재하는지, 의미가 존재하는지, 수가 존재하는지와 같은 문제 따위와 관련된 것이라고 이해된다. 나는 여기서 더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관점, 즉 형이상학이란 무엇이 무엇을 근거지는지에 관한 것이라는 관점의 부활을 위한 논증을 할 것이다. 이렇게 부활된 형이상학은 속성, 의미, 그리고 수가 존재하는지에 관해서 굳이 묻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존재한다! 문제는 그것들이 기초적인지 아닌지이다.

§1에서 나는 세 가지의 형이상학적 구조에 관한 구상을 구별할 것이다. §2에서 나는 존재에 대한 관용적인 제한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관점을 옹호할 것이다. §3에서 나는 원초적인 근거지음(grounding) 관계를 중심으로 지어진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틀을 더욱 발전시킬 것이다.

형이상학적 구조에 대한 세 가지 구상

현대의 교과서들은 주로 형이상학을 콰인-카르납 논쟁을 통해, 또한 콰인이 승리를 가져갔다는 것을 통해 소개한다. 저항은 주로 콰인의 승리에 도전하는 신카르납주의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왜 콰인-카르납 논쟁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왜 형이상학에 대한 가장 좋은 이해가, 반형이상학적 공감대를 이루는 실증주의자 선생과 그의 신실증주의자 학생 간의 논쟁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콰인과 카르납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많은 전제 중 하나는 형이상학적 문제가 존재 문제 , 이를테면 수가 존재하는지의 여부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뻗어나간 것 중 유일한 엇갈림은 이러한 문제가 유의미한지의 여부이다. 그런데 왜 형이상학의 문제가 이러한 존재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으로 돌아가자. 거기에는 실제로 제기된 존재에 관한 문제는 없다. 모든 논의는 실체(존재의 기초적 단위)에 관한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군데에서 잠깐 숫자가 존재하는지 묻기는 하지만, 그는 간단하게 그렇다고 하고 무시한다. "수학자들이 귀속시킨 특징을 가지는 수학의 대상에 대해서, 그것들이 존재한다고 아무런 추가 설명 없이 참되게 말할 수 있다." (형이상학, 1077b32 – 3).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수에 대한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초월적인 실제인지, 아니면 어떤 구체물(concreta)에 의해 근거지어지는지였다. 문제는 수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존재 방법이었다.

콰인주의적 관점: 무엇이 있는지에 관하여

콰인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1963a: 1) 그는 이 질문에 진부한 대답('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있다는 것을 명시하지만, "여러 경우에서 동의하지 않을 여지가 남아있다."(1963a: 1)라고 덧붙인다. 그러한 여러 존재 문제에서 콰인이 언급한 것은 속성, 의미, 그리고 수이다. 따라서 콰인은 형이상학을 속성, 의미, 수 따위가 있는지를 물음으로써 무엇이 있는지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친숙할 것이다.

콰인주의적 관점에 대해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형이상학의 과제와 방법을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도움될 것이다. 즉슨,

콰인주의적 과제: 형이상학의 과제란 무엇이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무엇이 있는지는 양화(quantification)의 범위를 형성한다. 이 범위는 하나의 집합(또는 등급(class)이거나 복수(plurality))으로, 내적인 구조가 없다. 달리 말해서, 콰인주의적 과제은 존재자를 열거하는 것이다.

무엇이 있는지를 말하는 콰인주의적 과제는 다음의 방법으로 달성된다:

콰인주의적 방법: 형이상학의 방법은 우리가 가진 최선의 이론에서 존재 개입(existence commitment)을 끌어내는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보자면, 콰인주의적 방법은 우리가 가진 최선의 이론과 형식 논리학에서 시작하여, 전자를 후자로 번역한 뒤, 어떤 종속 변수가 그것이 참이 되게 위해서 요구되는지 보는 것이다(자세한 것은 §2.3 참조). 그것은, 이 방법론은 우리가 가진 최선의 이론이 적절하게 수립되게 하기 위해 필요한 양화의 범위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범위의 요소는 최선의 이론이 가정하는 것이며, 우리가 그 이론을 받아들이는 한 우리는 그러한 개체들에 개입한다(1693a: 12 – 3). 그것이 존재론이다. 나머지는 관념(ideology)이다.

