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셀라스, 「언어놀이에 관한 몇 가지 성찰」

Sellars, Wilfrid, “Some Reflections on Language Games”, Science, Perception and Reality, New York: Humanities Press, 1963, 321-358.

서론

1.논문의 목표는, 언어놀이 이론에 대한 가능한 한 가지 치명적인 논박을 회피하고 언어놀이
이론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2.반박은 다음처럼 전개된다.

(1) 언어(L이라고 하자)를 배운다는 것은 L의 ‘규칙을 준수하기’(obeying the rules)를 배운다
는 것이다.
(2) 행위(A라고 하자)를 명령하는 규칙은 A에 대한 표현을 포함하는 언어 내의 문장이다.
(2) 따라서 언어표현(E라고 하자)의 사용 규칙은 E에 대한 표현(즉 메타언어표현)을 포함하는
문장이다.
(3) 따라서 L의 규칙을 준수하기를 배운다는 것은 L의 규칙을 언어적으로 정식화할 수 있는
언어인 메타언어(ML)를 사용할 능력을 전제한다.
(4) 그러므로 L의 사용법을 배우는 것은 ML을 사용할 능력을 전제한다.
(5) 마찬가지로 ML을 배우기 위해서는 ML의 규칙을 정식화할 수 있는 메타-메타언어(MML)
를 사용할 능력을 전제한다.
(6) 이는 언어 학습에 관한 무한퇴행을 불러일으킨다.
(7) 따라서 언어놀이 이론은 오류를 포함하며 거부되어야 한다.

3.이 반박을 회피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규칙 준수’(obeying the rules)를 ‘규칙 순
응’(conforming to the rules)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규칙 순응이란, 단순히 상황 C에서 A를
행하는 일을 의미한다. 규칙 순응은 행위자가 어떻게 A를 하느냐를 고려하지 않는 단순한 행
동주의적 조건이며, 행위자는 규칙에 순응하기 위해 언어의 규칙을 명시적으로 인지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4.이 방법은, 규칙 순응이 언어의 규칙을 정식화하고 명시하는 언어에 대한 학습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점에 호소함으로써 무한퇴행을 회피하고자 한다.
5.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언어놀이라는 것이 단순히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되며, 규칙 준수 행위나 규칙을 정식화하는 능력이 언어놀이에 본질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셀라스가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언어놀이가 논리적으로 규칙 준수 행위를 함축한다
는 주장이다.
6.하지만 위의 해법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규칙 순응 행위는 언어 학습, 언어 놀이의 조
건으로서 지나치게 약하다. 언어를 배우고 놀이할 때 우리는 해당 언어놀이를 ‘마음에
두’(have in mind)거나, 단순한 행동이 아닌 언어놀이 내의 ‘움직임’(手; move)으로서 해당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7.그렇다면 규칙 준수 행위를 언어학습의 조건으로 설정하면서 규칙을 정식화하는 데 필요한
메타언어를 전제하지 않게 한다면 어떤가? (셀라스는 이를 메타피지쿠스Metaphysicus의 해결
책이라 일컫는다) 이 해결책은 규칙에 대한 언어적 정식(formulation)과 정식이 지니는 의미
로서의 규칙 자체를 구분한다. 이때 규칙과 정식의 관계는 명제와 문장의 관계와 비슷하게 된다.
8.이에 더해, 언어놀이의 학습이란 요구들(demands)의 구조를 파악하고 (언어로 표현되든
표현되지 않든 간에) 이 요구를 충족하도록 배우는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 형이상학적
언어이론은 언어를 놀이하는 일이 다음의 3가지를 수반한다고 본다.

(a) 일련의 요구 및 허가들의 집합을 의식하기
(b) 상황 C에 A를 행할 수 있는 능력
(c) 그것을 놀이 규칙의 요구로서 행하도록 내적으로 동기부여 받기

9.이 해결책은 규칙 자체에 대한 의식을 요구하면서 그 언어적 정식에 대한 의식은 거부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10.그러나 여기서 ‘의식한다’는 표현의 뜻은 무엇인가? 이 표현은 언어표현의 옳은 사용, 그
른 사용 등 언어에 대한 메타적 의식을 수반한다. 명제, 속성, 관계, 요구 등에 대한 이런 의
식이란 바로 언어 놀이에서의 위치(position)에 다름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이 해결책은 다시
순환에 빠진다.

