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천아카데미 추계 강좌] 철학의 길, 제4강: 대륙철학(1)

1. 고통이란 C-섬유 자극일 뿐인가?

이승종: 지금 해주신 선생님들의 말씀에 동의하지만… 거기에도 제가 보기에는 과학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이 느끼는 고통 말입니다. 심지어 석가모니는 모든 게 다 고통이라고 하셨죠.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요. “고통이 뭔데?”라고 하면, 신경생리학에서는 간단히 정의합니다. C-섬유 자극이라고요. 우리 뇌의 C-섬유에 해당하는 부분에 경련이 일어날 때 고통이 일어난다고요.

틀린 말은 아닌데, 석가모니의 고통에 대한 사유와는 결이 좀 다르죠. 일체개고에서 ‘고통’이라는 말은, 양이나 국지화된 장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질을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너무 쉽게 그냥 지워져버립니다. 그래서 고통은 C-섬유 자극이 되어버리죠. 뇌를 연구하면 인간에 관한 모든 감정과 지성의 문제가 해결되고… 인문학은 그냥 헛짓거리?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그렇지 않죠? 인문학과 과학의 발달은 서로 같이 가야하고, 상보적인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데, 너무 과학이 앞서나가서, 모든 것이 과학에 의해서 척척 설명되는 것처럼 루머를 퍼트리는 게 과학주의의 그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두 분 선생님께서 그러 루머를 퍼트리셨다는 게 아니라… 저는 거기서도 그런 위험성을 캐치하는 겁니다.

제가 연세대학에서 이공계 교수님들하고 같이 공동연구를 하다 보면, 그런 걸 많이 느껴요. 제가 앞에서 대놓고 (저의 선배들인데) 그런 아쉬움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이분들 역시 인문학에 대한 이해의 여지가 별로 많지 않으시구나.’하죠. 본인들이 하시는 작업에 대한 확신(제가 보기에는 과신)이 너무 지나쳐서, ‘이걸로 다 끝낼 수 있다.’라는 생각에 쉽게 빠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 인문학은 어떻게 죽는가?

이승종: 제가 유튜브에서 하이데거의 생전 인터뷰 동영상을 보았는데, 하이데거의 서재에서 이루어진 인터뷰였던 것 같습니다. 갑자기 하이데거가 서재에서 시집을 한 권 꺼내더니, (그 시인이 아마 그릴파르처(Franz Seraphicus Grillparzer)였던 것 같은데,) 몇 페이지를 찾더니 이런 시 구절을 읽어주시더군요. 하이데거가, 다른 분이 아니라 마르틴 하이데거가요! 그 시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인문학은 어떻게 죽는가? 과학을 닮아갈 때, 인문학은 죽는다.”

과학으로부터 배우며 서로 소통하는 것과, 그냥 과학을 수용해서 따라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하이데거가 꺼내서 우리에게 들려준 시의 저자는, 인문학은 과학을 흉내내다가 고사하게 된다고 하는데… 하이데거가 그런 충격적인 구절을 읽어주던데, 상당히 제게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마르틴 하이데거

3. 존재와 존재자란?

윤유석: 더 직접적인 질문들을 드리고 싶은데… 하이데거가 흔히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기로는, 존재론의 영역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긴 철학자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사실 존재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또 어떤 걸 다루는 분야인지가 사람들 사이에서 막연하게 알려져 있는 것 같은데… 특히 ‘존재(Sein)’ 그리고 ‘존재자(Seiende)’라는 하이데거의 용어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생소해서, 하이데거를 공부하는 많은 분들이 시작부터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아요.

교수님 책을 보면, 이 ‘존재’와 ‘존재자’라는 용어에 대한 몇 가지 소개들이 있긴 하던데요. 예를 들어서, 존재가 파도라면 존재자는 물거품 같은 거라고도 하셨고, 존재가 일종의 사건이라면 존재자는 대상화된 무엇이라고도 하셨고, 또 “Es gibt”라는, “주다(geben)”라는, 독일어를 활용하셔서, “존재한다.”라는 것이 “그것이 준다.”라는 말하고도 연관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이 내용들을 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는지가 궁금하거든요.

