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열,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5장, 「샌델 이론의 실체」 (2)

3.무지의장막: 공정한 원칙의 합의와 비판적 재검토 앞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가지고있는것은 없다는 것을 의미할뿐이다. 유령같은 자아를 전제하지 않는다

샌델은 롤즈의 '무지의 장막'에 주목하여 추상적 개인주의를 공격한다.
'무지의 장막'은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기 위한 사고실험으로 ,
사람들은 자신의 성별, 인종, 종교등을 모른채 원칙을 합의한다.
그러나 샌델은 인간은 우리 자신의 삶을 소속과 목적들로 이해하는 구체적인 존재들이라고 주장한다.
자유주의는 무지의 장막에서 자아와 정체성이 분리될수있는 유령같은 자아를 전제하므로,
자유주의의 인간관은 틀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우리가 흔히하는 도덕추론의 방식에 대한 직관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며, 정체성과 목적들로부터 벗어나는 자아를 전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1

저자는 롤즈와 같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인 스캔론이 설명하는 예를 가져온다.

농민들과 지주가 물에 대한 권리를 협상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지주가문은 힘이 쎄기때문에 지주의 할아버지, 아버지 대부터 물을 온전히 통제해왔다.
여기서 수자원에 대한 합당한 분배원칙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두에게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지주가문의 권력이나 역사 등은 중요하지않다.
물론 지주는 힘이쎄기때문에 물을 양보하지않는것이 '합리적'일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양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행동은 아니다.

여기서 지주는 반박한다.
'자아는 정체성을 포함한다.
마을의 역사를 빼놓은 원칙, 사람들의 정체성을 빼놓은원칙은 비현실적 자아를 전제하는것이다.'
저자는 이것이 엉터리라고 지적한다.
가족 등등의 정체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다양한 사람들이 합의할수있는 원칙을 만든다는것이다.
특정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자신만이 도덕적 진리에 더 가깝다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특정 정체성에 유리한 지위를 허용하지 않는것은 종교나 가치관도 마찬가지다.

협동원칙의 합의뿐만이 아니라, 좋은삶을 위한 비판적 검토에서도 그렇다.
비판적 검토에서 면제될 수 있는것은 없다. 따라서 종교나가치관에 특권적 지위를 줄수 없다.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일수록 우리는 판단에 앞서 자유로운 숙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샌델의 주장과 달리,
이것은 가치관이 인간의 삶에 중요하지않다는게 아니라 오히려 진지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추상적 개인주의와 정체성이 없는 자아를 전제하지않는다.

회사생활에 지친 회사원은 언제든 귀농하는삶을 상상할수있다.
도시생활과 그곳의 인관관계가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삶에 대한 재검토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현상이다.
따라서 이런사고실험을 위해 유령같은 자아를 전제할 필요는 없다.
롤즈가 말하는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은,
자아가 어떤 좋음도 가지고있지않다는것이아니라,
어떤 목적도 재검토가 가능하다는것일뿐이다.

저자는 윌 킴리카의 논변을 소개한다.

''재검토가 의미있게 수행되려면 나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과는 상이한 동기와 연고를 맺고 있는 자아를 상상할 수 있어야만 한다.
... 나의 자아는 이런 의미에서 그 목적에 우선하여 인식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떠한 목적과도 전적으로 연고가 없는 자아를 인식할 수 있음
을 요구하지 않는다. 윤리적 추론 과정은 언제나 하나의 '연고적인' 잠재적 자아와 이와는 다른 '연고적인' 잠재적 자아를 비교하는 과정이다.''2

ㅡㅡ평등적 자유주의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ㅡㅡ

1.샌델의 공동선은 '공동의' 선이 아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인간이 공동체의 가치와 전통을 존중해야한다고 말한다.
자아는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샌델은 이것이, 지배적 문화를 무조건 강제한다는 주장은 아니라고 변호한다.
우리는 언제나 공동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논의를 거쳐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샌델의 이론에서 문제점이 여전하다고 지적한다.
공동체가 민주적 토론을 거치던 거치지않던,
공동체가 개인의 자기결정권,좋은삶의 판단을 찬탈하는것은 마찬가지다.
꼭 샌델의 방식만이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동선을 얼마든지 이야기하면서 자기결정권 또한 지킬수있다.

시민들의 인권, 자유주의적 정의, 경제적 번영, 깨끗한 환경, 교육과 평등한 기회등등은
시민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있냐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좋다.
그것은 자신의 가치관을 원활하게 추구하기 위한 필수적 여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샌델이 말하는 공동선은 국가가 공동의 생활방식을 논의하고 규정하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이것이 공동의 선이라기보다 권력자들의 억압에 대한 욕구의 표현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ㅡ샌델의 역사관의 문제

공동선에 대한 샌델의 잘못된 견해는, 그의 역사관을 편협한 이분법에 가깝게 만든다.
저자는 샌델의 역사관과 달리,
실제 역사는 단순히 '공동체적 미덕의 고양'과
'개인적이고 중립적인 권리의 보호' 사이의 긴장으로는 온전히 설명될수없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정치학자 메리 셰인리의 논변을 소개한다.
그녀는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동녘)을 비판한다.

