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납의 "Empiricism, Semantics, and Ontology"를 읽다가

카르납 센세가 '언어 틀(linguistic framework)' 안/밖을 칼로 무 자르듯 나누어버렸다는 점만 제외하면, 저는 카르납 센세가 본질적으로는 옳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입장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훨씬 더 철저하게 개진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로서는 왜 오늘날 메타존재론 연구자들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간과하고서 덜 철저한 버전인 카르납의 철학에만 주목하는지 이해하기 힘드네요.

"From these questions we must distinguish the external question of the thing world itself. In contrast to the former questions [interal questions], this question is raised neither by the man in the street nor by scientists, but only by philosophers. Realists give an affirmative answer, subjective idealists a negative one, and the controversy goes on for centuries without ever being solved. And it cannot be solved because it is framed in a wrong way." (Rudolf Carnap, "Empiricism, Semantics, and Ontology", Meaning and Necessity, Second Editio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6, p. 207.)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우리는 사물 세계 자체에 대한 외적 질문을 구분해야 한다. 전자의 질문들[내적 질문들]과는 달리, 이 질문은 일반인들에 의해서나 과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지 않고, 오직 철학자들에 의해서만 제기된다. 실재론자들은 긍정적 대답을 제시하고, 주관적 관념론자들은 부정적 대답을 제시하며, 논쟁은 수 세기동안 해결되지 않고서 계속된다. 그런데 이 논쟁은 해결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논쟁이 잘못된 방식으로 틀 잡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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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제 생각에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비트겐슈타인 연구자 분들을 화나게 해서는 안돼!' 라는 염려 때문입니다. 아래 번역문에 올라온 인용구와도 맥락은 다르지만 의미는 거의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거의 자동적으로 그건 비트겐슈타인을 얕게 읽어서 생긴 오해라는 비판을 초래할 것임을 알았다. 잠자는 개가 누워 있게끔 그냥 조용히 지나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링크).

제 생각에 많은 학자들은 공부 과정에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한번쯤은

'나는 P라는 입장을 개진하려고 하고, 이런 입장의 선구자로는 A, B, .., 비트겐슈타인, ..., Z가 있다.'

라고 누가 말했을 때, 그 반론으로 비트겐슈타인 전문 학자가

<탐구> x절 및 y절, 전쟁일기, 유고 ..... 등등을 참조하였을 때, 비트겐슈타인이 P라는 입장을 띠고 있다고 보는 것은 합당치 않다.

같은 식으로 지적하는 것을 접하는 것 같습니다. 나아가 비트겐슈타인 해석에 있어서의 근본적 쟁점들에 대해서도 매우 다양한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또한 옆동네 사람 입장에서 대충 헤아릴 수 있구요.

그런 차원에서 비트겐슈타인을 섣불리 인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한 부담감이 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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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분명 그런 면도 있다고 생각해요. 영어권 철학계 내에서는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이 항상 분노에 차 있는(?), 성깔 더러운 문헌광 같은 이미지로 묘사되는 경향이 종종 있죠ㅋㅋㅋㅋㅋㅋㅠㅠㅠㅠㅠ 카르납은 논문 중간에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이야기하네요. 물론, 논리실증주의에 영향을 준 '전기 비트겐슈타인' 한정이긴 하지만요.

A brief historical remark may here be inserted. The non-cognitive character of the questions which we have called here external questions was recognized and emphasized by the Vienna Circle under the leadership of Moritz Schlick, the group from which the movement of logical empiricism originated. Influenced by ideas of Ludwig Wittgenstein, the Circle rejected both the thesis of the reality of the external world and the thesis of its irreality as pseudo-statements. (Rudolf Carnap, "Empiricism, Semantics, and Ontology", p.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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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연구자들이 비트겐슈타인 연구자와 정반대같아서 참 묘하네요. 편협한 제 시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입장(예를들어 프랑스철학에서 나오는 개념들)의 선구자로는 니체가 있다.