콰인주의적 관점은 이 분야에 대한 완전한 개념을 제공한 점에 있어서 칭찬받을 만하다. 콰인주의적 과제를 수행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이유 중 한 부분은 그것을 달성 가능한 방법이 있어 보인다는 점이고, 콰인주의적 방법을 실천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이유 중 한 부분은 그것으로 달성하는 가치 있는 과제가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콰인주의적 관점은 진전을 담보한다는 점에 있어서 더욱이 칭찬받을 만하다. 콰인 본인은 분명히 형식적으로 정리된 물리학에 있어서 수에 대한 양화가 필수불가결해 보인다는 근거로 수에 대한 제거주의에서 실재론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느꼈다. 따라서 콰인주의적 관점은 야블로가 "발전적 연구 프로그램으로서의 존재론(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직관을 교란하는 존재론과 헷갈리지 않는)"(1998: 229)이라고 부른 무언가를 담보한다.

콰인주의적 관점은 형이상학이 실증주의적 우매함으로부터 부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역사적인 역할에서 더더욱 칭찬받을 만하다. 콰인은 일차적으로 형이상학적 존재 진술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한 카르납에 대항해 논쟁했다.[1] 카르납의 관점은 그 당시의 반형이상학적 실증주의를 발전시켰는데, 슐릭의 표현을 따르지면: "경험주의자는 형이상학자들에게 '네가 말하는 것들은 거짓이다.'라고 말하지 않는 대신 '네가 말하는 것들은 애초에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형이상학자들에 반대하지 않는 대신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1959: 107). 콰인을 콰인-카르납 논쟁의 승자로 간주하는 것은 이 극단적인 반형이상학적인 입장이 패배했다고 간주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콰인주의적 관점의 승리가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승리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콰인주의적 관점이 의도상 수정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르납이 콰인을 "전통적인 형이상학에 속하는 단어에 뜻을 주고 그러므로 무의미하다"(Quine 1966a: 203)라고 비판할 때, 콰인은 "무의미한 단어란 명확히 내가 가장 그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이다"(1966a: 203)이라고 대응한다. 분명히, 교과서들은 콰인과 카르납을 서로 반대하는 것으로 그리지만, 콰인은 오히려 그의 스승의 반형이상학적 동류로 이해하는 것이 낫다(c.f. Price 1997). 콰인-카르납 논쟁은 반형이상학적 실용주의자들 간의 내전적 논쟁이다(실용적 평가의 중점이 분자적인지 전체론적인지의 문제를 함축하는 분석-종합 구별에 관한). 콰인 본인이 말했듯이:

카르납은 존재론적 문제가 … 사실에 관한 문제가 아닌 과학을 위해 편리한 개념 도식 또는 틀을 선택하는 문제라고 견지했으며, 나는 모든 과학적 가정에 대해서 이와 같은 것이 용인되는 한에 있어서만 이에 대해서 동의한다. (1966a:211)[2]

형이상학의 과제와 방법에 대한 콰인주의적 관점은 여전히 지배적이다. 분명히 현대의 메타형이상학은 주류의 콰인주의적 중심과 흩어진 카르납주의적 반대자라는 구도로 묘사될 수 있다. 다른 입장은 거의 없다.[3]

[1]조금 더 엄밀히 말하자면, 카르납은 존재 진술이 구조-외부적(framework-external)이므로 무의미하거나, 구조-내부적이므로 분석적이거나 경험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껏해야 어떤 구조를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실용주의적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할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추상적인 실체의 존재 여부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이 아닌 추상적인 언어 형식을 사용하는 것이 … 적절하고 유익한지 … 의 여부이다."

