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ton(1990) Mimesis as Make-Believe 2장: Fiction and Nonfiction (요약)

  1. 허구와 비허구

2.1. 비허구

“’비허구 작품들’은 소설이나 다른 허구 작품들과 어떻게 비교되는가?” (p. 117[70])

(1) 비허구 작품들은 그 기능이 믿는 체하기 게임에서 소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아닌 것들이며, 어떤 명제들을 허구적이게끔 하지 않는다 - 반론: <종의 기원>은 독자들이 어떠한 명제들을 믿도록 쓰였으나, 현시적 믿음은 상상하기를 포함한다면, <종의 기원>은 어떠한 명제들을 상상할 것을 요구하며, 어떠한 명제들을 허구적이게끔 한다.

(2) 재반론: <종의 기원>의 독자는, 마치 우리가 허구에 참여하면서 상상하듯이, 책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 책에서 표현된 명제를 품어야 하겠지만, 품는 것이 상상하는 것은 아니다. (1.2)

(3) 허구적 작품은 재현적 작품 - 즉 그 기능이 어떤 특정한 종류의 게임에서 소도구가 되는 인공물 - 인 것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월튼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허구와 비허구의 분류를 그대로 잡아내려 하지 않는다. “일상적인 대략적 분류가 우리의 이론적인 목적에 사용되기 위해서는 다듬어질 필요가 있다.” (p. 120[72])

(4) 경계선에 놓인 경우들 또한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역사 소설들은 어떤 명제들에 대해 그것을 상상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그것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고자 할 수 있다. 때때로 한 작품은 허구로도, 비허구로도 분류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버클리의 <대화>는 실제 세계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어떤 것들을 믿게끔 하려는 의도로 쓰였다는 점에서 비허구로도 분류될 수 있고, 허구적 참을 만들어낸다는 점에 있어서 허구로도 분류될 수 있다. 명료성을 위해 월튼은 이러한 경우 모두 허구로서 받아들인다. ‘비허구'로써 월튼은 단지 ‘허구가 아님'을 의미한다.

(5) 그런데 이러한 이해 방식이 대안들, 특히 언어적 이론들에 비해 어떤 점에서 더 나은가?

2.2. 허구 대 실재

(1) 여기서 월튼의 관심사는 허구적 작품과 비허구적 작품 간의 차이이지, 실재나 사실, 참과 대조되는 것으로서의 “허구"가 아니다. 이 구분은 허구적인 것들과 실재적인 것들 사이의 구분이 아니다. 소설, 시와 같은 허구적 작품은 논문이나 기사와 같은 비허구적 작품만큼이나 실재적이다.

(2) 그러나 허구적인 것/실재적인 것 간의 구분을 통해 허구적 작품/비허구적 작품 간의 구분을 이해해야 한다는 제안이 있다. 제안 1: 허구적 작품은 허구적인 것에 관한 작품이고, 비허구적 작품은 실재적인 것에 관한 작품이다.

(3) 제안 1에 대한 반론: 허구에 관한 비허구적 탐구, 예를 들어 문예비평 서적은 대부분 허구에 관한 것이지만 허구적 작품이 아니다. 오직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들에 대한 허구적 작품 또한 가능하며, 우연히 그 허구에서 참인 명제들이 모두 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밝혀졌을 때 그 작품의 허구성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어떤 교과서가 처음부터 끝까지 틀려먹었다고 해서 허구적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허구일 수 있으며, 허구는 사실일 수 있다.” (p. 123[74])

(4) 따라서, 허구적인 것/실재적인 것 간의 구분과 허구적 작품/비허구적 작품 간의 구분을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2.3. 언어적 전략들

