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은 샌델이 공리주의를 비판한것을 저자가 옹호하는 내용이지만, 다른 개론서들에서도 본 내용이 좀 있어서 생략했습니다
3장
이민열은 샌델이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공리주의와 샌델의 이론 모두 목적론의 구조이기에, 제대로 분석하면 문제가 있음이 드러나는 공리주의의 숨겨진 전제를 샌델 또한 가지고있다. 또한 문제가 있는 자유지상주의의 대표적인 명제들을 그냥 납득해버리고, 그 명제들로 롤즈를 공격하고있다. 이민열은 샌델이 두 이론을 제대로 분석했다면 자신이 자유주의를 비판하고있는 무기가 엉터리라는걸 발견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민열은 3장에서 노직의 자유지상주의를 비판한다.
- 자유지상주의, 밑동 빼고는 괜찮은가?
샌델은 절대적 소유권과 계약의 무조건적 자유를 정당화하기위해 노직이 내건 두가지 조건을 소개한다.
1.돈을 벌때 사용한 자원이 애초에 정당한 소유물이어야 한다.(초기 소유물에 관련된 정의)
2.시장에서 자유로운 교환으로 또는 다른 사람의 자발적인 선물로 돈을 벌어야 한다.(소유물 이전에 관련된 정의)
노직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자신의 신체와 재능을 소유하므로, 우리가 팔다리와 재능으로 '정당하게' 외부자원을 획득하고, 그것을 '정당하게' 자유로운 교환과 계약을 통해 이전했다면 모든 행위는 정의롭다고 말할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다른 최소수혜자들을 위한 국가의 과세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므로 부정의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행위자들에게는 저 두 조건만 충족된다면 모든 계약과 재산권은 정당화되며, 저 조건들이 아닌 그 밖의 다른 조건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샌델은 '우리는 우리자신을 소유한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재산권과 계약의 무조건적 자유를 결론으로 하는 노직의 논증이 타당하다고 여긴다. 따라서 샌델은 우리자신을 소유한다는 명제가 참인 한, (즉 우리가 개개인의 개별성을 주장하는 한)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는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샌델은 자유지상주의의 명제들을 이용해 개별성과 평등을 함께주장하는 자유주의를 공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있는 것이다.
이민열은 3장에서, 샌델이 그럴듯하다고 넘어간 자유지상주의의 명제(최초취득과 이전에 구현된 정의)들이 틀렸다는점을 논증하고 4장에서, 샌델 자신이 비판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던 자기소유권명제는 멀쩡하다고 논증한다.
- 노직 이론의 커다란 구멍
노직은 정당한 취득과 이전에 대한 조건 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약을 제한하는 다른조건을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농구선수 챔벌레인의 예를 든다.
(이민열은 여기서부터 챔벌레인의 예, 그리고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소개하는) 챔벌레인의 사례에 대한 반론과 그에따른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변호를 소개하는데, 분량상 너무길어 사례와 비판 모두 요약자가 나름 재구성하고 요약했다)
챔벌레인의 사례: 챔벌레인이라는 재능이 뛰어난 농구선수가 있는데,
농구경기 입장권 한 장당 25센트를 얻는다.
입장하는 관객들은 팬으로서 챔벌레인이 25센트를 당연히 가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시즌이 끝나고 챔벌레인은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러나 지구상 다른 사람들이 굶는다고 해서 챔벌레인에게서 (관객들에게서 자발적으로 건네진) 돈을 세금으로 걷을수는 없다. 이것은 직관적으로 부당하다.
따라서 정의의 조건만 갖춰진다면, 국가가 그 이상을 요구하는것은 개인의 권리를침해하는것이다.
노직의 논증에 대한 비판1.
가난한 사람에겐 그 돈이 매우절실하다.
따라서 챔벌레인에게서 세금을 걷을 수 있다.
ㅡㅡㅡ내 콩팥을 위급한 환자를 위해 떼어갈수는없다.
내 콩팥과 마찬가지로 내 돈도 절대적으로 내것이다.
