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g. a. 코헨: 노직의 자유지상주의에서 강제와 자발성 개념의 순환논증 문제


Cohen, G. A. 1979. "Capitalism, Freedom, and the Proletariat." In his On the Currency of Egalitarian Justice and Other Essays in Political Philosophy. pp. 149-154.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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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자유지상주의자들과 앞에서 설명한 종류의 자유주의자들이 자유(freedom)라는 개념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물론 이 주장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그들이 각각 선호하는 제도들이 얼마나 매력적인지에 대한 평가는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러한 제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사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듯이 그들이 그 제도들을 잘못 묘사하고 있다면, 그 제도들을 올바르게 묘사했을 때에는 그것들이 덜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제도들을 옹호하는 수사에 대한 나의 비판은 간접적으로는 그 수사가 옹호하는 제도 자체에 대한 비판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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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된 주장은 다음과 같다. 자유주의자들과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자유는 보지만, 자본주의적 자유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부자유(unfreedom)는 간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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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인식의 실패를 드러내기 위해, 나는 우선 자유지상주의 철학자 앤터니 플루(Antony Flew)가 자신의 『철학 사전』(Dictionary of Philosophy)에서 제시한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설명을 비판하는 것에서 시작하겠다. 플루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어떠한 사회적·법적 제약에도 반대하는, 전적으로 철저한 정치적·경제적 자유주의”라고 정의한다. 네이글과 같은 종류의 자유주의자들은 플루의 정의에 비추어 보면 자신들이 그렇게까지 철저하지는 않다고 인정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일정한, 적어도 법적인 제약은 지지한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루는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위의 정의를 제시한 뒤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 용어가 이러한 의미로 도입된 것은, 특히 미국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흔히 자유주의자로 통하는 사람들이 고전적 자유주의보다 사회주의에 훨씬 더 호의적인 경우가 많다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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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철학 사전』, 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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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개인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법적 제약”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어쩌면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대단히 무정부주의적인 상상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든 아니든 간에, 플루의 정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을 잘못 묘사한다. 왜냐하면 그 정의는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데,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바로 자신들이 자본주의의 옹호자라고 공언하며 실제로도 그렇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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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자. 국가가 내가 하고 싶은 어떤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면, 국가는 명백히 나의 자유에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의 재산을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행위를 하고 싶어 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를테면 나는 당신의 넓은 뒷마당에 텐트를 치고 싶어 할 수 있다. 단지 당신을 약 올리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살 곳도 없고 내 소유의 땅도 없는 반면, 합법적으로든 아니든 어쨌든 텐트 하나는 손에 넣었기 때문이라는 좀 더 절박한 이유에서일 수도 있다. 이제 내가 내가 원하는 이 일을 실제로 하려고 한다면, 국가는 아마도 당신을 위해 개입할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개입한다면, 나는 나의 자유에 제약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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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사유재산을 소유자의 허락 없이 사용하는 모든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어떤 재산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존재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사유재산 소유는 다른 사람들의 비소유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5] 그런데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옹호하고 자유주의자들이 ‘자유로운’ 경제라고 부르는 자유기업 경제는 사유재산에 기초한다. 사람은 자신이 소유한 것만 팔 수 있고, 구매를 통해 어떤 것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루의 정의는 그것이 정의하려는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날 철학자들과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표준적으로 그 이름이 가리키는 입장을 생각한다면, ‘자유지상주의’라는 용어는 심각하게 잘못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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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르크스, 『자본론』 제3권, 8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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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플루가 어떻게 내가 비판한 것과 같은 정의를 버젓이 출판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가 부정직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이 문제의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고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왜 플루와 같은 자유지상주의자들, 그리고 내가 앞서 설명한 종류의 자유주의자들은 국가가 어떤 사람의 재산 사용에 개입할 때 생기는 부자유는 보면서도, 바로 그 재산이 그 사람의 사유재산이라는 사실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의 그 재산 사용을 상시적으로 막는 개입이 존재한다는 점은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무엇이 그들의 이러한 외눈박이식 시각(monocular vision)을 설명하는가? (여기서 내가 묻는 것은 ‘그들이 왜 그렇게 보려는 동기를 갖는가?’