(1) 허구적 작품과 비허구적 작품을 구분하려는 많은 시도는 언어의 허구적 사용과 비허구적 사용 간의 구분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모든 허구적 작품이 언어적이지는 않으며, 우리는 그러한 언어 사용을 허구적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따라서 허구성이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2) 언어 이론은 “일반적인”, 즉 문자 그대로의(literal) 의미와 진술적 사용에 우선 초점을 맞춘 후, 허구적 담론이 어떻게 그러한 사용과 다른가 설명한다. 이러한 방식은 “허구는 비허구의 관점에서, 그리고 비허구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추정” (p. 124[75]) 에 의존하고 있는데, 월튼은 이러한 추정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3) 특히, 많은 허구에 대한 이론이 오스틴의 발화수반행위(illocutionary act - 국역본에서는 “언표내적 행위”라고 번역함) 개념을 이용해서 화용적으로 허구적 작품과 비허구적 작품을 구분하려 하였다. 그러한 많은 이론은 허구 작품이 만들어지는 행위를 통해 이 구분을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월튼에 따르면, “이는 정확히 역행적이다. 기본적인 개념은 허구 작 품이라는 개념, 혹은 그것이 인공물이든 아니든 허구 작품들이 하는 것과 같은 기능을 하는 사물들의 개념이지 허구 만들기 행위의 개념이 아니다.” (p. 126[77])

(4) 구체적인 비판은 다음 세 절에서 이루어진다.

2.4. 허구와 단언

(1) 제안 2: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표현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진술한다면 그것은 비허구적 작품이고, 그렇지 않다면 허구적 작품이다.

(2) 제안 2에 대한 반론(a): 어떤 진술문을 진술하지 않으면서 사용하는 비허구적 예시가 있다: 문법 수업의 예문, 마이크 테스트 지문 등. 언어의 허구적 사용은 단순히 일반적인 사용에서 무언가가 결여된 사용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요소를 가지는 사용이다.

(3) 반론(b): 문장이 뜻하는 바를 진술하지 않는다는 것이 허구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조차 아닐 수도 있다. 역사 소설에서, 작가는 역사적 사건을 어느 정도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다. 그러한 요구를 따라 역사적 사실을 진술할 때, 작가가 허구적 작품 사이에 비허구적 문장을 끼워 넣는다고, 허구적 작품을 쓰는 것을 잠시 중단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어떤 명제를 허구적으로 만듦으로써 진술할 수 있다. [월튼은 또한 <대화>, 뉴 저널리즘에 속하는 작품이 작가가 자신이 쓰는 모든 문장들이 참이라고 진술하는 허구의 예로서 제시한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월튼의 구분을 따르자면 물론 허구지만, 여기서 전이론적 직관을 가지고 다른 이론들을 검토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런 예시들이 허구적 작품에 속한다는 점이 그렇게 명백해 보이지는 않을 수도 있다]

(4) 허구를 쓰면서 진술하기와 같은, 어떠한 발화수반행위를 수행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하는 제한은 없는듯 보인다.

2.5. 언표내적 행위들을 가장하기와 재현하기

(1) 제안 3: 허구 작품을 만들어낼 때 작가는 진술하기 또는 다른 어떤 발화수반행위를 하는 것을 가장(pretend)한다. 이러한 이론들은, 주로 작가가 어떤 명제들을 진술하는 것을 가장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가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Searle(1975)에 따르면, 의도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행위하면서, 기만할 의도가 없다면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은 문제의 그 일을 하는 것을 가장한다.

(2) 월튼은 이러한 가장하기에 대한 설명에 불만을 표한다. 하프시코드를 의도적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처럼 연주할 때 (또한 기만할 의도가 없을 때) 그 사람이 반드시 피아노를 치는 것을 가장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 보인다. 월튼은 가장하기를 믿는 체하기를 통해 설명하기를 바란다.

(3) 제안 3에 대한 반론(a): 2.3에서 보았듯이, 허구적 작품의 작가 또한 실제로 발화수반행위를 수행할 수 있다.

(4) 반론(b): 실제로, 작가들은 때때로 이러한 가장에 참여할 때도 있다. 그러나 회화적 허구의 경우를 살펴볼 때 문제는 즉각적으로 드러난다. 작가가 회화 작품을 그리거나 조각상을 만들 때, 그들은 가장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이 점을 보이기 위해 월튼은 그림이나 조각을 무언가를 진술하는(실제 사건을 보이는,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전통이 없는 사회를 고려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도 회화, 조각상 등이 허구적 작품일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적어도 월튼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5) 제안 3’: 허구적 작품을 만들어낼 때 작가는 어떠한 발화수반 행위를 재현/묘사한다.

