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제 1장 (1)

제 1장 소를 찾아 나서다 : 앎의 바탕 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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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물리학자가 철학적으로 들려주는 '앎' 발전 과정 (온전한 앎이란 무엇인가… 철학과 과학을 넘어 진리를 추구하는 여정)

0. 여는 글

** "철학을 잊은 과학에게, 과학을 잊은 철학에게".** 이는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책의 부제이기도 하다. 이는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책의 부제이기도 하다. 단순히 책의 부제일 뿐만 아니라 저자의 소망과 집필 의도까지 함축적으로 잘 담긴 표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저자는 시대가 흐르면서 철학 바깥으로 분리되어 분과 학문이 되어 발전한 자연과학들을 다시금 ‘자연철학’이라고 부르고 그것이 포괄하는 전체의 모습을 조망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중에서도 특히 ‘물리학’의 입장에서 학문적 통합을 위한 개략적 윤곽을 잡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를 위해서 저자는 책의 구성을 ‘심학십도’라는 형식을 취했다. 이는 ‘성학십도’와 ‘심우십도’를 합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성학십도는 퇴계 이황이 성리학의 핵심적 내용을 열 폭의 도식으로 요약해내어 본격적인 학습을 위한 도식이다. 그리고 심우십도는 한 사람이 ‘소’로 상징되는 진리를 찾아 헤매며 참된 깨달음을 찾아나간다는 내용을 그린 그림이다. 저자는 성학십도라는 틀을 통해서는 자연철학의 핵심적 내용들을 간결한 열 장의 구성으로 담아내어 조망하고자 하는 의지를, 심우십도라는 틀을 통해서는 온전한 앎을 찾아 떠나는 학문의 여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저자는 이러한 ‘심학십도’의 구성을 우리(동아시아) 문화권으로 운을 떼어 바깥의 서구 학문의 성취들을 접한 뒤에 다시 우리 문화권으로 복귀하는 오딧세우스적 구조로 펼쳐가고 있다. 즉 제 1장에 나타난 여헌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근대 서구 과학이 그 내용들을 어떻게 채웠는가를 알아본 후 마지막 주제에서 다시 우리 문화권으로 복귀해 그것들을 우리의 지적 자산으로 삼아보려는 노력을 하려는 것이다. 저자가 이와 같이 구성을 한 이유는 동아시아, 특히 우리 문화권에서 과학을 한다는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1. 근대학문의 싹, 여헌 장현광

바로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저자는 책의 처음 제 1장에서 여헌의 근대적 문제의식과 그 사유의 과정을 다루었다. 이번 정리글에서는 여헌의 근대적 사유방식 이 기존 고전학문과는 어떻게 다르며, 어떠한 의의가 있으며, 그를 바탕으로 어떠한 앎의 바탕 구도 를 도출해낼 수 있는지 간략하게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여헌 장현광(1554~1637)은 갈릴레이(1564~1642)가 탄생한 시기와 10여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서구에서도 아직 근대 과학이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다. 또한 여헌이 <우주요괄첩>을 작성한 1571년까지만 해도 조선 땅에 서구 문명이 들어오기 이전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저자가 책의 첫 장의 주인공을 여헌으로 내세운 이유일 것이다. 저자의 의도는 서구 문명이 조선에 유입되기 직전까지 우리가 가졌던 자생적인 지적 유산을 최대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일단 여헌의 학문 방식은 ‘성역 없는 학문 세계’를 큰 특징으로 하고 있다. 글을 쓰는 방식만 보더라도 “내가 말하노니(여왈)의 형식을 취하며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는 당시까지 대부분의 학자들, 심지어 퇴계마저도 기존 경전들을 충실하게 주석해나가면서 자신의 생각을 일부 덧붙이는 방식 위주의 학문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아마도 그러한 의미에서 저자는 우리 학문 전통 안에서 <성학십도>가 간행된 1570년을 고전학문의 정점이라고, <우주요괄첩>이 작성된 1571년을 근대학문의 기점이라고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또한 여헌이 학문을 탐구하는 방식에도 근대학문의 정신이 드러나있다. 굳이 길게 부연할 없이 다음과 같이 깔끔하게 말할 수 있겠다. “우주 안의 일이라면 무엇이나 묻자, 그리고 모르면 찾자, 그리고 이것은 너와 내가 모두 할 수 있는 일이다” 오랫동안 인류 사회에서 신이 직접 계시해준 지식, 성인만이 알아낼 수 있었던 지식, 신령한 능력을 받은 자만이 알 수 있는 지식이 판을 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분명 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여헌은 시공을 뛰어넘거나 인간의 중추신경계 등을 포함한 물리적 정보채널을 넘어서는 이치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설령 성인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고대로부터 내려져 온 전통이라 할 지라도, 그 어떤 신의 계시라 할 지라도, 용한 점쟁이의 점술이라 할 지라도 그 어떠한 신비한 지식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가히 앎의 방식을 신화에서 과학으로 옮겨놓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소제목 ‘내 안에 있는 이치로 천지만물을 비추다’ 부분은 제 9장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고자 문제 의식으로 가볍게 짚기만 해두었다. ‘이해’와 ‘앎’과 ‘정보’와 ‘지식’ 등에 대해서 다루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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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은 예전에 해놓고서 글은 처음 써서 올리네요. 작년 말에 녹색아카데미에서 장회익 선생님과 진행한 세미나에서 제가 요약한 글을 업로드합니다. 원본은 제 블로그에 올려져 있습니다. 바람처럼 : 네이버 블로그 2장은 내일이나 모레쯤에 올리겠습니다.

1개의 좋아요

여헌 장현광이라는 학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네요! 조선시대 학자가 저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니, 굉장히 특이합니다.

오호 좋은 글 감사합니다!:slightly_smiling_f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