가 아니다. 내가 묻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이 가능한가?’이다. 즉,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유지시키는 어떤 지적 메커니즘 또는 메커니즘들이 작동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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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상주의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선호하는 수정된 자본주의(modified capitalism)에 대한 특정한 묘사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네이글에 따르면 “누진과세(progressive taxation)”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간섭(interference)”을 수반한다.[6] 그는 그러한 간섭이 없는 상태를 하나의 가치로 여긴다. 하지만 자신이 “좌파로부터 자유주의에 제기되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라고 부르는 입장이 주장하듯이,[7] 더 큰 경제적·사회적 평등을 위해서는 그 가치를 어느 정도 희생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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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누진과세나 최저복지보장(welfare minimum)과 같은 장치를 통해 사유재산의 지배력을 제한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이 실제로 자유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더 증가시키는 것인지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 정부가 공공 통행권을 설정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토지에 텐트를 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다면, 정부는 분명 토지 소유자의 자유에 간섭한다. 하지만 반대로, 걷고 싶어 하는 사람이나 텐트를 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 욕구를 따르지 못하도록 막을 때에도 정부는 그들의 자유에 간섭한다. 일반적인 요점은 다음과 같다. 사유재산권을 침해함으로써 소유자의 자유를 줄이고 자원에 대한 권리를 비소유자에게 이전하는 조치는, 바로 그만큼 비소유자의 자유를 증가시킨다. 따라서 그러한 자원 권리의 이전이 자유 전체에 미치는 순효과가 무엇인지는, 추가적인 정보와 논증이 제시되기 전까지는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moot poin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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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위의 주 3 참조.
[7] 「Libertarianism without Foundations」,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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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상주의자들은 국가가 “간섭(interference)”을 행하는, 자신들이 이른바 “개입주의적(interventionist)” 정책이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한다. 네이글은 그러한 정책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국가의 “개입(intervention)”이고 “간섭(interference)”이라는 점에서는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동의한다. 내가 보기에, 이와 같은 정책을 지칭하기 위해 ‘개입주의적’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명료한 사고를 방해하고 자유지상주의적 관점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이데올로기적 왜곡이다. 물론 그러한 용어 사용이 자유지상주의의 관점에 우호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자유지상주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네이글은 자유지상주의를 강하게 거부한다. 그러나 그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이 ‘개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방식에 그대로 동조함으로써, 자유지상주의를 실제보다 더 그럴듯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개입’이라는 말의 표준적인 사용법은 자유주의적 또는 사회민주주의적 체제에서 사유재산이라는 요소를 자유와 지나치게 밀접하게 결부시킴으로써, 그 요소를 실제보다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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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제 나는 자유지상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사유재산이 사람들의 삶에 초래하는 간섭을 간과하는 경향에 대해 두 부분으로 된 설명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두 설명은 서로 독립적이다. 첫 번째 설명은 “자유에 대한 사회적, 법적 제약”(위 150쪽 참조)만이 인간의 행위를 제한하는 유일한 원천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할 때 드러난다. 예를 들어 내가 날개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상당한 기계적 도움 없이는 날 수 없다는 사실은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그러나 이것은 내 자유에 대한 사회적 또는 법적 제약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이론가들이 사유재산이 자유를 제약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현재의 현실에서 우리의 활동 상당 부분이 어떤 구조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구조를 인간 존재 일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따라서 그것을 자유에 대한 사회적, 법적 제약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인간 조건의 영구적인 일부가 아닌 구조도 마치 그런 것처럼 잘못 인식될 수 있으며, 사유재산 제도가 바로 그 사례다. 사유재산은 너무나 당연하게 주어진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그것이 자유에 가하는 장애물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반면 사유재산 자체가 조금이라도 침해되면 그것은 즉각 눈에 띈다. 그러나 사유재산은 다른 권리 체계와 마찬가지로 자유와 부자유를 분배하는 특정한 방식이다. 사유재산은 필연적으로 사유재산 소유자가 자신의 소유물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자유와 연결되지만, 동시에 비소유자들의 자유를 제한하기도 한다. 자본주의를 자유의 영역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자본주의 본질의 절반을 간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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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설명하고 해명하려고 했던 인식의 오류 경향이 다른 조건이 동일할 때 사유재산이 많을수록 더 강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말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제가 강조하는 이 단순한 개념적 진실을 굳이 깨닫게 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다. 또한, 일단 이 점이 지적되면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누구도 오랫동안 사유재산이 자유를 제한하기도 한다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놀라운 점은 플루의 '자유지상주의' 정의와 같이 명백히 부조리한 주장들에 맞서 이 점을 너무나 자주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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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들이[8]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자유에 대한 제약이 전혀 없거나, 있어도 최소한에 불과하다고 믿을 수 있는 방식에 대해서는, 앞의 설명과는 독립적이면서 개념적으로 더 미묘한 또 하나의 설명이 있다. 