패턴 지배적 행동과 규칙 준수 행동

11.형이상학적 해결책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이 해결책은 한 가지 옳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언어놀이를 하고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이러이러한 행위가 놀이 내의 움직임
이기 때문에 하는 것’을 수반한다. 이는 놀이의 움직임에 대한 언어를 사용하는 일을 포함하
지는 않는다.
12. 놀이가 요구하기 때문에 행한다는 것은 규칙 준수 행위와 동일시될 필요가 없다. 또 이는
단순한 규칙 순응 행위와도 동일하지 않다. 규칙 준수 행위와 규칙 순응 행위는 규칙 따르기
의 유이한 선택지가 아니다. 양자를 유이한 선택지로 보는 것은 잘못된 이분법이다. 놀이 규
칙의 요구를 온전히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비의도적으로 행해졌으면서도, 규칙을 필연적 원
인으로 해서 일어나는 행위가 성립하는 것이다.
13-15. 이 점은 예컨대 진화를 비유로 해서 이해할 수 있다. 진화는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조
작적으로 형성된 과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화를 가능케 한 일련의 생물학
적 연관관계들을 제시할 수 있다. 그 연관들은 진화를 성립시킨 ‘필연적’ 원인들이다.
16.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언어놀이 체계를 원인으로 해서 상황 C에 A를 행하는 것이다. 이
는 언어규칙에 대한 파악 및 ‘의도적’ 행위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이제 우리는 전자를 패턴
지배적 행동(pattern governed behavior)으로, 후자를 규칙 준수 행동(rule obeying
behavior)으로 구분함으로써 2에 제시된 반박을 회피할 수 있다.
17. 패턴 지배적 행동은 자극-반응 강화 학습과 연관되어 설명될 수 있으면서도, 언어놀이 내
의 ‘위치’와 ‘움직임’, 즉 메타놀이에서 ‘형성’(formation)과 ‘변환’(transformation)1 규칙으
로 규정되는 것들을 포함한다.

위치와 움직임: 도입 이행과 이탈 이행

18.생명체가 어떻게 패턴 지배적 행동을 학습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일은 논문의 목표가
아니며, 어떻게 언어놀이를 학습하는 일이 가능한가를 정당화하는 일로 목표는 달성되었다.
19. 패턴 지배적 행동은 언어 놀이 내의 위치로서 행해진다. 누군가가 언어 놀이 내의 위치로
서 행위를 하게 되는 경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이는 추론적인 경우와 비추론적인 경
우이다. 추론은 위치에서 위치로 움직이는 일이고, 놀이 밖에서 놀이의 초기 위치(initial
position)로 옮아가는 관찰 문장(observation sentences)은 후자에 속한다.
20-21. 지각을 하고 “x는 붉다”라는 관찰 문장을 말하는 일, 그리고 “나는 p를 해야 한다”를
말하고 행위에 옮기는 일은 추론이 아니며, 언어 놀이 바깥과 연결되어 있지만 명백히 언어활
동의 일부이다.
22-23. 따라서 언어놀이에는 움직임(moves)과 이행(transitions)이라는 두 가지 상태가 있다.
이행은 다시 언어도입 이행(language-entry transitions)과 언어이탈 이행
(language-departure transitions)으로 나뉜다. 우리는 비언어에서 언어로의 언어도입 이행,
언어-언어 사이의 움직임, 언어에서 비언어로의 언어이탈 이행이라는 세 가지 언어놀이 행위
를 얻게 된다. 자극-반응 연결(S-R connection) 도식을 통해 이 세 가지 놀이행위는 다음처
럼 표기될 수 있다.

언어도입 이행: S-(R)g
언어-언어 움직임: (S-R)g
언어이탈 이행: (S)g-R

24.여기서 하나의 자극이 상황별로 언어놀이에 포함될 수도 있고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 낸 [red]라는 소리 유형 K는 ‘붉다’로도, 아니면 모 지휘자에게는
3옥타브 B플랫 음으로도 들릴 수 있다.