같은 주장을 니체 연구자들에게 들려주면 그런 주장들을 철학적으로 뜯어볼 생각은 안하고, "맞아요!! 역시 현대철학의 원조 우리 니체!!"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두 철학자의 입장을 분명하게 정리하고, 어떤 지점에서 차이가 나는지 명확하게 만드는것이 우선일텐데, 그것보다는 어떻게든 연결고리를 만들어서 니체의 위상 높이기에만 집중하는건 아닌가 싶어요. 물론 모든 연구자들이 그런건 분명 아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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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카르납의 관점은 후기 비트겐슈타인보다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물론 둘 사이의 연속성이 고려될 수 있겠지만) 훨씬 가깝게 보입니다. 가령, 제 생각에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분석 명제’같은 것이 있다는 입장에 회의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애당초 진술문이 다른 종류의 문장들과 특별히 구분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 같고요. 반면 카르납은 복수의 (임의 선택될 수 있는) 언어틀을 인정하면서도 그 틀에서 사소하게 참인 명제들(분석명제겠죠)과 그렇지 않은 명제들 (즉,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간의 구분이 명확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사실 콰인과 카르납을 갈라 주는 지점이겠고,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카르납보다는 콰인과 묶게 만드는 지점이겠죠. (방금 가입했는데 어쩌다보니 닉을 카르납으로 했네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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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 제 마지막 문장이 콰인과 비트겐슈타인이 일심동체라거나 하는 걸 의미한 것 아닙니다. 가령 콰인의 의미 회의론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회의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또, 비트겐슈타인과 (아마도) 달리 콰인은 특정한 (경험과학적) 개념틀이 다른 틀들에 비해 우위를 갖는다고 보았을 것도 같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른바 ‘말기’ 비트겐슈타인의 ‘돌쩌귀 명제’ 관점은 카르납의 관점과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갖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카르납은 다른 언어적 활동보다는 진술 내지 단언이 보다 ‘언어 틀’에 근본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할 것 같고, 모든 비경험적인 유의미한 명제는 분석적이고, 그렇지 않은 명제는 경험적이라고 보고 있으니 여기에서 근본적인 불일치가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적어도, 카르납이 경험적이라고 여겼을 여러 문장들을 돌쩌귀 명제로 취급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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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지적을 해주셨네요! 확실히, 어떤 기준으로 비교하는지에 따라 카르납, 비트겐슈타인, 콰인의 관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는 저 세 사람들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더 많이 강조하죠. 카르납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입장 차이는 유명하고, 비트겐슈타인과 콰인 사이의 관계에도 (말씀해주신 의미 회의론 문제를 비롯하여) 간격이 꽤 크죠.

다만, 제가 카르납과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유사하다고 본 건 두 가지 때문입니다.

(1) 저는 특정한 철학적 질문이 '사이비 문제(pseudo-problem)'인지 아닌지를 따져보는 태도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이라고 생각해요. 이 점에서, 카르납이 '외적 질문'을 사이비 문제로 취급한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정신을 일정 부분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2) 또 저는 실재에 대한 논쟁이 언어에 대한 논쟁과 분리될 수 없다는 생각도 비트겐슈타인의 사유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봐요. '언어 틀(linguistic framework)'을 전제하고서만 실재에 대해 유의미한 주장들이 가능할 수 있다는 카르납의 입장은, '언어 게임(language game)'이라는 맥락 속에서만 우리의 발화가 유의미할 수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과 근본적으로는 일치한다고 봐요.

물론, 잘 지적해주신 것처럼, 카르납 안에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이라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만한 요소들이 많이 있죠. 카르납은 (a) '언어 틀 안쪽'에서 제시되는 명제를 유의미한 명제로, '언어 틀 바깥쪽'에서 제시되는 명제를 무의미한 명제로 명확하게 나누죠. 더 나아가, (b) 유의미한 명제를 다시 '분석적' 명제와 '종합적' 명제로 구분하고요. 저는 이런 카르납의 입장에 대해

"그렇다면 카르납 당신이 '유의미/무의미'와 '분석/종합'을 구분하기 위해 제시하는 메타존재론적 명제들은 언어틀 안쪽/바깥쪽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가? 또한 분석/종합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가?"

