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어 뺨 치는 한 페이지 짜리 논문입니다. 수식으로 뒤덮여있긴 하지만, 논리는 대략 다음과 같네요:
a가 b와 모호하게 동일하다고 해보자. b는 a와 모호하게 동일한 성질을 갖고 있다. a는 a와 확실하게 동일한 성질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a와 b는 라이프니츠의 법칙에 의해 동일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a와 b는 확실하게 동일하지 않다. a와 b는 모호하지 않게 동일하지 않다. 이는 모순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호성은 논리학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인식론을 언급하시다니 흥미롭네요. 사실 이 논문을 읽은 이유가 신뢰주의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서거든요 (일단 염두에 두는 건 골드만의 신뢰주의입니다.). 신뢰주의는 인지 과정 같은 것을 정당화의 기반이라고 보는데, 인지 과정은 아무래도 모호성의 문제에 도달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신뢰주의는 모호성을 받아들여야하는데, 에반스의 주장을 어떻게 잘 만지면 신뢰주의에게도 비슷한 반박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거든요. 물론 위에 말씀하신 masked man fallacy랑은 다른 얘기겠지만요.
지금 생각하는 건 epistemic status입니다. 두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해봐요. 이번에 새를 보는데, 한 명은 정당화가 되는 거리에서, 한 명은 모호한 정당화가 되는 거리에서 본다면, 이 둘은 동일한 epistemic status를 가질 수 있는가? 라는 거죠. 이렇게 되면 각 사람의 epistemic status 을 에반스의 a와 b로 두면 뭔가 반박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한 시간 전에 생각해낸 거라 명료하지도 않고 빈틈도 많겠지만, 일단 써놓을게요. 여기서 혹시라도 토론의 장이 열리면 그거대로 도움이 되고, 아니더라도 한 번 쓰면서 정리가 되니깐 도움이 되니깐요.
다시 말하면, 특정 물체에 대한 모호한 사실이 있으려면 모호한 동일성 statement가 있어야합니다. 하지만 모호한 동일성 statement는 논리학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특정 물체에 대한 모호한 사실이 있다고 할 수가 없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적어놓고 보니 이렇게 말하는 게
아름다운 논문이죠. De re vague identity는 모순이다! 이걸 동일자의 식별 불가능성으로부터 추론하는 과정이 그저 빛….
다만 에반스가 다루는 주제가 그다지 흥미로운 것 같지는 않아요. 정말 흥미로운 철학적 문제는 다음과 같은, 보다 약한 논제들이 성립할 수 있는지라고 생각해서요:
(Vague existence) ∃x∇∃y(x=y)
(De dicto vague identity) ∇∃x∃y(x=y)
제 입장은, ∇가 인식적 양상이나 그 외의 어떤 가능성의 계열을 각각의 정밀화(precisification)로 갖는 식으로 이론화될 경우 둘 모두 성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