(in C1) (K-R)g
(in C2) K-(R)g

보조 위치: 추론의 형식적 원리와 질료적 원리

25.앞에서 언어놀이에 이동과 이행이 있다는 설명이 제시되어쓴데, 언어놀이의 위치에는 사
실 제3의 상태가 있다. 이 상태에 해당하는 문장들은 필요하다면 언제 어느 때에나 자유롭게
주장될 수 있는 지위를 점한다. 이는 기초 문장(primitive sentence)에 해당하는 것으로, 셀
라스는 이를 보조 위치(auxiliary positions)라 부른다.
26. 언어놀이 내에 “모든 A는 B이다”라는 보조위치가 있다고 한다면, 이 문장은 “x는 A이다”
에서 “x는 B이다”로의 움직임을 간으케 한다. 이는 보조 위치와 움직임이 어느 정도 동치 관
계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27. 이런 보조 위치가 성립한다면 우리는 이 보조위치 문장을 ‘필연적으로’(necessarily)라는
양상적 어휘를 통해 표시할 수 있다. 이때 양상에 관한 문장들은 메타언어수준이 아닌 패턴
지배적 행동 수준에서도 성립한다. (물론 양상에 관한 논의는 메타언어 즉 규칙언어 수준에서
비로소 온전히 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
28. 이제, 움직임들과 보조위치들은 두 가지로 나뉜다. 이들은 분석적이거나 종합적, 또는 형
식적이거나 질료적이다. 이 추론과 문장들의 타당성이 특정 술어들에 의존하는가 그렇지 않은
가의 여부로 양자를 구분할 수 있다.
29. “모든 A는 B이다”라는 문장이 자연법칙이라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x는 A이다”에서 “x는
B이다”로의 추론이 질료적으로 타당하다(materially valid)고 말할 수 있다. 단, 이 문장과 추
론이 어느 언어에 속하든 상관없다는 것은 아니며, 사용자 자신의 언어놀이 내에서 성립하는
문장이어야 한다.

의미론적 규칙과 ‘의미 관계’

30.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언어놀이 내에 위치들이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
이 다름 아닌 ‘언어’놀이라면, 단순한 놀이와 달리 움직임과 위치들이 ‘의미’를 지녀야 하지
않는가? 언어놀이 이론은 의미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가?
31. “x는 t를 의미한다”라는 의미론적 문장은 “‘x’가 패턴 지배적 행동으로서 역할을 수행한
다”는 말과 동치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의미론적 문장이 ‘x’가 언어 내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온전히 설명해준다거나 그런 역할에 대한 설명을 대체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32. “x는 t를 의미한다”라는 이 의미론적 문장은 마치 언어와 비언어적 속성, 언어와 대상 내
지 언어와 대상 집합 사이의 관계를 뜻하는 것처럼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고전적 경
험주의가 범하는 오류이다.
33. 많은 철학자들은 구문론적 규칙과 의미론적 규칙을 구분하고, 의미론적 규칙이 언어 외적
인(extra-linguistic) 의미 개념을 내포한다고 생각해왔다. 이 구분은 마치 이 논문에서 구분
한 자극-반응 연결과 단어-사물 연결 사이의 구분과 동일한 듯 보인다. 그러나 단어-사물 연
결관계는 상황에 따른 반응으로서 자극-반응의 연결이다. 이 연결은 ‘상황이 이러이러하다고
관찰하는 것’과는 명백히 다르다. 관찰은 이미 개념적 틀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34. 이제 개념을 습득하는 일은 규칙 준수 행동과 구별된다는 점(1~18)이 명백하다. 관찰을
하면서 무언가가 붉다는 문장을 발화하여 붉음 개념을 적용하는 일은, 규칙을 준수하는 일과
다르다. 후자는 규칙이 적용되는 상황, 붉음 개념과 규칙을 구성하는 개념들을 모두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35. 규칙 순응 행동과 규칙 준수 행동에 관한 구분을 구문론적 규칙에 사용하듯, 우리는 의미
론적 규칙에 대한 순응 행동에서 점차 규칙 준수 행동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가?
그러나 관찰은 결코 규칙 준수가 될 수 없다. 규칙 준수 행동이 될 수 있는 것은 언어-언어
사이의 구문론적 규칙에 의해 지배되는 움직임뿐이다. 관찰은 본질적으로 언어-언어가 아니라
언어-사물 간의 자극-반응 연결 관계이다.
36. 언어-언어 이동이 문장을 반성하고 비판할 능력이 있어야 비로소 추론이 될 수 있듯, 언
어도입 이행은 단순한 자극-반응의 수준을 넘어야 관찰일 수 있다. 그러나 관찰이 되기 위한
조건은 의미론적 규칙 준수가 아니라, “x는 붉다”에서부터 이런저런 추론을 하는 능력이다.
37. 언어 밖의 의미론적 규칙을 상정하고 이를 따름으로써 ‘붉음’ 같은 ‘정의되지 않은 기술적
술어’의 의미를 설명하려는 입장은 선(先)언어적 개념(pre-linguistic concept) 내지 원(原)개
념(ur-concept)에 대한 관념을 상정한다. 우리는 이런 가정을 뒷받침해보기 위해 두 가지 가
능한 선택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선택지 모두 문제를 떠안는다.

