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천아카데미 추계 강좌] 철학의 길, 제5강: 대륙철학(2)

1. 존재와 존재자는 동영상과 스틸 샷에 비유될 수 있을까요?

수강생: 존재하고 존재자를 지난번에 말씀하셨는데요. 존재는 망망대해고 존재자는 물거품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존재라는 것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동영상 같은 것이고, 존재자는 중간중간에 찍는 사진 같은 것인가요? 저희는 보통 ‘존재’라고 하면 정지된 것으로 생각하는데, 후설은 공시적으로만 존재를 이해했다고 하셨잖아요. 후설은 어느 순간 자체를 ‘사태 자체’로 보고자 하였는데, 하이데거는 계속 변화하는 존재를 더욱 중요시했다고 제가 이해해도 될까요?

이승종: 우선 앞부분에서 말씀하신 것… 존재는 동영상 같은 것이고 존재자는 동영상의 어느 한 단면을 뜻한다고 하신 말씀은 아주 탁월한 비유이고, 불교철학에서는 초기 아비달마 학파 중에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고 알려진 학파에서 그런 비유를 썼습니다. 석가모니의 존재론을 그런 비유를 통해서 설명했죠. 물론, 그 당시에는 영사기나 동영상이 없었기 때문에 정확히 그런 비유는 아니지만, 저는 설일체유부를 학생들과 공부하고 토론할 때 선생님께서 지금 쓰신 동영상의 비유를 즐겨 사용합니다. 흐름이 존재이고, 필름의 어느 단면이 존재자라는 것이죠.

분야는 다르지만, 물리학에서도 아인슈타인이 늘 말하지 않습니까? 시공간이라는 것이 하나의 큰 식빵 덩어리 같은 것이고, 그 중 어느 한 단면이 우리가 놓여 있는 시공간의 국지적 상태라는 표현을 쓰죠. 식빵으로 묘사된 시간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큰 흐름을 존재로 볼 수 있겠고, 식빵을 칼로 잘랐을 때의 단면이 그 안에 우리가 지금 놓여 있는 존재자로서의 운명이 되겠죠.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

선생님께서 후반부에 말씀하신, 후설의 공시성과 그의 제자 하이데거의 통시성도 눈부신 진단입니다. 후설은 하이데거와 달리 수학에서 출발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다루는 주제들을 보면 수학적인 프레임이 많이 나타납니다. 수학은 심지어 움직이는 운동도 미적분을 통해 정지된 하나하나의 계기들의 합으로 보잖아요. 이게 운동이라는 통시적인 과정을 수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여겨지죠. 즉, 운동조차도 정지된 가설적인 단면들의 합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게 수학의 기법이라고 생각되네요.

후설도 (물론 그가 『시간의식의 현상학』이라는 원고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시간에 대한 통찰을 전개했습니다. 그런데 그 통찰조차도 아주 수학적인 방식으로, 즉 공시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좀 아쉬움이죠. 그 유고를 편집한 사람이 하이데거이기도 합니다. 『시간의식의 현상학』은 후설이 썼고, 하이데거의 편집을 통해서 세상에 선보여지게 된 거죠.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하이데거가 후설의 『시간의식의 현상학』을 통해서 시간에 대한 자기 나름의 사유를 개척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저는 딱히 그렇게 보지는 않습니다. 시간에 대한 접근법 자체가 후설과 하이데거는 너무나도 달랐고, 저는 하이데거의 통시적인 접근이 시간에 대한 보다 더 본래적인 접근이라고 감히 평가해 봅니다.

2. 디자인과 다자인

이승종: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존재자에게는 사람이건 아니건 ‘현존재(Dasein)’라는 용어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미래의 어떤 인공지능이 자기의 존재를 문제 삼을 수 있다면, 그 인공지능의 존재는 현존재인 셈입니다.

그래서 제가 쓴 인공지능에 관한 논문의 소제목이 ‘디자인 vs. 다자인’입니다. 현재의 인공지능은 사람이 디자인(design)한대로 움직이지만, 자기의 존재를 문제삼는 인공지능이 있다면, 그는 다자인(Dasein)이겠죠. 디자인이 아니라요. 용어도 비슷하고 뉘앙스도 비슷한 것 같아서, 제가 논문을 쓰면서 표제어로 디자인과 다자인을 골라서 비교해봤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입력해 준 대로 움직이는 인공지능과 자기 스스로 ‘나는 누구지?’하고 존재물음을 던지는 인공지능은 차원이 다른 거죠. 두 번째 인공지능은 (그리고 오직 그만이) 사람과 진정으로 대화할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현존재가 곧 사람이라는 등식은 사실 엄밀히 말해서 하이데거에게서는 성립할 수 없겠습니다. 왜냐하면 일종의 범주 오류거든요. ‘현존재’는 사람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인데, 사람은 존재자이니까요. 제가 하이데거 수업 시간에 존재와 존재자가 다르다는 것을 굉장히 공들여서 여러분께 설명드렸죠. 그래서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를 망각했다는 점에서 ‘현존재 = 사람’이라는 등식은 사실 내다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공식은 (즉, ‘현존재 = 사람’이라는 내다 버려야 하는 공식은) 하이데거를 논할 때 사실 편의상 널리 통용되는 것이 또 현실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생경한 하이데거의 전문 용어를 초장부터 저렇게 세세하게 차이와 뉘앙스를 살려 가면서 설명하면 청중들이 다 떠나버리거나 온 독자가 책을 덮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현존재는 그냥 사람이라고 양해를 구한 상태로 말하기는 하지만, 하이데거의 원래 마음은 ‘현존재’로 (사람이 아니라) 존재 물음을 던질 줄 아는 그 존재의 운동성을 가리켰다는 것을 여러분이 양지하시면 좋겠습니다.