이승종: ‘존재자’라는 개념, 혹은 그 개념이 지시하는 바는, 물화의 산물이라는 점을 여러분이 이해하셔야 합니다. ‘물화(物化; reification)’가 무엇인지를 제가 말씀드려야 할 텐데… 여러분, 우리가 질문을 할 때, 보통 “이거 뭐지?”라고 질문하죠? “이거 뭐야?”하고요. 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진리가 뭐지?”, “가치가 뭐지?”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 물화가 벌써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즉, 질문의 주제, 예컨대 ‘진리’, ‘가치’, 혹은 “인생의 의미는 뭐지?”라고 할 때 ‘인생의 의미’… 그것이 전부 사물로 전제되고 있는 거죠. ‘무엇’에 해당하는 사물로요. 이게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물화입니다. 사물로 모든 것을 변형시키는 작업이 “이게 뭐지?”, “진리가 뭐지?”, 여하튼 “…은 무엇이지?”라는 그 질문법에 이미 한꺼번에 전제되어 들어간다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저러한 형식의 질문을 사물이 아닌 것에 대해서도 던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서양철학의 시작이 바로 저러한 형식의 질문으로 열리게 됩니다. 그때의 질문의 대상은 ‘원질’이나 ‘원리’로 새길 수 있는 ‘아르케(arche)’였습니다. 즉, 서양철학사는 “아르케가 뭐지?”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아르케’를 ‘원질’로 번역하곤 하는데요, 본디의 성질이나 바탕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죠. ‘본질’이나 ‘원리’가 적당한 번역어인 것 같은데… 여하튼, “만물의 아르케는 무엇인가?”라는 게 서양철학자들이 던진 첫 번째 질문이었고, 그 질문으로 말미암아 서양철학사가 활짝 열렸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초기 철학자들은 그 질문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답변을 시도합니다. 그 질문을 던졌던 당사자인 탈레스는 아르케를 물이라고 보았고, 그 다음에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고 보았습니다. 또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고 보았고요. 이렇게 다양한 사물들을 아르케의 후보로 지목하게 됩니다. 멋있는 답변도 있습니다. 무한정자라는 차원 높은 답변을 제시한 아낙시만드로스도 있는데, 그조차도 무한정자를 ‘무엇’의 지시체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물화의 덫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즉, ‘무한정자가 아르케다.’하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무한정자도 어떤 ‘것’이라고, 어떤 ‘존재자’라고 잘못 생각했던 겁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물화로 말미암아 모든 관심이 존재자로만 한정되어 온 것이 존재망각의 역사로서의 서양철학사라고 봅니다. 그 다음에 “‘존재’는 그럼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차례인데요, 일단 유석 씨의 질문을 먼저 들어볼까요?

윤유석: 하이데거는 말하자면 ‘물화’를 비판했다는 거네요? 사물이 아닌 것들조차도 자꾸 사물처럼 생각하려고 하는 그 태도들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는 건데, 구체적으로 한번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이어지는 질문에서 계속]

철학의 길 4강(1) : 대륙철학

00:00-00:56 들어가는 말
00:57-02:58 모순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 철학의 문제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02:59-04:46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모순의 시민적 지위’란 무엇인가요?
04:47-06:14 비트겐슈타인은 모순의 형태를 지닌 철학적 문제로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나요?
06:15-11:25 왜 오늘날 영미철학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을 잘 읽지 않을까요?
11:26-13:01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오늘날 재발굴되어야 하는 요소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13:02-14:30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오늘날 극복되었다고 할 만한 요소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14:31-15:54 오늘날 주목할 만한 비트겐슈타인주의자로는 누가 있을까요?
15:55-21:41 인공지능이 철학을 하는 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요?
21:42-23:51 사람과 동등하거나 더 뛰어난 수준의 지능을 가진 ‘강인공지능’이 등장할 수 있을까요?
23:52-26:06 인공지능의 철학이 도래한 날에 사람의 철학은 어떤 의의를 지닐 수 있을까요?
26:07-27:44 인공지능에게 철학의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것도 유익한 점이 있지 않을까요?
27:45-34:11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사람의 철학과 인공지능의 철학은 상호보완적이지 않을까요?
34:12-39:15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인공지능이 계산은 사람보다 뛰어나게 할 수 있더라도 창조적 사유를 하기는 어렵지 않을가요?
39:16-42:44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인공지능이 감정을 지닐 수 있을까요?
42:45-45:28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인공지능이 감정을 지닐 수 있을까요? (보충)
45:29-50:12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뇌를 분석하면 생각이 모두 설명되지 않을까요?
50:13-53:11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과학과 인문학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53:12-57:50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인공지능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 없지 않을까요?
57:51-1:00:08 M. Ravel, Piano Concerto

철학의 길 4강(2) : 대륙철학

00:00-00:53 들어가는 말
00:54-20:23 대륙철학 배우기와 짓기
20:24-24:13 후설과 하이데거 사이의 철학적 관계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24:14-27:11 ‘현상학’이 어떠한 분야인지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27:12-29:07 하이데거의 사유는 어떤 면에서 ‘현상학적’이라고 불리기에 적절(혹은 부적절)한가요?
29:08-36:27 후설의 사유와는 구별되는 하이데거의 사유만의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인가요?
36:28-41:39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Sein)’와 ‘존재자(Seiende)’가 무엇인가요?
41:40-48:29 존재가 ‘배경’이고 존재자가 ‘개체’라는 점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48:30-53:00 존재가 ‘사건’이라는 점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53:01-57:57 존재가 존재자를 ‘준다’ 혹은 ‘선물한다’는 점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57:58-1:05:05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하이데거와 불교의 사유 사이에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요?

철학의 길 4강(1) : 대륙철학

철학의 길 4강(2) : 대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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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 얘기하는 과학주의가 퍼지는 게 규범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사실 철학의 맛이라도 본 사람들한테는 낯설은 명제가 아니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논의의 재미(?)를 위해 관련있는 두가지 다른 논제를 제기해보고 싶습니다.