(1) 원개념은 상징 구조, 즉 넓은 의미에서 언어이다.
(2) 원개념은 상징 이전적인 유(類)에 대한 식별 능력을 지닌 추상적 심적 능력이다.

(1)에서 원개념은 여전히 언어라는 점에서 또 다시 원개념 이전의 의미론적 규칙을 요청해야
하며, 이런 식의 퇴행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나의 언어는 의미론적 규칙 준수라는 관
념에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2)를 선택할 때 우리는 본유관념에 관한 고전적인 합리론적 견해
로 복귀하게 되며 본유관념을 철학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는다.
38. ‘붉음’ 같은 개념의 관찰적 역할이 조건화된 반응이라고 해도, 관찰적 개념의 의미는 이
자극-반응 연결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자극-반응 연결은 “’붉음‘은 t를 의미한다”의 필요조건
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의미와 직접 경험

39.소박한 실재론의 또 한 가지 착오는 감각이나 인상을 사유, 생각과 혼동한다는 것이다.
고전적 경험주의는 붉음에 대한 감각 인상과 붉음에 대한 사유를 혼동하는데, 후자는 인식적
인 의미로 지식을 구성하지만 전자는 비인식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며 지식을 구성하지 않는
다.
40. 감각은 물론 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작용이다. 그러나 감각은 내가 타인의 감각내용을
기술하고 전달할 수 있으며 나의 감각내용을 타인이 기술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공적이다.
41. 관찰행위 즉 p임을 관찰한다(observing that p)는 것은 흔히 경험과 동일시되어 왔다. 물
론 관찰은 비인식적 감각인상과 함께 일어난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관찰이 분석적으로
감각인상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붉음에 대한 경험은 붉은 대상에 반응하여 관찰문장을 진
술할 때 그에 수반하여 일어나지만, 경험 자체는 어떤 인식도 아니다.
42. ‘직접 경험’은 다음 두 가지 상황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용어이다.

(1) 나는 저기에 p인 어떤 것을 본다(I see that there is something p).
(2) 내가 보는 무언가가 p처럼 보인다(I see something that looks p).

그런데 (2)는 (1)을 정의하거나 (1)과 독립된 담화를 구성하지 못한다. 오히려 (2)는 “x는 p이
다”를 확신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 때 사용된다. (2)의 사용은 (1)에 의속하는 것이다. 이제, 같
은 대상을 관찰할 때 나와 타인에게 일어나는 직접 경험이 다르다고 가정해보자.
43-44. 나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이 각각 φ-상태, ψ-상태라고 하자. 이론 이전적 층위에서는,
즉 순전히 경험적인 층위에서만 보자면, 같은 대상을 접하고도 다른 감각 경험이 일어났는데
이 사실을 경험적으로 식별하고 확인할 방법이 없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론적인 층
위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적 감각 경험에 관한 온전한 이론이 도입된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의 감각 경험에 대해 기술하고 확인할 언어가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론언어를 지니고
도 우리의 감각 경험이 식별 불가능한 채로 다를 가능성이란 성립하지 않는다.
45. 제대로 된 이론이라면, 완전히 상이한 감각경험이 일어나는 특권적 공간만을 제외한 채
보편적으로 타당한 이론이란 있을 수 없다.

경험 언어 내에서의 질료적 움직임

46.우리는 관찰 술어의 용법을 배우는 일이 단순히 표준적 조건에 반응하는 일 이상의 것임
을 기억해야 한다. 관찰언어를 배우는 일은 ‘붉음’, ‘초록’ 같은 개별 술어를 고립적으로 배우
는 일이 아니라 해당 술어들과 관련된 언어들의 연결망과 그에 관련한 적절한 상황들을 배우
는 일이다.