(6) 제안 3’에에 대한 반론(a): 제안 3에 대한 반론(b)가 그대로 적용된다. 어떤 대상을 그린 회화는 어떤 대상을 재현하지, 누군가의 진술이나 어떠한 발화수반행위를 재현하지 않는다.

(7) 반론(b): 이 제안 (단독)은 허구성이 무엇인지, 하나의 작품을 허구적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설령 (화자가 있는) 문학적 허구에 대해서는 이 이론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어떤 작품을 허구적으로 만드는 재현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남아 있다.

(8) 제안 3과 3’ 모두 “허구는 ‘진지한’ 담론들에 기생하고 있다는 관념” (p. 137[84])이 바탕에 깔려 있다. 허구는 그러한 ‘진지한’ 담론에서 파생적이며, 그러한 담론을 위한 장치와 그 기능 덕분에 허구적 담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 (4)에서처럼, ‘진지한’ 담론, 특정한 발화수반행위가 일어나지 않았으나 허구는 있는 사회 또한 가능하며, 이는 허구가 ‘진지한’ 담론에 의존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월튼은 어떻게 ‘진지한’ 담론이 일어나지 않은 사회에서 허구가 가능한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이는 그렇게까지 명백해 보이지는 않는다.]

2.6. 언표내적 행위로서의 허구 만들기?

(1) 제안 4: 허구적 담론은 한 종류의 ‘진지한’ 담론이며, 허구를 만드는 것은 하나의 독자적인 발화수반행위이며, 허구적 작품은 이러한 발화수반행위의 수단이다. 이 종류에 속하는 이론은 그래서 허구 만들기가 어떠한 발화수반행위인지 설명하는 데 공을 들인다.

(2) 반론(a): 이러한 제안에 따르면, 허구적 재현하기하기가 1차적이며, 허구적 작품은 그런 행위의 수단이다. 진술하기가 1차적이며, 진술문은 진술하기의 수단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진술하기와 허구 만들기 간의 유비는 성립하지 않는다.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문장의 경우를 보자. 어떠한 바위의 갈라진 틈의 모양이 특정한 진술문 p의 모양처럼 보인다고 하자. 이때 우리는 바위에 나타나는 p를 (그것이 나타나게 된 경위를 안다면) 사람이 작성한 진술문처럼 간주하지 않는데,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진술적 행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발화한 진술문을 그것이 참이라고 믿을 근거로 사용할 수 있지만, 바위에 나타난 p를 p를 믿을 근거로써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위에 나타난 p를, 그것이 나타나게 된 경위를 안다고 해서 허구로써 사용할 수 없지는 않다. 월튼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여전히 p를 소도구 삼아 적절한 종류의 믿는 체하기 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 작가에 대한 통찰이나 감탄을 경험할 수는 없겠지만, 이는 믿는 체하기 게임에 참여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믿는 체하기 기능은 그 기능을 가진 것들이 종종 불러일으키곤 하는 허구 제작자에 대한 관심과는 별개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p. 140[87]) 월튼은 또한 실제로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허구적 그림의 예시를 들기도 한다. 인물, 동물 따위로 보이는 구름, 자연적으로 생긴 디자인 등은 믿는 체하기 이론 하에서 허구로 분류된다.