1950년대 남부의 백인들은, 민권운동의 정신이 '남부의 미덕'을 파괴한다고 반대했다.
여성투표권과 여성해방운동의 반대자들은,
그런 권리를 인정해주면 가정의 통합성이 파괴될것이라고 반대했다.
그러한 통합성이 애초에 당사자들의 노동권리와 법적인격을 무시한 결과라는 사실은 무시됬다.
셰인리는 따라서 공동체는,
겉보기처럼 통합된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집단과 억압하는 집단 간의 권력관계가 은폐된것일수있으며,
이때 권리는 체계적인 종속관계를 인식하는 열쇠가 될수있다고 주장한다.

''샌델은 특히 노동조합운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하지않는다.
샌델은 로크너 판결을 언급하면서 마치 미국 사회가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계급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인 것처럼 논의를 진행한다......
샌델의 이야기는 공동체의 가치가 소수 집단의 정치적 목소리를
박탈 시켰던 순간을 무시함으로써 역사적 기록을 왜곡한 향수로 가득하다.
그것은 억압의 상공을 활공하며 억압을 희미하게 만드는 역사서술이다.''3

2. 자유주의에서 집단적 책임과 집단적 권리

샌델은 자유주의는 집단적 책임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는 오로지 개인들의 선택으로 도덕적의무를 결정하기떄문이다.
그들은 인간의 자아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목적과 애착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저자는 단순히 공동체의 소속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의무와 권리를 도출하는 방식으로는,
여전히 설명이 힘든 사실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개인에게 두 정체성이 충돌하는 경우를 설명하지 못하고
(예를 들어 미국인 인디언 장교의 경우),
타당하지 않은 집단적 권리와 타당한 집단적 권리를 명쾌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는 오히려 방향을 반대로 해서,
개인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지위로부터 공동체적 책임과 권리를 도출해내야한다.

우선 저자는 집단적 책임의 구조는,
개인들에게 돌아가는 이득과 부담의 공정한 배분이라는,
자유주의적이고 보편적인 원칙으로도 충분히 설명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갸상의 관현악단을 예로 들어보자.
이 관현악단은 뛰어난 연주로 평판이 자자하다.
그래서 이 악단에 새로 들어온 연주자들은 명성도 얻고 수입도 높아진다.
그런데 어느날, 이 악단이 사실 10년전 경쟁 악단을 비겁하게 제거해 버린 사실이 드러났다.
이 단원은 개인에 불과하며 집단의 과거사가 자신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단원이 관현악단의 역사와 평판의 구조로부터 이득을 얻어왔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합당하다.
잘못된 역사에서 비롯된 이득은 누려왔으면서 부담은 회피한다는 것은 기회주의적인 태도이다.

소수집단이 사회에 요구할수있는 자치권(공동체적 권리) 또한 개인들 간의 평등한 자유로 해명할 수 있다.
저자는 캐나다 인디언 이누이트족을 예시로 드는 윌 킴리카의 논변을 소개한다.
국가구성원들이 완전히 동일한 가치의 물질적 자원을 가지고 있더라도,
소수문화는 보존되어야한다.
이누이트족의 아이는 소수문화가 없어진다면,
영국계 캐나다인들의 생활양식에 새롭게 적응해야하고,
소수민족들의 공동체속에서 추구하던 목표는 좌절당할 가능성이 높다.
이 사실은 소수 문화에 속하는 사람들이,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 비해 불평등한 자율성을 가지고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집단적 권리의 요구를 타당하게 만든다.

다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떤 소수 집단이 구성원들의 이탈을 처벌한다면,
그 구성원들은 집단 바깥의 다수보다 적은 자유를 갖게될것이다.
이는 불평등을 조장하는 것이므로 타당하지 않은 요구이다.

따라서 저자에 따르면 집단적 권리와 개인적 권리(또는 자유주의)가 대립한다는 설명은 엄밀하지 못하다.
개인의 권리주장은 사실 여러 집단 간의 은폐된 권력관계를 드러내는것일수있고,
자치권은 개인의 권리에 기초해서 해명될수있기 때문이다.

5장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샌델의 이론은 몇가지 한계가 있고,
그가 자유주의에 덧칠하는 얕은 이미지(왠지 공허한것같고.... 정도 없고...)
는 오해에 불과하다. 자유주의는 결코 가치상대주의나 추상적 개인주의가 아니다.
또한 샌델은 공동체와 개인 간의 관계를 단순화해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샌델의 자유주의 비판은 틀렸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직면하고있는 거대한 과업중 하나는, 권력 구조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보이게 하고
그들에게 목소리를 주는 것이다. 권리의 주장은 남용된 개인주의의 언어가 아니라, 권력을 공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리도록하는
매개체인 것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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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저자의 이 설명을 나는 '무지의 장막'이 우리가 흔히하는 추론이 어떤 전제들을 포함하고 있는지, 혹은 포함'해야하는지'에 대한 그림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도구라는 주장이라고 이해한다.
즉 추론의 '주체'가 어떠해야하는지는 전제하고 있지 않은것이다.
2.즉, 회사원이 귀농을 꿈꾼다고 해서,
그는 지금 회사생활과 귀농생활 양쪽 모두에서 자유로운 유령같은 자아를 상상할 필요가 없다.
그저 회사생활을 지속하는 미래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 귀농생활을 시작한 미래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 간의 장단점을 비교하면 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3.저자의 인용. mary lyndon shanley, ''review essay-liberalism and the future of the democracy,'' stanford law review, pp. 1271~1291
.로크너 판결은 뉴욕주에서 일어난 부당한 근로계약을 다툰 사건이라고 한다.
4.위의 책, pp. 1271~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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