언어와 행위

47.언어놀이 이론의 구문론적 성격이 언어의 의미론적 차원을 무시한다는 비판은 “x는 t를
의미한다”라는 의미 문장을 분석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었다. 그런데 실용주의자는 다음처럼
비판할 수 있다. 언어놀이 이론의 구문론 중심적 성격은 언어가 본질적으로 실제 세계 속의
사용자들에 의해 쓰인다는 점, 언어 사용자들이 세계를 파악하고 자신의 실천적 욕구를 충족
할 때 언어가 쓰인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가?
48. 실용주의자가 보기에 언어도입 이행, 언어이탈 이행은 충분한 설명이 아니다. 나아가 언
어가 의미를 갖는 이유는 언어가 인간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을 돕는 도구라는 점에 있지 않
는가?
49. 실용주의자는 여기서 “~를 의미한다”(means)나 “~는 참이다”(is true)라는 표현을 올바로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 “s는 p를 의미한다”나 “s는 참이다”를 어떤 문제의 해결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범주적 오류이다. 한편, 실용주의자의 입장이 언어와 행위 사이의 밀접한 연관을 강조
하고 이 연결이 언어의 구조에 내재적이라는 입장으로 재정식화된다면, 실용주의는 철학의 중
요한 전환점을 마련하는 통찰을 내놓은 것이다.
50. 언어의 행위 인도적 성격은 자연에 대한 질료적 움직임(추론)을 통한 파악에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행위를 실제로 인도하기에 충분치 않다. 우리는 이 점에서 행위와 관련된 어휘들
을 필요로 한다. 행위와 관계된 하위언어를 포함하는 한에서만 언어는 행위를 인도할 수 있
다.
51-52. 행위에 관한 언어표현들 사이의 추론관계, 움직임 관계가 있어야 언어적 움직임들은
행위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어떤 움직임들이 분석적 내지 형식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행위는 다른 행위에 분석적으로 포함될 수 있다.

구문론적 놀이를 하기

53.규칙 준수 행동은 대상언어와 메타언어, 대상놀이와 메타놀이의 구별을 전제한다. 규칙
준수로 놀이된 대상언어에서는 움직임이 패턴 지배적 행동에서처럼 규칙에 의해 특정된 위치
들을 예화(exemplify)할 뿐만 아니라, 규칙 자체가 언어적 움직임의 원인이 된다.
54. 규칙은 어떤 방식으로 규칙 준수 행동의 원인으로서 연루되는가? 일단 규칙은 어떠어떠한
행위가 어떠어떠한 상황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규칙은 상황 관련 어휘
와 행위 관련 어휘를 포함한다.
55. 이제 언어도입 이행과 언어이탈 이행을 고려해보면, 규칙 언어의 ‘관찰 낱
말’(observation words)들은 전자에, ‘동기부여적 표현’(motivating expressions)은 ‘행위 수
반 맥락’ 맥락에 위치하여 후자에 포함된다. 후자의 표현들을 자극원인으로서 행위를 결과로
산출한다.
56-57. 다음의 어구와 문장들을 보자.

“비숍” / “이러저러한 모양의 나무조각”
“내 비숍이 상대의 킹을 체크한다” / “이런 모양의 흰색 나무조각과 저런 모양의 검은색 나무
조각이 대각선에 놓여 있다”

