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ton, Kendall L. [1990] (2019). 미메시스: 믿는 체하기로서의 예술[Mimesis as make-believe: on the foundations of the representational art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양민정 역). 성남: 북코리아.
*해당 인용이 원문에서 n 페이지, 국역본에서 m 페이지일 때 다음과 같이 표시: (p. m[n])
재현과 믿는 체하기
“재현적(representational) 예술 작품이 뿌리내리고 있[는] [...] 활동들은 아이들의 믿는 체하기 게임과의 연속선상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p. 40[11])
“재현적 예술 작품들은 그러한[믿는 체하기] 게임에서 소도구(prop)로서 기능한다” (p. 40[11])
(1) ‘재현적 예술’로써 월튼은 하나의 새로운 범주를 고려하고 있고, ‘재현적 예술’, 또는 줄여서 ‘재현’은 특히 허구(fiction)을 염두에 두고 있음. ‘허구’ 또한 더 넓은 뜻에서 쓰이며, ‘허구’와 ‘재현’은 상호교환가능하게 쓰임.
“믿는 체하기 게임은 상상 활동의 한 종류이며, 특히 소도구를 포함하는 상상 활동이다.” (p. 41[12])
1.1. 상상하기
(1) 프레드의 백일몽: “프레드는 어느 한가한 순간 혼자서 생각에 잠긴다. 성공하지도 못하고 인정받지도 못했다고 느끼던 그는 자신이 부자이고 유명해지는 백일몽을 꾸기 시작한다. 그는 박수갈채를 보내는 지지자들의 모습과 고관들을 방문하는 자신의 모습, 거대한 저택, 사랑스러운 여인들, 멋진 차의 이미지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결국 구두를 팔아야 하는 현실로 되돌아온다.” (p. 42[13])
(2) 모든 상상적 활동이 이 예시의 특징들을 공유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유의할 것.
(3) 프레드의 백일몽에 있어서 특징적인 요소는 (a) 의도적(deliberate)이라는 점, (b) 현행적(occerrent) 심적 사건을 포함한다는 점, (c) 독자적(solitary)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모든 상상이 그렇지는 않다. 상상적 활동은 (a’) 자생적(spontaneous)일 수 있으며, (b’) 현행적일 필요가 없고, (c’) 사회적(social)일 수 있다.
(4) “무언가를 상상하는 것은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전적으로 양립가능하다.” (p. 13)
(5) 명제를 상상하는 것, 사물을 상상하는 것, 무엇을 한다고 상상하는 것 사이의 차이점은 중요하나, 나중에 논의함.
- 자연발생적인 상상하기와 의도적인 상상하기
“종종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 어떤 경우에, 상상하기는 우리가 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p. 43[14])
(1) 프레드의 백일몽은 의도적 상상하기의 한 예시.
(2) 그러나 이 둘은 명확한 구분은 아니다. 우리가 상상에 대해 가지는 통제권은 다양한 정도가 있으며, 단일한 상상적 경험에 자생적 상상과 의도적 상상이 결합되어 있을 수 있다.
(3) 자생적 상상 또한 상상하는 사람의 통제 하에 놓일 수 있음. “만약 나 자신이 막대사탕 줄무늬가 있는 북극곰이 달을 뛰어 넘는 것을 자연발생적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나는 내가 원한다면 그 대신 물방울무늬의 회색 곰이 별을 뛰어넘는 것을 상상하거나 상상하기 자체를 그만둘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p. 45[15])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일부 경우도 있다.
“그 경험[자연발생적 상상]은 의지와는 독립적이라는 점에서 실제 지각 혹은 실제 세계와의 다른 상호작용과 더 유사하다.” (p. 44[14])
(4) 이러한 점, 그리고 상상된 내용이 거짓이라는 증거가 의식에 강하게 나타나도록 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자생적 상상은 대체로 의도적 상상보다 ‘생생‘하거나 ‘현실적‘일 수 있다.
- 현재 떠오르는(occurent, 현행적) 상상과 현재 떠오르지 않는 상상하기
“백일몽이 단순히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상상하기 등의 개별적인 심적 사건들, 상상하기 행위들의 비연결적 연속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양한 상상하기는 연속적인 하나의 옷감으로 함께 짜인다. 그러나 특정한 지점에서는 그중 일부의 가닥만이 표면에 보인다.” (pp. 47-48[17])
(1) 믿음이 현행적 믿음과 비현행적(경향적?) 믿음으로 나뉘듯이, 상상 또한 그러하다.