3. 언어는 존재의 인터페이스이다.

이승종: 두 번째 질문은 종원 님께서 던진 질문인데, “언어는 하이데거의 입장에서 볼 때 존재자인가 아니면 존재인가? 언어를 구성하는 표현들과 낱말들은 존재자인가 존재인가?”라는 질문이네요. 여기에 대해서는 하이데거가 스스로 한 명쾌한 답이 있습니다. 「휴머니즘에 대한 서간」이라는 작품에 나와 있는 간명한 말인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입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언어를 통해서 존재가 존재자를 주기도 하고 거두기도 한다는 겁니다.

저는 ‘집’이라는 표현에 덧대서 ‘인터페이스(interface)’라는 말을 써보겠습니다. 언어는 존재를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인터페이스라고요. 즉, 인터페이스라는 건… 우리가 컴퓨터를 켜면 여러 아이콘들이 뜨고, 그 아이콘들을 클릭하면 우리가 원하는 어플리케이션으로 인도되겠죠? 예를 들어, 유튜브 아이콘을 클릭하면 유튜브로 인도되는 것처럼요. 거꾸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인터페이스에서 우리가 마우스로 유튜브 아이콘을 클릭하면, 유튜브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드러나고 물러서는 과정의 중간 역(station)에 해당하는 인터페이스가 언어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존재자를 불러내고 존재자를 간직하는 작용을 하는 거죠. 언어가 그런 점에서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이 상당히 유익한 답변입니다.

4. 하이데거는 잡담에나 어울리는 사유가인가?

이승종: 제가 처음 하이데거를 읽었을 때는, 스타일이나 흐름이 너무 낯설고 생경해서 좀 어리둥절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제게 처음에 강한 임팩트로 다가온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어리둥절한 끝에, 제 나름대로 내렸던 엉성한 결론은,

“하이데거는 그냥 작업을 걸 때 쓰는 용어들을 사용하는 철학자 같다. ‘불안’, ‘무’, ‘존재’ 같은 별로 학문적이지 않은 용어들을 사용하는, 그냥 잡담에나 어울리는 사유가이지, 아카데미에서 진지한 철학을 편 사람 같지는 않다.”

이렇게 쉽게 생각했죠. 제 학부 졸업 시험 주제가 하이데거였는데, 그 당시만 해도 그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제가….


조가경

그런데 유학을 가서, 하이데거의 총애하는 두 제자인 칼 뢰비트와 한스게오르크 가다머에게 사사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철학자 조가경 교수님의 하이데거 수업을 들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하이데거가 엄청나게 깊이를 지닌 진정한 사유가라는 것을 조가경 교수님의 수업을 통해 제가 깨닫게 되었는데….

저는 그러면서도 하이데거의 낯선, 그리고 그만의 고유한 철학을, 그 시대 현대철학의 주류 흐름과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을 지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선행작업이 있어야 하이데거에 대한 평가가 주관에 치우치지 않은 객관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철학의 길 5강(1) : 대륙철학

00:00-00:48 들어가는 말
00:49-32:18 대륙철학 배우기와 짓기
32:19-41:55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하이데거는 사람을 왜 ‘현존재’라고 부르나요?
41:56-47:59 하이데거의 ‘고고학적 언어철학’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48:00-54:59 Vincent van Gogh, Le Semeur
55:00-57:25 Recomposed by Max Richter: Vivaldi, The Four Seasons
57:26-1:07:05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Dasein’에서 ‘da’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1:07:06-1:12:03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존재와 존재자는 동영상과 스틸 샷에 비유될 수 있을까요?