체스의 규칙언어에 해당하는 것은 왼쪽의 것이다. 왼쪽의 규칙언어는 오른쪽의 언어를 통해
반응할 능력을 전제한다. 그러나 우리는 왼쪽의 언어들이 단순히 오른쪽 언어의 줄임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 규칙언어적으로 상대의 킹을 체크하는 비숍에 대해 반응하는 일은 비
규칙언어의 관찰문장에서부터 규칙언어로의 언어도입 이행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 규칙언
어 문장 “내 비숍이 상대의 킹을 체크한다”는 실제의 체스판 배열에 대한 반응이지 언어에 대
한 메타언어적 반응은 아니기 때문이다. 체스판 배열에 대한 비규칙언어적 언어도입 이행을
배운 이후에 우리는 체스판 배열에 대한 규칙언어적 언어도입 이행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58. 규칙언어는 우리가 비규칙언어에 대해 이런저런 반응방식을 배우듯 습득된다. 이는 규칙
언어와 비규칙언어 사이의 관계를 생각보다 외면적으로 만든다. 양자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처럼 생각해볼 수 있다. 규칙언어는 “x는 비숍이다”로부터 “x는 이러저러한 모양
의 나무조각이다”와 같은 움직임을 통해 비규칙언어와 연결된다. 규칙언어는 비규칙언어와의
구문론적 관계를 통해 기술적 의미(descriptive meaning)를 지닌다.
59. 그러나 이 구문론적 관계는 완전한 교환가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규칙언어는 비규칙언
어와 달리 명령이나 당위와 같은 규범적 표현들과 연관되는 구문론적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
다. 비규칙언어는 규범적 의미를 지니는 규칙언어 표현들과 연관됨으로써 규범적 의미를 지닌
다.
60. 상기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그림을 짜면 다음과 같다. 규칙언어인 구문론적 메타언어
(ML)와 대상언어(OL)가 있고, 양자는 도입/이탈 움직임2으로 연결되어 있다.
61. 체스언어가 비체스언어 및 실제 체스판 배열과 연결되어 있듯, 메타언어는 대상언어와 구
문론적 움직임을 통해 연결되어 있고 실제 사태와는 언어도입/언어이탈 이행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이때 메타언어는 대상언어를 포함하거나 실제 사태를 포함하지 않은 채 대상언어나 실
제 사태와 연관될 수 있다. 메타언어 내에 ‘α’라는 표현은 대상언어의 ‘red’라는 글자를 포함
하지도 않고 [red]라는 소리도 포함하지 않지만 대상언어표현 ‘red’와도 실제 소리 [red]와도
연결된다.
62. 메타언어 (‘α’)는 여러 대상언어에 공통적인 역할(‘red’, ‘rouge’, ‘rot’, ‘붉다’)을 명시하
는 기능을 할 수 있다.
63. 체스 예시와 비교했을 때, 비-체스 언어는 체스 놀이와 동일하지 않은 반면 비규칙 언어
는 대상언어와 동일하다.3 체스 비유와 다르게, 메타언어는 자기가 정식화하는 규칙을 지니는
언어의 일부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두 경우 모두에서 두 놀이를 합하여 보다 포괄적인
언어놀이를 구성할 수 있다. 체스언어와 비체스언어가 합쳐져 보다 큰 언어놀이를 구성하듯
메타언어와 대상언어는 합쳐져서 보다 큰 언어놀이를 구성한다.
64. 이제 51문단에서 제시된 논의를 다시 해보면, 하나의 놀이를 규칙 준수 행동의 수준에서
하기 위해 해당 놀이를 패턴 지배적 행동 수준에서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목적에
적합한 언어”(Sellars, 1963: 349)를 배운 상태라면 바로 규칙 준수 행동 수준에서 해당 놀이
를 배울 수 있다. 또 행위 명령적 맥락의 어휘와 구분이 많은 언어놀이에 공통된 것이라는 점
도 특기할 만하다.
65. 그리고 규칙 준수 행동은 메타놀이 내의 움직임에만 적용되는 개념은 아니다. 다시 말하
면 규칙 준수 행동의 수준에서 언어놀이를 배운 사람에게는, 실제로 규칙언어에서의 언어적
움직임을 행하고 있지 않음에도 그가 규칙 준수 행동을 하고 있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해당 언어 사용자와 규칙언어에 관한 여러 가지 참인 관계 진술들을 그에게 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동기부여적 맥락과 책무의 개념

66.언어이탈 이행에 관하여, 행위 낱말들을 포함한 문장들은 꼭 동기부여적 맥락이 아니더라
도 동기부여 역할을 할 수 있다. 예컨대 “~를 해야 한다”와 같은 동기부여적 맥락 없이도 “저
기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먹을 것이 있다.”와 같은 문장으로부터 바로 손을 뻗는 행
위로의 이행이 가능하다. 이 경우 행위는 의무가 아닌 욕구나 충동으로부터 이루어진다.
67. 규범적 표현을 학습하는 일은 “나는 A를 해야 한다”에서 A를 하는 행위로 이행하는 경향
을 지니는 일을 수반한다. “~해야 한다”(ought)의 동기부여적 기능은 해당 표현의 의미에 본
질적이다. 즉 상기의 경향을 형성하지 않았다면 “~해야 한다”의 의미를 습득하지 못한 것이
다.
68. “~해야 한다”의 동기부여적 기능은 종종 오해되었다. 혹자는 이 어휘가 동기부여적 의미
만을 지닐 뿐이며 전혀 개념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해야 한다”는 “붉
다”나 “그리고”만큼 개념적이며, “붉음”이 사태에 관한 기술적 속성을 지니고 “필연적”이 양
상적 속성을 표현하듯 “~해야 한다”는 사태에 관한 지시명령적(prescriptive) 속성을 지닌다.
69. 만일 “~해야 한다”가 어떤 구문론적 역할도 지니지 않는다면 그 단어는 개념이라고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ought’는 ~해야 한다를 의미한다”와 같은 문장은 언어와 언어 사이의
관계를 표시하는 문장이지 언어와 세계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표시하거나 하는 문장이 아니
다.
70. 단칭 규범표현은 암시적으로(implicitly) 보편적이다. 예컨대 “존스는 상황 C에 A를 해야
한다”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상황 C에 A를 해야 한다”를 함축한다. 물론 A와 C는 적절히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71. “~해야 한다”의 동기부여적 역할은 종종 명령법(imperatives)의 역할과 혼동되었다. 그러
나 후자의 명령법은 전자의 규범적 담화를 전제하며, 명령법은 규범적 담화 바깥에서는 성립
하지 않는다. “~해야 한다”를 명령법을 통해 설명하려는 시도는 이 점을 간과한다.
72. ‘명령하기’와 ‘약속하기’를 비교해보면 이 점이 보다 명백해진다. 약속은 약속을 하는 사
람에게 일견의(prima facie) 책무를 부여한다. 지금 논의와 관련하여 약속은 다음처럼 정식화
할 수 있다.