[2]그렇다면 콰인 본인의 형이상학에 대한 결론은 순전히 수축적이다. 콰인은 존재론적 상대성 논제 또한 받아들이기 때문에(1969: 54-5; 자세한 논의는 §2.3를 볼 것),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존재론에 있어서 경험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오직 중립적으로 이론 구조의 중심에 기여한다는 점이다." (1992: 33; "진정된(鎮定된, defused) 존재론"이라고 이름붙여진 절에서). 따라서 콰인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의 유일한 과제는 목록을 제공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목록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점은 그 크기이다. 두 목록이 같은 크기를 가지는 한 그 둘 사이에는 환원적 1대1 대응이 있을 것이다(1969: 57). 그러므로, 콰인에게 있어서 의자, 용, 수를 목록에 넣는 것의 실재적인 차이는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콰인은 로벤하임 – 스콜렘 정리가 오직 양의 정수만을 포함하는 존재론을 인정하게끔 만드는지를 고려한다. 그는 그러한 피타고라스주의에 반대하는 무엇이든가에 불만은 없다. 다만:

수가 일대일로 우리의 디딤돌이었던 구체화와 대응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의 과학에 그러한 해석 없이는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우리는 아마도 옛 방법으로 과학을 해야 할 것이며 … (1992: 33)

그러므로, 콰인에게 있어서, 유일한 형이상학적 문제는 얼마나 많은 개체들이 있는가이다. 로벤하임 – 스콜렘에 따라, 양의 정수의 크기는 증명가능하게 충분하다(provably sufficient). 따라서 형이상학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모든 형이상학의 거대한 문제들에 있어서, 허용가능한 최종적 답은 다음과 같다: 존재하는 것은 {1, 2, 3….}

이러한 관점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이끌어낸다: 그것이 답이라면, 무엇이 물음이어야 하는가? 더글라스 아담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컴퓨터 깊은 생각(지구 역사상 두 번째로 거대한 컴퓨터)는 삶, 우주와 모든 것에 대한 위대한 문제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깊은 생각은 750만 년 동안 뱉고, 흔들고, 소리내다 마침내 "42"라고 대답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사십-이!" 룬콰울은 소리쳤다. "그게 네가 칠백 하고 오십만 년에 걸쳐 내놓은 전부라고?" "나는 아주 철저하게 검사했다." 컴퓨터는 말했다, "그리고 그게 틀림없이 정답이다. 내가 보기에 문제는,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이 한 번도 그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p.182)

[3]콰인에 도전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대개 카르납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규칙이 증명된다. 예를 들자면, Price 1997, Azzuni 1998, Yablo 1998, Hofweber 2005, 그리고 Chalmers(원문에서는 문장이 이어지지만 저는 오타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모두 카르납주의적 깃발 아래에서 콰인주의적 체제에(비록 방식은 다르지만) 반대한다.

영한 번역은 처음이라 오역이 많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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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형이상학적) 그라운딩에 관한 눈문 번역이라니!! 감사합니다 ㅎㅎㅎ

셰퍼의 이 해설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종종 콰인의 "On What There Is"가 전통적 형이상학을 복권시킨 것처럼 말하는 글들이 있던데, (그리고 실제로도 수많은 철학자들이 콰인에게 영감을 받아 분석철학적 형이상학을 쌓아 올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는 한데,) 저는 적어도 콰인의 존재론적 개입 기준 자체는 '형이상학 중립적'이라고 생각해요. 콰인은 특정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이 어떤 존재자들의 목록을 받아들이고 있는지만 보여주었을 뿐, 그 목록들 중 무엇이 자연의 결을 더 잘 깎고 있는지(carving nature at its joints)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콰인 자신은 실용주의자라 '자연의 결을 깎는다'는 생각 자체에 반대하였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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