  1. 규범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더라도, 과학주의가 인문대 연구자들을 제외한 일반인들에게 만연한 것은 사실 아닌가? 심지어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의 정당화를 할 때도 과학자들의 의견이 가장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또한 생물학 교과과정 같은 순전히 과학의 전문범위에 속해있지 않아 보이는 것도 그들의 의견이 가장 무겁게 실리는 듯 하다. 좀 더 과격하게 얘기하면 과학주의가 적용되지 않는 결정이 거의 없는듯하다. 왜 과학주의가 널리 퍼지고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걸까?
  2. 사실 이제 과학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너무 철지난 논제가 아닐까? 왜냐하면 일반인들은 더 이상 인문학자의 말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의 말도 그렇게 신경쓰지 않는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 자체에 관심없는 탈-진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모든 혹은 대부분의 공중에서의 논쟁은 근거에 기반을 둔 의견 다툼이 아니라 그저 기싸움 내지는 정치 공방으로 보일 뿐이다. 정치적 지지 때문에 지구온난화를 부정하는 일부 미국 공화당 지지자들이 그 예시가 될 것이다. 그들은 트럼프의 말을 믿고 99프로의 과학자들의 말은 듣지 않는다. 이런 탈-진실의 경향이야말로 과학계와 인문학계를 포함한 학술사회 사람들에게 진지한 위험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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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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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는 주제라고 생각해요. 제 개인적인 생각을 간략히 적자면,

(1) 우리가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해요.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한 사회를 지배하는 종교, 가치관, 신념, 이데올로기가 존재하지 않잖아요. 워낙 다양한 문화들과 사상들이 서로 만나게 되었다 보니, 그 중 어느 하나가 특권적 위치를 점할 수 없게 된 거죠. 그래서 결국 사회가 가치의 문제를 배제하고서 사실의 문제에서 이루어지는 합의에만 의존하게 되고, 또 그 사실의 문제를 판가름하는 기준인 과학을 절대적인 것으로 맹신하게 된 게 아닌가 해요. 수치화되고 법칙화되어 과학의 영역 안에서 표현될 수 있는 '사실'들이 그 자체로 '가치'가 되어버렸다는 거죠. (가령, "한글은 과학적인 문자이다!"와 같은 캐치프레이즈가 이런 경향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2) 저는 지구 온난화를 부정하는 사람들이나, 지구 평평론자들이나, 창조과학 신봉자들이나, 온갖 음모론자들이 '과학'이나 '과학자들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보지 않아요. 오히려 정반대로, 이 사람들은 과학의 잣대를 도입하면 안 되는 문제에까지 과학을 도입하려 한다고 생각해요. 정치적 가치 평가의 문제와 종교적 신념의 문제를 과학과 뒤섞으면서, 자신들의 가치관과 종교관이 과학적으로 옹호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게 문제인 거죠. 아마 그분들은 자신들이 그 누구보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스스로 확신할 거예요. 다만, 그분들이 생각하는 '과학'은 과학의 영역이 아닌 사안들과 뒤범벅되어 있는 나머지, 일반적인 의미의 과학과는 제대로 소통이 될 수가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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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결정은 정책이 내려져야 할 분야의 사실들과 추구해야 할 가치를 전제로 해서 그 가치가 가장 효율적으로 구현될 것 같은 정책이 뭐냐라는 것이죠. 추구해야 할 가치를 정하는 것은 과학의 몫이 아니지만 추구해야 할 가치로 당연시되는 가치가 있으면 남은 일은 사실을 확인하고 그 다음은 사실이 여차저차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그 가치를 가능한 최대한대로 효율적으로 [최대한 적은 비용을 들여서 최대한 빨리] 구현할 수 있을지를 논리적으로 추정하는 것인데, 그 확인과 추정은 과학자의 몫이죠. 그러니까 결국 '과학주의의 만연'의 의미는 추구해야 할 가치로 당연시되는 가치들이 이미 벌써 정해져 있다는 것이죠. 그 외의 또 하나의 가능한 의미는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은 과학을 / 그다지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없는 대상을 과학이라고/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고 맹신하는 것 정도일 것 같네요. 후자의 의미의 과학주의의 만연을 가장 부추길 수 있는 이들도 가장 비판할 수 있는 이들도 과학을 가장 잘 아는 이들, 즉 과학자일 가능성이 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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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1) 가치를 공유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있겠군요.
(2) 저는 그런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예 사실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봤습니다. 말씀하신 것과 달리 '과학'이나 '과학자들의 말'을 신뢰한다면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동의하는 지구 온난화나 지구구형설을 믿지 않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들의 행동을 설명하려면 그들이 '과학자'들의 말이나 '여러 정보를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능력' 그리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합리성'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욱 가치있게 여기는 게 있다고 봐야할 거 같습니다. 전문가들이나 학문의 세계에서 존중받는 가치는 그들에게는 상당히 사소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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