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제 9장: 앎이란 무엇인가? (1)

제 9장 본원으로 돌아가다: 앎이란 무엇인가?

0. 역사지평


“어떤 작은 한 조각의 진리를 포착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분투해온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일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즐겨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이상 아름다운 보상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친절한 말들에 대해 정말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기에 오직 간단한 한마디만을 적는 것으로 만족해야겠군요. 경험적 바탕이 없이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깊이 뚫고 들어갈수록 그리고 우리의 이론이 더 광범위하고 포괄적이 될수록, 이러한 이론들을 결정함에 요구되는 경험적 지식의 분량은 줄어들게 됩니다.”

위 인용글은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생을 마치기 3년 전 73세에 철학과 대학생에게 보낸 답장이다. 당시에 그 열정적인 철학과 대학생은 아인슈타인에게 편지를 쓰며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아인슈타인을 깊이 흠모해왔으며, 그에 관한 모든 것이 자신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무엇이라도 좋으니 앎을 추구하는 다음 세대에게 꼭 남기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면 적어서 보내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한 것이었다. 그에 관한 짧은 답장이 바로 위 인용글인 것이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학문을 추구하는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을 짧고 간결하게 잘 요약해주고 있다. 첫째, 모든 진리가 결국은 경험적 바탕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다.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체계는 결국엔 겉모양만 그럴 듯하고 속은 부실한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둘째는 학문이 깊어질수록 학문 자체의 논리 구조에 따라 앎에 필요한 경험적 지식의 분량은 최소한도로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즉, 진정 학문다운 학문을 하려 한다면 경험적 단편에만 머무르지 말고 조금 더 심원한 사고의 체계를 펼쳐나가라 는 이야기를 위 두 원칙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해왕성의 위치를 성공적으로 예측해낸 르베리에(Le Verrier, 1811-1877)나 최근에 블랙홀 예측 공헌으로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한 저명한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 (Roger Penrose, 1931-) 가 이에 대한 적절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에는 커다란 전제가 깔려 있다. 외부세계에는 우리의 경험과는 독립적인 실재가 존재하고 그 실재와 ‘심원한 사고’의 내용들이 그대로 대응하리라는 전제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해서 이론과 세계의 놀라운 일치를 거듭 실감하면서 이러한 ‘과학적 실재론(Scientific Realism)’ 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 틀림없다. 물론 인간의 사고와 자연의 실재 사이의 이러한 관계가 생각만큼 간단하지는 않다. 특히 양자역학이 등장으로 인해 혼란한 시기에 ‘실재성(reality)’ 과 관련된 통찰이 심각하게 요청되었다. 한창 이러한 실재성과 관련해서 양자역학의 해석 논쟁의 중심에 서 있던 아인슈타인은 1936년에 <물리학과 실재>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실재 외부 세계’를 설정하는 첫 단계가 바로 물체(bodily object) 개념의 형성에 있다고 믿는다. ··· 수많은 감각경험 가운데서 우리는 일정하게 반복되는 감각인상 군(群)을 임의롭게 선택해 이들을 하나의 개념—곧 물체 개념에 연결시킨다. 논리적으로 보면 이 개념은 이와 연결시킨 감각인상들의 총체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인간 (또는 동물) 마음의 자유로운 창조물이다. 그러면서도 이 개념은 그 의미에서나 그 정당성에 있어서 우리가 이것과 연관시킨 감각인상들의 총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실재 외부 세계’를 설정하는 첫 단계가 감각인상에 바탕을 둔 물체 개념의 형성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둘째 단계로, 이렇게 마련된 물체 개념에 대해 이것의 기원이 된 감각인상들과는 독립적으로,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이로 인해 물체가 실재로서의 자격을 얻게 된다고 본다. 그는 이렇게 만들어진 정신의 창조물은 개별적인 감각경험들보다도 견고하면서도 강력한 성격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그러면서도 아인슈타인은 과학적 논리의 틀 안에서 앎에 대해 다루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우리의 감각경험들과 일상적 사고 안에 나타나는 초보적 개념 사이의 관계 또한 오직 직관적으로만 파악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는 곧 과학 이론이 그 자체만으로는 완결될 수 없고 반드시 이러한 관계를 불가피하게 전제해야만 과학이 가능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그의 명언 “세계의 영원한 신비는 이것이 이해된다는 것이다”가 나온다. 과연 그럴까? 앎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저 ‘영원한 신비’로 남겨두는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아인슈타인의 태도는 상당히 아쉽기만 하다.

또 한 가지 의아한 점은, 양자역학의 해석 문제와 관련되어 보이는 일견 모순적인 부분이다. 그가 분명히 지적한 대로 ‘실제 외부 세계’와 ‘실재’라는 것이 ‘감각인상’에 바탕을 두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 사고의 창조물’일 뿐이며, 실제로 ‘저 밖에 있는 무엇’과 일치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자신이 명백하게 말해놓고도 양자역학이 ‘실재’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는 점을 들어서 끝끝내 불신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실재’란 무엇이며 ‘앎’이란 무엇일까? 그것들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걸출한 일급 물리학자들도 이렇게까지 힘겨워했던 것일까?

  • [세미나녹취 2020.11.19] 제9장.앎이란 무엇인가 (1) - 녹색아카데미
    녹색 아카데미에서 격주로 목요일 저녁 8시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책을 주제로 온라인 ZOOM 세미나를 진행합니다. 위 링크는 지난 세미나의 녹취 자료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참고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목요일에는 제가 9장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발제를 하기도 하니 '앎이란 무엇인가?'라거나 인식론의 문제라거나 양자역학의 서울 해석 문제 등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p.s. 발표 도중에 장회익 선생님의 흥미로운 말씀
"‘슈타인형’이라고 해서 난 처음에 무슨 얘긴지 몰랐다. 아인슈타인을 형님이라고 보겠다는 건데. 그런데 족보로 따지면 형님이 아니라 고조할아버지라고 해야한다. 나는 아인슈타인을 증조할아버지라고 해야 맞다. 내 지도교수는 아인슈타인의 손자이고, 내 지도교수의 지도교수는 아인슈타인과 가장 가까운 아들인 셈이다. 그래서 학계의 족보상 내가 아인슈타인의 증손자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지금 나한테 배우고 있으니까 세대를 더 내려가서 아인슈타인이 고조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요즘은 그런 거 없이 다 형, 아우 하니까 아무 상관은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아인슈타인의 학문 계보의 직계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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