(2) 프레드가 복권에 당첨되어 백만장자가 되어 그 돈으로 선거에서 승리하고, 은퇴하여 남프랑스의 별장으로 떠난다는 것을 (현시적으로) 상상할 때, 프레드는 또한 그가 선거에서 승리한 것이 부정선거를 통한 것이 아니라는 점, 은퇴 후 거처가 지중해 근처의 따뜻한 곳에 있다는 점, 은퇴할 적에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 등을 상상한다. 이러한 생각이 현행적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3) 누군가가 A를 현행적으로 상상하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에서 그가 A를 비현행적으로 상상한다는 것이 따라나오는 것은 아니다.
(4) 비현행적 상상이 항상 무의식적 상상은 아니다. 또한 현행적 상상이 항상 의식적일 필요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이 부분은 이해가 잘 가지 않음. 혹시 내가 현행적 상상을 하고 있다고 항상 자각될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 혼자 하는 상상하기와 사회적 상상하기
“그러나 사람들이 상상하기에 항상 혼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공상은 때때로 사회적인 사건일 때도 있다. 사적인 공상만큼이나 집단적인 백일몽도 있다.” (p. 49[18])
(1) 우리는 때때로 무엇을 상상할지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합의하기도 하며, 이러한 상상의 경험을 공유하고 토론하여 더 나은 것을 골라 상상할 수 있다.
(2) 집단적 상상(collective imagining)의 참여자들은 일치하는 상상을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신이 상상하는 것을 상상하고 있다는 점을 알며, 다른 사람들 또한 이 점을 안다는 것 또한 안다.
(3) 명시적 합의를 진행하는 것은 일치하는 상상을 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나, 이는 그 상상을 의도적인 것으로 만들고, 따라서 ‘생생함’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명시적 합의를 하지 않고도 집단적 상상을 하는 방식이 있는데, 인형, 목마, 장난감, 또는 재현적 예술 작품을 활용하는 것이다.
- 상상하기와 품기(entertaining)
(1) “상상하기를 이해하는 유망하지만 실은 부적절한 한 가지 방식을 잠깐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 p라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p라는 명제를 품는(entertain) 것,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그것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 50[19])
(2) 품기, 주목하기, 고려하기가 현행적 심적 사건일 경우 => 비현행적 상상을 배제하게 됨
(3) ‘비현행적 품기’라는 것이 있을 경우 => 상상하지 않았으면서 품는 경우가 있음. 예를 들어, p의 진리값을 모른다는 것 외에 내가 p에 대해 아무런 태도도 가지지 않았을 경우.
(4) ‘품기’가 현행적 상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라도 유용한가? => 누군가 p인 것이 아니라 믿는다고 하자. 그는 p와 ~p 모두 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그 둘 모두 (현행적으로) 상상한다고 말하는 것은 의아스럽다.
“상상하기(명제적 상상하기)는 (명제적) 믿기나 욕구하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명제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p. 52[20])
(4) 월튼은 여기서 상상하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완전한 적극적인 설명은 제공하지 않음.
“대부분의 상상하기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실제 세계에 의존하고 있거나, 실제 세계를 겨냥하고 있거나, 실제 세계에 닻을 내리고 있다.” (p. 53[21])
(1) 상상에서 실제 사물은 다음 세 가지 주요 역할을 가질 수 있는데, (a)상상을 촉발(prompt)하거나, (b)상상의 대상(object)이 되거나, (c)허구적 참을 발생시킨다. (a)의 역할을 맡는 것을 촉발자(prompter)라고, (b)의 역할을 맡는 것을 상상의 대상이라고, (c)의 역할을 맡는 것을 소품(prop)이라고 한다.
1.2. 촉발자
(1) 촉발자는 어떠한 특정한 상상을 촉발한다. a가 없었더라면(또는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행위자 S가 특정한 명제 p를 상상하지 않았을 때 a는 S의 p에 대한 상상의 촉발자이다. 또는, a가 S로 하여금 p를 상상하게 만들었다면 a는 S의 p에 대한 상상의 촉발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환각적 마약이나 뇌수술 또한 전형적인 촉발자이겠지만, 월튼은 여기서 지각, 경험, 인지됨으로써 상상을 촉발하는 촉발자에 관심을 가진다.
(2) 촉발자는 우리 상상의 지평을 넓힌다는 가치, 우리가 상상하지 않았을 것을 상상하게끔 해준다는 가치가 있다. 자연물은 이러한 일을 우연적으로만 해내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는 종종 인공적으로 촉발자를 만들어낸다. 눈사람, 인형, 장난감 트럭 등이 그 예시.
(3) 인공적 촉발자는 우리의 상상적 사고를 남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도 만들어진다. 이런 경우에서 촉발자를 사용하는 것이 언어적 설명에 비해 어떤 이점을 가지는가? (a) 구체적으로 무엇을 상상하기를 바라는지 명시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수 있으며, (b) (비언어적) 촉발자를 통해 이루어진 상상이 언어적 지시에 의한 상상보다 종종 덜 인위적, 의도적이며, 더욱 자생적이다.
