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g. a. 코헨: 도덕화된 자유개념과 일관성 없는 정의

출처:
Cohen, G. A. 1981. “Freedom, Justice, and Capitalism.” rev. and rep. In his History, Labour, and Freedom: Themes from Marx. Oxford Univ. Press (1988), pp. 292-296.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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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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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상주의와 재산
두 부류의 사상가들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자본주의가 자유를 극대화한다는 데 동의한다. 한 부류는 이른바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s)들로, 이들은 더 나아가 무제한적 자본주의를 지지한다. 다른 한 부류는 일부 자유주의자들인데, 이들 역시 자본주의와 자유가 동일하다는 자유지상주의적 믿음을 공유하지만 정책의 문제에서는 자유지상주의자들과 결별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등이나 복지와 같은 다른 가치들이 자유에 대한 제한을 정당화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자유라는 하나의 선만을 지나치게 철저하게 추구한 나머지 다른 좋은 것들을 너무 많이 희생한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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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순수한 자본주의가 곧 순수한 자유, 적어도 순수한 경제적 자유라는 점에서는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동의한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는 정당하고 합리적으로 제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유가 다른 가치들과 균형을 이루어야 하며, 이른바 복지국가적 혼합경제가 그러한 적절한 타협을 실현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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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유지상주의자들과 방금 설명한 종류의 자유주의자들이 모두 자유라는 개념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들은 자본주의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자유는 보지만, 그 자유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제약에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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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인식의 실패를 드러내기 위해, 나는 자유지상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인 철학자 앤터니 플루(Antony Flew)가 그의 『폰타나 철학사전(Fontana Dictionary of Philosophy)』에서 제시한 자유지상주의의 정의를 비판하고자 한다.[3] 거기에서 자유지상주의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개인의 자유에 대한 어떠한 사회적, 법적 제약에도 반대하는 전면적인 정치적, 경제적 자유주의.” 앞서 설명한 종류의 자유주의자들은 이 정의의 의미에서 자신들이 ‘전면적인’ 자유주의자는 아니라고 인정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일정한 제약을 지지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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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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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법적 제약이 없는 사회는, 적어도 무정부주의적 상상력이 매우 강한 사람들에게는 상상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플루의 정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을 잘못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정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스스로 표방하고 실제로도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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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자. 국가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어떤 일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면, 그것은 명백히 나의 자유에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의 재산을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은 방식으로 사용하려 한다고 가정하자. 예를 들어 나는 당신의 넓은 뒷마당에 텐트를 치고 싶어 한다. 단순히 당신을 괴롭히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또는 내가 살 곳도 없고 내 소유의 땅도 없지만 어떻게든 텐트 하나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라는 보다 절박한 이유에서일 수도 있다. 그 텐트를 합법적으로 얻었는지 여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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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원하는 그 일을 실제로 하려고 한다면, 국가는 아마 당신을 대신하여 개입할 것이다. 국가가 그렇게 한다면 나는 내 자유에 제약을 받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어떤 사유재산에 대해 소유자가 허락하지 않은 방식으로 비소유자가 그것을 사용하는 모든 경우에 해당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 재산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사유재산 소유는 다른 사람들의 비소유를 전제하기” 때문이다.[4] 그러나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옹호하는 자유기업 경제는 사유재산에 기초한다. 즉, 각자가 소유하고 소유하게 될 것만을 사고팔 수 있다. 따라서 플루의 정의는 그 정의의 대상에 부합하지 않으며, '자유지상주의'라는 용어는 현재 철학자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입장을 나타내는 데 있어 심각한 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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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Karl Marx, 『Capital』, iii.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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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는 어떻게 내가 비판한 것과 같은 정의를 발표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가 부정직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문제의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 의도적으로 그것을 왜곡했다고 그를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플루와 그와 같은 자유지상주의자들, 그리고 앞에서 설명한 종류의 자유주의자들은 국가가 어떤 사람의 재산 사용에 개입할 때 발생하는 부자유는 보면서도, 그 재산이 바로 그 사람의 사유재산이라는 사실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의 사용에 대해 상시적으로 가해지는 개입 속의 부자유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의 이러한 한쪽 눈으로만 보는 시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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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설명의 일부는, 자유에 대한 사회적·법적 제약만이 인간 행동에 대한 제한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드러난다. 내가 날개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상당한 기계적 도움 없이는 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내 행동 가능성을 제한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 자유에 대한 사회적 또는 법적 제약은 아니다. 내가 제안하고 싶은 설명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이론가들이 사유재산이 자유를 제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현실에서 우리의 활동 상당 부분이 어떤 구조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구조를 인간 존재 일반의 일부, 즉 자유에 대한 사회적, 법적 제약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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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조건의 영구적인 부분이 아닌 구조도 그러한 것으로 잘못 인식될 수 있는데, 사유재산 제도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사유재산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것이 자유에 가하는 장애물은 인식되지 않는 반면, 사유재산 자체에 대한 침해는 즉시 눈에 띕니다. 그러나 사유재산은 자유와 부자유를 분배하는 특정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사유재산 소유자가 자신이 소유한 것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자유와 연관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 자본주의를 자유의 영역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자본주의 본질의 절반을 간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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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되지 않은 자유의 정의