따라서 내 돈을 다른이유로 마음대로가져가서는안된다.
비판2.농구를잘하는것과 그능력으로돈을버는것은 행운이다.
행운과 도덕은 상관이없다.
따라서 챔벌레인은 자신의 소득에대해 도덕적 권리가없다.
ㅡㅡㅡ건강한 콩팥을 운좋게 타고났다고 해도 그 콩팥은 내것이다. 따라서 내 콩팥을 환자에게 떼어줄수는없다. 내 콩팥과 마찬가지로 내돈도 절대적으로 내것이다. 따라서 내돈을 다른이유로 마음대로 가져가서는 안된다.
이민열은 (샌델이 소개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변호들이 공통된 전제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만일 신체가 각자의 소유라면, 생산한 외부자원 역시 절대적으로 그의소유이다' 라는 명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외부자원에 대해서 세금을 걷는것이지, 신체에 대해서 세금을 걷는것은 아니다.
따라서 저 명제는 직관적으로 와닿지않기에 추가적인 정당화가 필요하다.
즉 나 자신의 신체와 외부자원이 동등한 차원에서 나의소유물이라는 증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샌델은 추가적인 언급없이 자유지상주의의 변호가 성공한것처럼다룬다.
따라서 샌델은 자유지상주의의 이론을 무너뜨리는 방법은 자기소유권 명제, 즉 '내 신체를 내가 소유한다'라는 명제를 부정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3장후반부와 4장전체에 걸쳐 '내 신체는 공동체가 토론끌에 합의된 목적에따라 처분할 수 있다는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민열은 자기소유권명제는 직관적으로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샌델이 고작 자신의 이론을 고수하기위해 이 명제를 포기한채로 자유지상주의를 공격하겠다는것은 '바둑으로 치면 상대에게 갑자기 돌 수십점을 주고 시작하는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민열은 신체소유권에 대한 샌델의 논증에 대한 문제를 나머지 장에서 다루는것으로 하고, 여기서는 노직의 논증을 다룬다 .
- 외부자원을 어떻게 소유하는가
노직: 만약 내가 나 자신을 소유한다면, 나는 내 재능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내 재능을 소유한다면, 내 재능으로 내가 생산한 모든 것을 소유한다.1)
(여기서 잠깐 요약이 너무 늘어지는것같아 다시 정리하자면, 내가 최대한 이해해본 (이민열이 소개하는) 노직의 논증이 정당화되는 도식은 이렇다.
외부자원에 대한 소유권->챔벌레인의 예->정의의 두 조건
즉, 1.우리는 재능으로 생산한 모든 외부자원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다.
2.따라서 합법적으로 돈을 벌고 and 자발적 교환으로 돈을 받은 챔벌레인에게 과세하는것은 개인의 권리 침해다.
3.따라서 우리는 챔벌레인의 예에서, 정의의 두조건의 준수여부가 계약의자유와 절대적재산권의 필요충분조건이다라는 직관을 얻어낼수있다.)
이민열은 노직의 논증에서 '내가 생산한 것'이라는 개념이 애매하다고 주장한다.
예를들어 내가 우리집 뒷마당에서 의자를 만들었다고 치자.
그 의자의 모든 부분에 나의 노동이 침투해있는것은 아니다.
모든 생산물은 우리가 생산하지않은 자연자원+나의 노동이 섞여있다.
이미 존재하는 자연물에 노동을 섞었다고 어떻게 해서 내소유물이 되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이민열은 이러한 소유권의 등장이 단순한 사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단순히 '사용할수 있는 권리'를 넘어서 다른 사람들이 건드리지 못하게 '배제할 권리'까지 갖기 때문이다. 2))
이민열은 자연물에 '노동을 섞는' 행위가 '자동적으로' 생산물을 소유하는 것이 되는 기제가 애매한 이유를 세분화한다.