(4) “촉발자는 토론으로 중단시키는 일 없이 참여자들의 상상하기를 통일하고, 또 그러한 통일을 예상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p. 56[23]) 우리는 특히 집단적 상상에서 어떠한 대상을 어떤 상상의 촉발자로서 간주할지 합의 또는 약정(stipulate)할 수 있다.
1.3. 상상하기의 대상
“많은 상상하기는 실제 대상들에 대한 것이다. [...] 어떤 사람이 그것에 대해 상상하는 사물들은 그의 상상하기의 대상들이다.” (p. 58[25])
(1) 많은 촉발자들은 그것이 촉발하는 상상의 대상이기도 하다. 봉제 인형을 가지고 노는 아이는 그 인형으로 촉발된 상상을 하지만, 또한 그것이 사람이라고(인형이라고 상상하지 않으면서) 상상한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그런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상상의 대상이면서 촉발자가 아닌 경우도 가능하다.
(2) 대상을 가지는 상상하기에 있어서, 우리는 때때로 그 상상하기의 대상에 관심의 초점이 있을 수 있지만 (부시가 마권업자인 상상), 대상 자체에는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그루터기가 곰인 상상).
(3) 대상에 관심이 없을 때 대상을 두고 상상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러한 상상이 더욱 “생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
1.4. 자신에 대해 상상하기
“나는 사실상 우리의 모든 상상하기가 부분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상상하기라고 생각한다. 우리 스스로가 [...] 믿는 체하기 게임의 중심인물, 주인공이 아닐 때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떤 역할 - 적어도 다른 사건들의 관찰자 역할이라도 - 을 한다.” (p. 62[28])
(1) de se 상상하기의 가장 흔한 형태는 안으로부터 상상하기, 즉 어떤 1인칭적 상태에 있음을, 무언가를 하거나, 경험한다고 상상하기이다.
(2) 월튼은 안으로부터 상상하기가 반드시 자신을 대상으로 가지는 상상하기인 것으로 간주함. “코뿔소를 본다고 상상하는 것은 자신이 코뿔소를 본다고 상상하는 것이지, 단지 코뿔소 보기의 한 예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p. 66[31])
(3) 모든 de se 상상하기가 안으로부터 상상하기인 것은 아님. 내가 나 자신이 (예를 들어, 그레고리의 상상 “그레고리가 ...”) F한다는 것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한다고 가정하자. 이때 나는 F하는 것이 나임을, 내가 F하고 있음을 안에서 상상하고 있지 않음에도 확신한다. “일반적으로 de se 상상하기는 상상하는 이가 그의 상상이 자신에 대한 상상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 수 없는 그런 상상하기이다” (p. 64[29]) 이 경우 이것은 de se 상상하기이지만, 안에서 상상하기는 아니다.
(4) 또한 어떤 경험을 상상하는 것이 아닌, 어떠한 속성을 가지는 것을 경험 없이 상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13세기 항해사의 후예인 것을, 또는 희귀 혈핵형을 가지는 것을 상상할 수 있지만, 이것은 안으로부터 상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내가 13세기 항해사의 후예이라는 것, 내가 희귀 혈핵형을 가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다.
(5) “그러나 de se 상상하기에서 나타나는 자아에 대한 개념이 매우 풍부하거나 완전할 필요는 없다 [...] 나 자신에 관한 어떤 언어적 재현(내 이름이든, 나 자신에 관한 기술이든, 또는 1인칭 대명사든)도 내가 상상할 때 나의 사고 속에 떠오를 필요가 없다” (p. 67, [31])
(6) 대부분의 상상이 안으로부터 상상하기라는 점은 상상에 대한 감정적 참여에 대해 설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7) 상상하는 사람이 de se 상상의 대상일 때는 또한 소도구(prop)로써 작동한다.
1.5. 소도구와 허구적 참
“소도구들은 허구적 참을 발생시키는 것, 즉 그것들의 본성이나 존재 덕분에 명제들을 허구적으로 만드는 것들이다.” (p. 75[39])
(1) 어떤 명제가 허구적(fictional)이라는 것, 또는 어떤 명제가 “어떤 허구적 세계에서 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명제가 허구적이라는 것이 단지 그것이 상상된다는 것일 수는 없다.
(2) 에릭과 그레고리의(E&G) 게임: 이 게임에서 모든 나무 그루터기는 곰으로 “간주된다”. 그들이 그루터기를 마주치고 저기 곰이 한 마리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그렇게 상상하며, 저기에 곰이 있다는 점은 이 게임 속에서 허구적이다.