철학의 길 5강(2) : 대륙철학

00:00-1:55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고흐의 그림을 어떻게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를 통해 이해할 수 있을까요?
1:56-4:03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언어는 존재인가요 존재자인가요?
4:04-8:35 하이데거의 사유를 철학의 여러 가지 주제와 분야 중에서도 언어철학의 맥락에서 고찰하신 이유가 있나요?
8:36-11:27 하이데거의 언어철학이 ‘고고학적’ 혹은 ‘역사적’ 의미지평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11:28-20:29 지시적 의미론과 수리논리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이 비트겐슈타인의 비판과는 구별되는 독창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나요?
20:30-25:48 ‘분석적 해석학’이란 무엇인가요?
25:49-29:21 분석철학과 대륙철학 사이의 ‘크로스오버’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자연적 현상(사실)인가요, 아니면 일어나야만 하는 이념적 현상(당위)인가요?
29:22-30:59 분석철학과 대륙철학 사이의 크로스오버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은 무엇인가요?
31:00-35:45 분석철학과 대륙철학 사이의 크로스오버를 잘 수행하고 있는 철학자들 중에는 누가 있을까요?
35:46-39:33 하이데거의 기술철학은 현실과 너무 괴리되어 있지 않나요?
39:34-40:46 ‘실천을 위한 방안’이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달라고 철학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일일까요?
40:47-42:31 하이데거의 사유가 현실의 문제에 대해 실천철학적 함의를 지닐 수 있을까요?
42:32-45:22 하이데거의 사유뿐만 아니라 대륙철학 일반이 사실 현실의 사회-정치적 이슈에 대한 고민에서 그다지 효용이 없지 않나요?
45:23-48:32 철학과 삶은 어떤 연관을 맺고 있을까요?
48:33-51:10 하이데거의 철학은 하이데거의 나치 부역에 영향을 주었을까요?
51:11-53:50 하이데거가 ‘비열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하이데거가 ‘위대한 철학자’였다는 평가에 영향을 줄까요?
53:51-54:45 철학이 좋은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54:46-56:05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공시성’과 ‘통시성’이라는 용어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56:06-59:25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하이데거의 어원 분석은 과거를 너무 낭만화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59:26-1:05:05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하이데거와 화엄 사상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 철학의 길 5강(1) : 대륙철학 2

# 철학의 길 5강(2) : 대륙철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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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가 작업을 걸 때 인용되는 철학자라 ㅋㅋ
사르트르 얘기하면 멋있게 보는 풍조랑 연관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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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철학을 전공하는 지인이 하이데거는 훌륭한 통찰을 보여주지만 칸트나 헤겔, 후설 수준의 거대한 체계를 지니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에게도 하이데거의 철학은 저들과 지향점이 조금 다르다는 인상이 있는데 혹시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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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블로그에도 소개하신 연대 온라인 교육 플랫폼 LearnUS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정말 잘 보고 있습니다. 이승종 교수님은 예전 <교수신문>에도 실린 김형효 명예교수와의 논쟁을 통해 처음 접했는데 정말 보기 드문 놀라운 토론이었습니다. 이승종 교수도 철학의 길에서 대학교수들의 토론이 활발히 진행되지 못하는 데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야기하셨는데 동감합니다.
동서양과 유럽-영미 철학을 아우르는 사유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한중일 동양철학의 극복해야 할 문제점과 발굴해야 할 사유들. 훗설과 하이데거, 하이데거의 학자로서의 평가와 인간으로서의 평가,들뢰즈와 데리다 등의 사유를 유사성과 차이를 통해 비교해 보는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단순히 유사성만으로 각 철학자들을 단순히 언급하고 그치는데 비해 차이점까지 분명히 이야기하며 폭넓은 사유를 펼치는 것을 보고 정말 우리 시대 없어서는 안 될 진짜 학자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이번 성천아카데미 강좌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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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저는 하이데거야말로 20세기 철학에서 누구보다 거대한 사유를 제시한 사상가라고 생각해요.

가령, 하이데거의 전기철학을 대표하는 작품인 『존재와 시간』은 본래 2부로 계획되어 있었잖아요. 1부에서는 현존재분석론을 중심으로 존재의 의미가 '시간성(Zeitlichkeit)'이라는 점을 밝히려 했고, 2부에서는 그렇게 분석된 시간성 개념을 '존재시성(Temporalität)'으로 확장하여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 전체를 해체하는 작업을 수행하려 했죠. 물론, 실제 이 작품은 1부 2편까지만 출판된 미완성작이지만, 사실 우리는 『현상학의 근본 문제들』이나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등을 통해 하이데거가 이후에 어떤 작업을 기획하였는지를 꽤나 세세하게 확인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볼 때, 하이데거 전기철학은 '시간'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현존재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로부터 서양 형이상학 전체로 나아가는 대단히 야심찬 체계 기획이라는 것이 밝혀지죠.

후기철학도 비슷해요. 비록 후기철학에서는 『존재와 시간』처럼 단권의 책으로 된 대표적인 작품을 골라내는 힘들지만, 하이데거의 다양한 텍스트들이 단순히 파편적으로 떨어져 있지만은 않거든요. 오히려 그 텍스트들은 서로 얽혀서 거대한 체계를 구성하고 있죠. 특별히, '사건(Ereignis, 생기)'이라는 개념과 '진리(Wahrheit)'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예술 작품에 대한 사유, 언어에 대한 사유, 기술에 대한 사유, 철학의 역사에 대한 사유가 관통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죠. 한 철학자가 이렇게나 다양한 주제에 광범위하면서도 참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요. 하이데거 이후에 사르트르, 가다머, 푸코, 데리다 등 수많은 철학자들이 하이데거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도 확인되듯이, 하이데거의 사유는 현대철학의 그 누구보다도 폭넓은 범위를 다룬다고 할 수 있어요. 실존에 대한 고민, 과학주의와 기술 문명에 대한 비판, 근대적 주체성에 대한 성찰, 형이상학에 대한 해체 작업이 모두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부터 체계적으로 뻗어나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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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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