x가 “나는 A하기로 약속했다”라고 적절하게 말한다면, x는 A를 해야 한다.

이런 정식화 규칙이 없다면 약속하기의 의미란 불가해해지고 말 것이다.
73. 약속이 발화자 자신을 책무에 구속시킨다면 명령은 타인을 책무에 구속시킨다. 이 경우
정식은 다음과 같이 된다.

x가 y에게 “A해라!”라고 적절하게 말한다면, y는 A를 해야 한다.

당위를 명령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당위를 약속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만큼이나 잘못되었으며,
명령과 약속의 의미는 오히려 당위(ought)에 의해 설명된다.
74. 단칭 규범표현은 보편적 규범표현을 전제한다. 이 보편적 규범표현은 “모든 사람은 ~해야
한다”와 같은 무제한적 표현과 “모든 체스 플레이어는 ~해야 한다”와 같은 제한적 표현으로
나뉜다. 여기서 어떤 인간을 해당 당위 문장에 속하는 “누군가”로 포함시킨다는 것은, 그가
권리와 의무를 지니는 사람의 범위 내에 들어간다고 인지하는 것이다.

귀납

75.셀라스에 의하면, 세계 내 사물들에 대한 의식은 언어놀이의 ‘질료적 움직임’의 문제이다.
이에 따르면 “모든 A는 B이다”는 “x는 A이다”에서 “x는 B이다”로의 질료적 움직임이며 이는
A를 B에 대한 이유로 제시하는 일이다. 한편 셀라스는 이유를 제시하는 활동을 포함한 우리
의 언어활동 전반의 형성 과정을 인과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사실 성립하는 관계는
원인과 결과뿐이지 ‘이유를 제시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지 않는가?
76. 흄적인 어조로 이 의문을 재진술하면 다음과 같다. 셀라스는 무언가의 개념을 지닌다는
것이 그 원인을 아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사람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지
니며 따라서 서로 다른 개념들을 지닌다. 그렇다면 언어의 수만큼 진리의 수도 많아질 것이
며, 결국 셀라스의 주장은 상대주의를 함축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77. 언어놀이이론과 규칙에 관한 지금까지의 논의는 ‘앎’, ‘의미’, ‘진리’에 관한 논의로 바꾸
어봤을 때 다소 어색해 보인다. 다음 두 진술을 비교해보자.

(i) ‘모든 A는 B이다’는 (L에서) 무조건적으로 주장 가능하다.
(ii) ‘모든 A는 B이다’는 (L에서) 용어에 의해(ex vi terminorum) 참이다.