(3) 여기서, 그들이 마주친 것이 그루터기가 아니라 바위이며, 단지 그들이 착각했을 뿐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들은 저기에 곰이 한 마리 있다고 상상하였지만, 그것은 이 게임 속에서 허구적이지 않다. 또는, 그들이 보지 못한 그루터기가 그들 뒤에 놓여 있다고 하자. 둘 중 누구도 뒤에 곰이 있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뒤에 곰이 있다는 것은 허구적이다.
(4) 이 게임에서, 나무 그루터기는 소도구(prop)이다. 나무 그루터기의 존재, 위치 따위가 허구적 곰의 존재, 위치 등을 허구적으로 만든다.
“소도구들은 누군가가 상상하거나 상상하지 않는 것과는 독립적으로 허구적 참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떤 실제이든 잠재적이든) 상상하는 이와는 상관없이 그 자체만으로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소도구들은 사회적인, 혹은 적어도 인간에 의한 배경 안에서만 기능할 수 있다.” (p. 76[38])
(5) 발생의 원칙(principle of generation): 소도구의 본성이나 존재들로부터 허구적 참을 이이끌어내는 원칙. E&G 게임에서 이는 명시적으로 주어졌으나 (“이 게임에서 모든 나무 그루터기는 곰으로 간주된다”) 명시적이지 않을 수 있으며, 참여자들이 반드시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 필요 또한 없다. 그러나 발생의 원칙이 효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암시적으로라도 참여자들에게 그것이 효력을 가진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의 원칙은 만약 그것이 어떤 특정 맥락 안에서 그러그러한 상황이 성립하면 이러이러한 것이 상상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해된다면, 그 맥락 안에서 효력을 가진다. 그러한 이해는 명시적이거나 의식적일 필요가 없다.” (p. 79[40-41])
“허구적 참은 어떤 맥락 안에서 어떤 것을 상상하라고 하는 어떤 규정이나 명령이 있다는 데 있다. 허구적 명제들은 실제로 상상되는 아니든 간에 상상되어야 하는 명제들이다.” (pp. 77-8[39])
(6) 어떤 규칙은 정언적(categorical)이다. 예를 들어, 집단적 백일몽에서 참여자들이 맺는 합의는 무엇이 상상되어야 하는지를 그 자체로 규정짓는다. 또한 어떤 규칙은 조건적이다. ...한 상황이 일어난다면 ...가 상상되어야 한다. E&G 게임의 규칙은 조건적이었다. 이를 상상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그 게임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그 게임을 부적절하게 참여하는 것이다.
(7) E&G 게임에서, 규칙의 적용이 그루터기가 놓여 있다는 점에 달려 있다는 뜻에서 그루터기는 허구적 참을 발생시킨다.
(8) 우리는 모든 명제에 대해 그것을 상상하거나 그 부정을 상상해야 하지는 않음. E&G는 그들이 상상하는 곰이 얼마나 클지, 혈액을 순환시키는 심장이 있는지, 식성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비현행적으로라도) 상상할 필요가 없다. “하나의 명제는 그것에 대한 질문이 떠오른다면 상상해야 하는 것일 때 허구적이라고 하자.” (p. 79[40])
(9) 허구 자체가 모순적인 경우(어떤 명제 p에 대해 p와 ~p 모두 허구적일 경우)를 제외한다면, “만약 p가 허구적이라면, p를 상상하기와 ~p를 상상하기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때 전자를 상상해야 한다.” (p. 79[40])
(10) 허구성과 참은 유사하다. “믿음이 참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상상하기는 허구적인 것을 목표로 한다. 참인 것은 믿어져야 하는 것이며, 허구적인 것은 상상되어야 하는 것이다.” p. 80[41]
(11) 그러나 허구성은 참의 한 종류는 아니다. 허구적 세계에서 참인 것과 실제로 참인 것은 같은 유에 속하지도 않는다. “’p라는 것은 허구적이다’라든지 그 말의 구어체적 표현들은 p에 참이 아닌 허구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p. 81[42])
(12)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p가 허구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p가 거짓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13) “소도구들은 허구적 세계와 그 내용에 일종의 객관성, 즉 인지자와 그들의 경험으로부터의 독립성을 부여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 소도구들로 하는 모험의 흥분에 크게 기여한다.” (p. 82[42]) 우리는 무엇이 참인지에 대한 문제와 마찬가지로, 무엇이 허구적인지에 대한 문제에서 무지하거나 틀리기 쉽다. 허구적 세계는 외재적이며, 사람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14) 소도구는 비명제적 상상 또한 규정하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소도구는 허구적 참을 발생시키지는 않으나, 믿는 체하기 게임에서 비명제적 상상 또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