1.소유대상과 범위가 모호함
개척시대에 땅을 소유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땅에 울타리를 쳐서 경계가 생겼다. 깎은 나무막대기를 세웠다고 해서 어떻게 울타리 안의 땅까지 소유하는가? 직접적으로 가공한 나무막대기가 아니라 그 안의 멀쩡한 땅까지 소유할수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혹은 거꾸로 생각해서 '경계 안의 땅' 이 아니라 '경계 바깥이라고 생각했던 땅 전부"를 소유하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2.노동을 섞는 사람의 의도나 자연물에서 새롭게 창출되는 가치를 고려한다고 해도 문제가 있음
바닷물에 비싼 귀금속을 흘리거나 길에 핸드폰을 두고가는것도 그만큼 자연물의 가치가 높아졌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길이나 바닷물을 소유할수는 없다.
3.없는것을 얻는것이 아니라 가진것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할수도있음
다시 바로 위의 예를 가져와보자. 우리는 바닷물이나 횡단보도를 얻는것이 아니라 그저 귀금속과 핸드폰을 잃어버린것이라고 생각하는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사실 현대인들은 노동을 투입한 것이 우리의 소유물이 되는 방법을 이미 알고있다. 이민열은 소유를 규정하는 것은 '사회적 약속'이라고 생각한다.
도서관 좌석에 노트와 가방을 올려놓으면 그 자리는 하루동안 그 학생의 자리다. 그것은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것이아니라,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끼리 대부분은 암묵적으로 그런 약속을 하기 떄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소유물에 과세를 할것이냐 말것이냐의 문제에서 핵심은 이것이다.
우리는 '재산권을 규정하는 여러가지 사회적약속중 어느것이 규범적으로 타당한가?'를 따져봐야하는 것이다.
협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생산의 결과를 어떻게 나눌지는 정하기 나름이다. 분배 방식을 사회적으로 합의한 다음에야 내 것과 네 것이 생긴다. 소유권을 근거로 노동과 소유권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현대인들은 사회적 약속이 이미 성립된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를 쉽게 인식하지 못한다.3)
이민열은 노직도 저런 '자연적 소유'의 난점들을 명민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노직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한다.
자유지상주의자인 노직은 각 개인은 자유롭고 존엄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노직은 평등한 존재들이 배타적 소유권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를 탐구한다.
여기서 노직은 17세기의 철학자 로크를 끌어들인다.
로크는 인간이 따라야할 '자연법'을 신이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로크는 이 '자연법'으로 자연적 소유를 정당화한다.
자연법의 제1원리는 인간번영의 원리이기 때문에, 인간은 번영해야한다는 임무를 가지고있다.
인간은 사적 소유를 인정해야 자연을 제 스스로 가꾸고 번영시킬 수 있다.
(단, 모두가 번영해야하므로 사유화려는 자는 남은 사람들이 사용할 몫을 충분히 남겨야 한다. 이 조건을 '로크의 단서'라고 한다)
따라서 최초의 취득은 정당화될수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소유는 '몫없는 사람들'을 만들어 낼 수있다.
마지막 남은 땅을 차지하려는 z라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는 로크의 단서를 충족하지 못하므로 토지를 사유화하지 못한다. 결국 몸뚱이만 갖고 빈털터리가 된다. 그러니 y가 나쁜 놈이다.
z 이전에 사유화에 성공한 마지막 사람 y로 인해 z는 로크의 단서를 충족하지 못했다. 따라서 y도 로크의 단서때문에 땅을 소유하지 못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이렇게 물고 올라가면 최초로 땅을 사유화한 a에 도달하고, 그의 사유화 역시 로크의 단서를 충족하지 못한다.
따라서 평등한 사람들이 소유권 체제를 합의하기위해선, 아무것도 소유하지못한 상태라도 그 사람의 처지가 나아질수있다는 보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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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민열,『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157p
2. 경제학자 홍기빈은 16세기 영국에서 소유란 '내가 그 땅을 경작할 권리'라는 뜻이 아니라 '아무도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할 권리'로 즉 '사용'에서 '배제'로 뜻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으며, '이것은 사람과 사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권력관계에 불과하다' 라고 지적한다. "소유권은 권력이다"
3.이민열,『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16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