나는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일단 이 점을 지적받고 난 뒤에도 사유재산이 자유에 제한을 가한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부정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5] 놀라운 것은 플루의 ‘자유지상주의’ 정의와 같이 명백히 불합리해 보이는 주장에 맞서, 이 점을 그토록 자주 새삼 지적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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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은 이 점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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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권리는 자유를 희생하여 만들어진다. … 재산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즉 그 목적에 필요한 만큼 자유를 빼앗음으로써 주어진다. 당신의 집은 어떻게 당신의 것이 되는가? 다른 모든 사람이 당신의 허락 없이 그 집에 들어갈 자유를 갖지 못하게 함으로써이다.”(「Anarchical Fallacies」,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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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유지상주의적 모순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또 다른 독립적인 설명이 있다. 지금까지 나는 어떤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그를 그 점에서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전제해 왔다. 즉, 누군가가 정당하든 아니든 내 행동을 방해할 때마다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많은 자유지상주의 저술에 내재된 자유에 대한 정의가 있는데,[6] 이 정의는 방해가 자유롭지 못함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도덕화된 자유의 정의 (moralized definition of freedom) 라고 부르는 이 정의에 따르면, 나는 누군가가 정당하지 못하게 나를 방해하거나 방해하려 할 때, . 다시 말해 누군가가 내가 할 권리가 있는 일을 하지 못하게 막을 때에만 나는 부자유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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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리고 때로는 명시적으로: Robert Nozick, 『Anarchy, State and Utopia 』, 26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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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러한 도덕화된 자유의 정의를 사유재산에 대한 도덕적 승인, 즉 일반적인 경우 사람들이 자신이 법적으로 소유한 재산에 대해 도덕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과 결합해 보자. 그러면 정당한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누구의 자유도 제한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유재산을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인정한다면, 당신과 경찰이 내가 당신의 땅에 텐트를 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정당한 행동이다. 그리고 도덕화된 자유의 정의에 따르면, 당신과 경찰이 그렇게 나를 막는다고 해도 나의 자유를 제한한 것은 아니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지적인 철학자들이 어떻게 자본주의, 사유재산, 자유에 관해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또 하나의 설명을 얻는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 속에서 사용되는 자유의 개념은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개념을 따르면 정당한 재판을 통해 유죄 판결을 받은 살인자가 정당하게 수감되더라도 부자유해진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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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화된 간섭조차 자유를 감소시킨다. 하지만 잠시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말하거나 암시하듯 정당한 간섭은 자유를 감소시키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사유재산에 대한 간섭이 자유를 감소시키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곧바로 주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자유 개념 아래에서는 명백했던 사실, 즉 사유재산에 대한 간섭이 실제로 자유를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전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덕화된 자유 개념을 채택한다면, 사유재산이 도덕적으로 침해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먼저 입증하기 전까지는 사유재산에 대한 간섭이 자유를 감소시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자유지상주의자들은 한편으로는 도덕화된 자유의 정의를 사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유재산에 대한 간섭이 소유자의 자유를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자유 개념을 사용할 때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개념에 따르면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것 역시 비소유자들의 자유를 감소시킨다는 사실이 마찬가지로 명백하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바로 이 결론을 피하기 위해 도덕화된 자유의 정의로 물러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일관되지 않은 두 자유의 정의 사이를 오간다. 이것은 단순히 어느 정의가 더 마음에 드는지 결정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실상 유지할 수 없는 입장을 유지하려는 욕구에 떠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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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도덕화된 자유의 정의를 받아들이는 모든 자유지상주의자가 반드시 이러한 모순된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유 이외의 근거를 통해 사유재산을 정당화함으로써 모순을 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정당하게 소유된 사유재산에 대한 간섭은 부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면 도덕화된 자유의 정의에 따라 그러한 간섭은 자유에 대한 침해가 된다. 이것은 일관된 입장이다. 하지만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자유의 정의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의를 제거한다면 그 입장은 지적으로 더 나아진다.[7] 그러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정의(justice)를 근거로 한 사유재산의 옹호이다. 여기서 자유는 논의에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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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지적인 측면에서는 개선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 입장에 대한 특정한 반론 하나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는 약화된다. 사유재산을 단지 정의의 근거에서 추천하는 것보다, 정의와 자유라는 두 근거에서 추천하는 것이―그 추천 속에서 두 개념의 관계가 아무리 혼란스럽게 얽혀 있다 하더라도―더 큰 이데올로기적 힘을 갖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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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ohen, G. A. 1981. “Freedom, Justice, and Capitalism.” rev. and rep. In his History, Labour, and Freedom: Themes from Marx. Oxford Univ. Press (1988), pp. 292-296.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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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번역 감사드립니다! 코헨의 저작 가운데 한국어 번역본이 얼마 없다는 것이 늘 아쉬웠는데, 이렇게 읽게 되어 너무 좋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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