라는 비판이 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다고 봐요. 바로 이 점이 카르납을 비롯한 논리실증주의의 결정적 한계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요. 제가 카르납에 비해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더 지지하는 이유는 바로 이 문제 때문이에요.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저렇게 명제들의 범주를 미리 구분해 놓은 상태에서 논의를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명제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니까요. 틀을 먼저 상정해 놓고 주어진 명제를 그 틀에 끼워 맞추는 게 아니라, 주어진 명제로부터 출발해서 그 명제가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되는 다양한 맥락을 고민해본다는 점에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카르납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철학을 전개한다고 생각해요. 이 점에서 저는 카르납이 비트겐슈타인과 매우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전략이 더 철저하다고 평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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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문에서도 생각했던 점입니다만, 비트겐슈타인이 ‘더 철저하다’라는 것이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미뤄두고서라도)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카르납의 것보다 메타존재론에서 더 옹호할 만하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카르납과 비트겐슈타인은 단지 정도의 차이를 갖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상이한 입장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2. 위에서 언급드린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의 ‘경첩 명제’ 개념은 어느 정도 카르납의 분석 명제와 유사성을 갖습니다. 이 점이 언뜻 언어 게임과 언어 틀을 유사한 것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언어 게임은 기본적으로 활동입니다. 특히, 제가 생각하기로 그것은 기호적 활동입니다. (의미론적 값이 먼저 있고 어떤 기호가 그것을 의미한다는 식의 관점을 비트겐슈타인은 받아들일 것 같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반면 카르납의 ‘언어적 체계’라는 데에는 단지 기호학적, 구문론적 요소뿐 아니라 의미론적 요소가 개입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경험적 검증이란 불가능할 테니 그렇습니다.)

  3.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사람에 대한 작가론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면에서 카르납의 발전형입니다. 카르납의 입장은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그것과 닮아 있고,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전기 입장에서의 발전형으로 생각될 만하니까요. 하지만 입장 자체로 보자면 둘의 입장은 상당히 상이하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한 다른 불일치: 분석 명제의 역할은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동어반복’과 더 유사합니다. 가령, 적어도 카르납에게는, 비트겐슈타인이 허용할 듯한, 언어적 틀의 느슨한 경계 따위가 고려될 수 없어 보입니다.)

  4. 한편 블록 인용에서 제시해 주신 비판은 카르납을 ‘발전시키는’ 부류의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콰인의 입장에서 제시될 만한, 카르납에 대한 거부 논거입니다. 그런데 이 논거가 그렇게까지 설득력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이 논거는 카르납적 주장이 정당성을 갖기 어렵고, 따라서 거짓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구조를 갖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i) '내적 질문과 외적 질문은 구별된다’가 참이라는 것과 (ii) ‘내적 질문과 외적 질문은 구별된다’를 정당히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다른 문제입니다. (ii)가 성립하지 않더라도 (i)을 근본적 사실로 따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콰인주의자가 여기에서의 거부 논거를 바탕으로 (i)마저 거부해야만 ‘보다 철저한’ 발전된 입장이라고 주장할 권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5. 결론짓자면 이런 말입니다. 만일 혹자가 카르납주의자라면, 굳이 비트겐슈타인의 ‘게임’ 개념을 개념 틀에 대한 해명을 위해 사용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한편, 혹자가 비트겐슈타인적 방식으로 개념 체계를 이해하고, 나아가 이를 통해 메타존재론 입장을 개진하려 한다면, 그의 입장은 카르납적 입장이라고 말해지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6. 나아가, 비트겐슈타인적 메타존재론이라는 것이 어떤 형태일지 잘 감이 안 오기도 합니다. 제가 유일하게 발견한 유의미한 문서는 다음의 위키 문서인데: https://en.citizendium.org/wiki/Meta-ontology/, 실제로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이와 유사한 입장을 견지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입장은 콰인-카르납 논쟁의 어느 편에 있다기보다는 ‘존재하다’라는 낱말이 다양한 쓰임을 갖는다는, 일종의 존재론적 다원주의에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아시듯, 실제로 진리 다원주의에서는 비트겐슈타인적 관점을 많이 취하는데, 이와 유사한 유인은 있어 보입니다.) 다만 저는 존재론적 다원주의는 그렇게 의미 있는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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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카르납과 비트겐슈타인의 상이성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이번 학기에 제가 메타존재론 수업을 듣고 있는데, 여기서 주로 다루어지는 문제가 콰인주의적 메타존재론과 신카르납주의적 메타존재론(일라이 허쉬) 사이의 대결입니다. 저로서는 아직 둘 중 어느 입장에도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려워서, 제가 기본적으로 지지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바탕으로 간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말하자면, 콰인과 카르납 사이에 있는 거죠. (개인적으로, 저는 맥다니엘이나 에클룬드의 존재론적 다원주의가 꽤 의미 있는 입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직 제가 읽은 내용이 많이 없어서 존재론적 다원주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 논증을 펼치기는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