[대표적으로 제안 4 유형에 속하는 Currie(1990)는 이러한 비판을 fiction/psudofiction 구분 (허구인 것과 허구가 아니면서 허구로 간주되는 것 사이의 구분)을 통해 쉽게 넘어가고, 이는 적어도 내게는 그럴듯해 보인다. 나는 p가 허구가 아닌 것을 알면서 허구로 간주할 수 있는 것처럼, 진술문이 아닌 것을 알면서 진술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월튼은 후자의 경우에서 우리는 p를 진술로 간주하더라도, 바위에 나타난 p가 p를 믿을 이유가 될 수는 없지만, 허구로 간주하는 경우에서 이는 충분히 p를 상상할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믿기와 상상하기 사이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허구적 작품(‘작품’이라고 못박아두었으면서 자연물을 논의에 끌어들이는 것도 의아스럽기는 하다)과 비허구적 작품 간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3) 반론(b): 발화수반행위에서 의도는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진술하기는 진술할 의도가 있을 때에만 진술하기이고, 약속하기는 약속할 의도가 있을 때에만 약속하기이다. 우리가 상대방이 q를 진술했는지 알기 위해 그가 q를 진술할 의도가 있었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허구적 작품을 감상하면서, 작가가 어떠한 명제를 허구적으로 만들도록 의도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적 참을 모두 알 필요도, 정확히 알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점은 진술하기도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q’라고 [의도적으로] 진술하면서 ‘q’가 r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더라도, 나는 q를 진술했지 r을 진술하지 않았다. 내가 허구적 참을 내 의도와 반하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내 의도와 반하게 진술할 수 있는 듯 보인다]

(4) 따라서, 허구의 기능은 허구 제작자의 의도에 의존하지 않으며, 허구의 감상에서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대상에 집중한다. 물론 어떤 대상이 허구적 기능을 가지느냐는 사회적 맥락이나 배경과 독립적이지 않다. 우리 사회의 규약에서 허구적 작품의 기능이 부분적으로 제작자의 의도와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회가 그러할 필요는 없으며, 이러한 의도의 개입은 허구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5) “우리는 허구 만들기라는 행위(그리고 허구 제시하기나 전시하기 행위)와 더불어 인간 전달자를 포함한 어떤 의미의 의사소통이라도 허구의 본질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p. 143[89]) 허구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써 사용될 수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허구는 언어-의사소통적인 어떤 개념이 아니다.

2.7. 혼합물, 중간물, 애매한 것, 비결정적인 것

“나는 [...] 기능이라는 개념에 대해 고의적으로 모호하게 남겨두었다. 기능을 통해 이해되는 허구 개념 역시 이러한 모호함을 이어받는다.” (p. 145[91])

(1) 모든 작품들이 허구와 비허구로 깔끔하게 나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월튼은 개별 작품이 허구인지 비허구인지에 있어서 복잡한 성질을 가질 수 있다고 인정하나, 허구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복잡한 경우를 한 쪽으로 분류하는 것이 아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주변적이거나 중간적이거나 혼합적이거나 애매하거나 비결정적인지를 올바로 이해”(p. 144[90]) 하는 것이 목적이다.

(2) 한 작품은, 만일 그 기능 중 하나가 공식적인 믿는 체하기 게임에서 소도구로써 사용되는 것이라면 허구이다. 그러나 기능은 사회에 상대적이다. 어떤 것이 한 사회에서는 비허구이지만 다른 사회에서는 허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우리는 다른 문화와 다른 시대에서 생겨난 작품들을 존중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p. 146[91])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 신화를 허구로써 사용할 때, 그것이 그리스인들의 신화와 동일하지 않거나, 또는 우리가 그것들을 허구로써 사용하고 이해하더라도 비허구라고 할 수도 있다). 심지어 어디까지를 하나의 유관한 사회로 간주할지도 명확한 것이 아니다.

(3) 기능은 또한 정도를 가진다. 하나의 작품은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질 수 있고, 소도구로써 사용되는 기능, 즉 그 작품을 허구 작품으로써 만들어주는 기능이 주요적인 기능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소도구들은 또한 동시에 주장, 지식 전달, 이해 증진 등의 기능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경우, 특히 한 소도구가 동시에 전형적인 비허구 작품의 주요한 기능을 가질 때 복잡함이 일어난다. 그러나 월튼의 분류 상, 적절한 기능을 가지는 한, 그 기능이 얼마나 부차적이고 미미한지와 상관없이 그 작품은 (또한) 허구 작품이다. 이러한 분류는 일상적인 직관보다 많은 것들을 허구로써 포함시키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한 작품의 1차적인, 또는 지배적인 기능에만 집중하여 분류하는 것도 그럴듯하지 않다. 무엇이 주된 기능인지는 많은 경우 상당히 애매한 문제이며, 이해를 증진시키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많은 허구적 작품의, 적어도 주된 기능 중 하나이다.