(i)은 보조 위치인 질료적 움직임에 관한 진술이며 (ii)는 진리에 관한 진술인데, 양자는 호환
불가능하지 않은가? 두 언어 L1와 L2가 원초적으로 상이한 언어체계이고 상호 번역 불가능하
다고 가정하자. 이제 L1의 사용자들이 L1을 버리고 L2를 습득한다면, 해당 사용자들은 L1에
있는 참인 문장들도 버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참인 문장을 버리는 일이 어떻게 합리적이란
말인가?
78. 이 의문이 제기하는 바대로, 무조건적 주장 가능성과 진리성은 무조건적으로 등치될 수
없다. 그러나 이를 바탕으로 언어놀이 이론에서 진리 개념이 성립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
은 잘못이다. 내가 “s가 (L에서) 참이다”라고 말할 때, 나는 s 자체 또는 s의 번역 문장을 언
질하는 것이다. 내가 L 사용자이거나 L과 공통된 구조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는 언어의 사용
자일 때에만 나는 “s는 (L에서) 용어에 의해 참이다”를 주장할 수 있다.
79. 비슷하게, “x는 모든 A가 B라는 것을 안다”는 x가 나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거나 “같은
놀이의 또 다른 현신(embodiment)”(Sellars, 1963: 354)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 때에만 올
바르게 쓸 수 있는 문장이다.
80. “‘s’는 (L에서) p임을 의미한다”(‘s’ means [in L] that p)라는 문장은 언어와 사물 사이
의 관계를 의미하지 않고, s가 L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메타언어에서 p가 수행한다는 점을 전
달해줄 뿐이다. 그리고 물론 여기서 L과 ML은 같은 놀이를 하고 있어야 한다.
81. 언어로서 세계에 관한 경험적 사실을 진술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어떤 질료적 움직임, 질
료적 보조 위치, 질료적 기초 문장도 포함하지 않는 순수 형식적 언어란 넌센스이다. 사물의
연관에 관한 어떤 개념도 없는 순수 관찰로부터 일반적 원리로의 도약이라는 귀납의 문제도
같은 의미에서 넌센스이다.
82. 동어반복적인 형식적 진술들 외에는 모두 믿음의 도약이라고 생각하는 회의론자의 의심은
거짓된 의심이다. 언어의 작동에서 질료적 움직임을 파악하는 일은 과학적 방법에서 핵심적이
다. 우리는 “언어에 질료적 움직임을 포함시키는 것이 합리적인가?”가 아니라 “언어에 어떤
질료적 움직임을 포함시키는 것이 합리적인가?”를 물어야 한다.
83.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사실들에 대해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합리적인가?”가 아니라
“사실들에 대해 어떤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합리적인가?”이다. 이는 어떤 언어를 선택하고 정
당화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84. 언어 내에서 반성적으로 되짚어봤을 때, 관찰은 비개념적인 것이 원인이 되어 개념적인
것이 결과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유는 항상 언어 안에서 자리하는 위치이며, 관찰은 어떤 이
유에 대한 결론이 아니다.
85. 물론 이유를 제시하는 일은 일체의 언어놀이 밖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가 관
심 가져야 하는 일은, 언어 내에서 관찰된/관찰되지 않은 사건과 대상, 법칙론적
(nomological) 연관들이 구성해내는 세계상을 보다 설명적으로 정합적이게 만들고, 그러기 위
해 우리의 관찰 어휘가 지니는 개념적 의미를 다듬는 일이다.
86. 관찰 술어와 이론적 어휘의 차이점은 질료와 형식의 차이점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양
자 모두 질료적 움직임의 문제인 것이다.
87. 우리가 언어 내부에 이론언어를 하위언어로 지닌다면, 우리는 이론언어와 비-이론언어가
일련의 언어-언어 움직임의 교량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이론언어는 단순히
이론적 어휘와 연관된 일상어(예컨대 “H2O”와 “물”)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주는 역할에서 나아
가 하나의 심화된 언어놀이를 구성한다. 이론적 어휘의 온전한 의미는 해당 이론언어 내의 학
문적 탐구를 통해서만 드러날 것이다. 그럼에도 두 언어 사이의 관계는 ‘이행’으로 오해되어서
는 안 된다.
88. 비-이론적 담화에 새로운 질료적 움직임을 도입할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 경
우 우리는 “모든 A는 B이다”라는 가설을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서 질료적 움직임으로 새로이
도입한다.

(a) “모든 A는 B이다”는 이미 채택된 규칙론(nomologicals)으로부터 나왔음이 밝혀졌다.
(b) C일 경우 우리는 “모든 A는 B이다”가 이미 채택된 규칙들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알았다.
(c) “모든 A는 B이다”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이를 “A는 필연적으로 B이다”라는 양상 문장으로
표현한다. 이때 A와 B의 의미는 보다 풍부하게 변화한다.

89.우리가 해당 문장을 도입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우리는 “모든 A는 B임이 개연적
(probable)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해당 진술을 ‘잠정적’(interim)인 위치에 놓는다. 이는 ‘개연
적인 가설’이나 ‘귀납적 일반화’와는 명백히 다른 절차로 도입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A가
필연적으로 B인 것이 개연적이다”(It is probable that all A is necessarily B)라고 말한다
면, 우리는 (a)나 (c)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는 셈이다.


1 보다 나은 번역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3 Sellars, 1963: 346-347의 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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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컨텐츠 퀄리티가 엄청나네요... 훈련소 가셨다더니 철학 훈련소였던..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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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훈련소에서 셀라스를 읽은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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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ewHegel 글에서 37번은 원문엔 없는 내용같은데 혹시 출처를 알 수 있을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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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에 있는 내용입니다. pp.334-335의 37번째 문단입니다.

@TheNewHegel 같은 이름의 논문이 두개가 있었네요. 답변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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