이제 나는 그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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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설명의 이 부분은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적 인식보다는 자유지상주의적 이데올로기적 인식에 더 직접적으로 적용된다. 자유주의에도 적용되기는 하지만, 그 경로가 너무 복잡하여 여기서 설명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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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내가 지금까지, 어떤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바로 그 점에서 그 사람을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전제해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 행동에 간섭할 때마다 나는 그만큼(pro tanto) 부자유하다. 내가 그 행동을 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 그리고 나를 방해하는 사람이 나에게 간섭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자유지상주의 문헌 상당수의 바탕에는 이와는 다른 자유의 정의가 깔려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간섭은 부자유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이 정의를 ‘자유에 대한 권리적 정의(rights definition of freedom)’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나는 오직 누군가가 내가 할 권리가 있는 일을 하지 못하게 막을 때에만 부자유하다. 따라서 나를 막는 그 사람에게는 내가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을 권리가 없어야 한다.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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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의 행동은 한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기회들에 제한을 가한다. 그 결과 그 사람의 행동이 비자발적인 것이 되는지는, 그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이 한 것처럼 행동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달려 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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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Anarchy, State, and Utopia』, 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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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러한 자유에 대한 권리적 정의를 사유재산에 대한 도덕적 승인, 즉 일반적인 경우 사람들이 법적으로 소유한 재산에 대해 도덕적 권리를 가진다는 주장과 결합해 보자. 그러면 정당한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누구의 자유도 제한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유재산을 도덕적으로 승인한다면, 당신과 경찰이 내가 당신의 땅에 텐트를 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정당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권리적 정의를 받아들이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과 경찰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지적인 철학자들이 자본주의, 사유재산, 자유에 관해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 설명에서 사용되는 자유의 개념은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개념에 따르면, 적법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살인범이 정당하게 감옥에 수감되더라도 부자유하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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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화된 간섭이라 하더라도 자유를 감소시킨다. 하지만 잠시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말하거나 암시하는 대로, 정당화된 간섭은 자유를 감소시키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 가정 아래에서는, 사유재산에 대한 간섭이 자유를 감소시키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별다른 논증 없이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제는, 자유에 대한 규범적으로 중립적인(normatively neutral) 설명에서는 자명한 사실, 즉 사유재산에 대한 간섭이 자유를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권리의 관점에서 정의한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사유재산에 대해 도덕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먼저 입증하기 전까지는, 사유재산에 대한 간섭이 자유를 감소시킨다는 주장을 유보해야 한다. 그런데 자유지상주의자들은 한편으로는 자유에 대한 권리적 정의를 사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의 사유재산에 간섭하면 그 소유자의 자유가 감소한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당연한 사실로 여길 수 있는 것은 자유에 대한 규범적으로 중립적인 설명을 채택할 때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규범적으로 중립적인 설명에 따르면,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것 역시 비소유자의 자유를 감소시킨다는 사실이 똑같이 명백해진다. 그리고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애초에 자유에 대한 권리적 정의를 채택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결론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자유의 정의 사이를 이리저리 오간다. 그것은 어느 정의가 더 마음에 드는지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실제로는 유지할 수 없는 입장을 지키고 싶어 하는 욕구에 떠밀려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의 사유재산 사용에 대한 간섭은, 명백히 자유를 축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반면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비소유자의 자유를 똑같은 방식으로 축소하지 않는 이유는, 소유자는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재산에서 배제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비소유자는 그 재산을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이 모든 주장을 동시에 하려면, 결국 자유를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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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hen, G. A. 1979. "Capitalism, Freedom, and the Proletariat." In his On the Currency of Egalitarian Justice and Other Essays in Political Philosophy. pp. 149-154.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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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노직에 대한 G. A. 코헨의 대표적인 비판으로, 노직이 ‘강제’와 ‘자발성’을 판단할 때 정당하게 소유한 재산권이 침해되는 경우에만 자유가 침해되고 강제가 발생한다고 보는 ‘도덕화된 자유(Moralized Freedom)’의 개념을 전제하기 때문에 노직과 자유지상주의의 논증이 결국 논증해야할, 재산권과 권리의 정당성을 미리 가정하는 순환논증에 빠진다고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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