2.8. 전설과 신화들

(1) 전설과 신화들은 본래 비허구였는가? 원래 문자 그대로의 사실만을 전달하려 했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 허구로서 받아들여지는가? 월튼은 이에 반대한다. “많은 신화들은 직설적인 참 주장으로 간주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그렇게 간주되었을 때라도 내내 허구로도 간주되었을 것이다.” (p. 151[95]) 그는 여기서 가능성만을 제시하는데, 신화가 사실을 전달하는 것으로 여겨지면서도 허구로써 받아들여지는 것이 가능하고, 신화를 창작하고, 전달하고, 감상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정말로 참이었는지에 대한 문제는 애초에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수 있다. 이러한 점을 허용하는 것이 이 이론의 강점이라고 주장한다.

2.9. 참과 실재에 대한 하나의 주석

(1) 월튼은 지금껏 허구와 실재, 사실을 대조시켜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실재가 객관적이라는 넓은 범위에서의 실재론이 가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실재가 객관적이지 않더라도, 무엇이든지 실제 세계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참과 실재에 대해 특별한 종류의 태도를 취한다.

(2) "실제 세계와 허구적 세계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 중 하나는 (만약 양자 모두 어쨌든 인간이 만든 것이라 할 때) 우리가 그것들을 만드는 방식에 있다.” (p. 160[101]) 허구적 작품은, 적절한 환경 아래 그 스스로 허구적 참을 발생시킬 수 있는 반면, 하나의 역사서 또는 연구서가 그렇게 (실제 세계의) 참을 발생시킬 수는 없다.

2.10. 두 종류의 상징?

(1) 재현적 작품은 비재현적 예술 작품(비록 1.8에서 보았듯이 월튼의 분류에 따르자면 그 외연은 굉장히 좁겠지만)과, 그리고 보고서와 교과서와 같은 (전형적) 비허구 작품과 구분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디에서 말인가?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분류는 무엇인가?

(2) 월튼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종류는 “해명하는 것이 있기에는 너무 큰 개념일 것 같다” (p.162[103]) 고 말한다.

(3) “상징” 또는 “기호”는, 일상적 사물과 비재현적 예술 작품을 배제하면서 허구적 작품과 비허구적 작품 모두를 포함할 것이고, 우리의 과제는 허구적 기호와 비허구적 기호를 구분하는 것이라는 제안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가 허구와 비허구적인 것을 구분하고, 월튼이 말하는 재현을 포함하는 것이기 위해서는, 문자 또는 그 비슷한 것들로만은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 한 가지 제안은 “상징” 또는 “기호”가 명제를 특정하는 것이고, 이 종류는 그렇게 특정되는 명제로 무엇을 하는지에 따라 분류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4) 그러나 ‘명제를 특정하는 것’ 또한 불분명하다. 명제를 특정하는 것이 명제를 사용하는 것보다 논리적으로 앞서는가? 많은 경우에서 어떤 것이 (특히 비언어적인 경우에서) 명제를 골라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명제를 사용하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8.8 참조: 그림들이 특정한 명제를 골라내는 것은 그것이 특정한 믿는 체하기 게임에서의 역할에 의해서라고 월튼은 주장한다.) 그런데 만일 이런 것까지 포함한다면, 이 종류는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확장될 위험이 있다.” (p. 163[104]) 예를 들어, 사실들은 명제를 참으로 만든다. 하나의 돌은 돌이 있다는 명제를 참으로 만든다. 유비적으로, 재현적 예술 작품은 특정한 명제를 허구적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자 또한 이러한 종류에 포함시켜야 하는가? 관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차이에 호소하는 것은 불명료하다고 월튼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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