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플라흐, 「객관성에 대한 사유의 세 가지 태도와 사변논리학의 문제」

Flach, W. (1978). Die dreifache Stellung des Denkens zur Objektivität und das Problem der spekulativen Logik. In D. Henrich (Ed.), Wissenschaft der Logik und die Logik der Reflexion (pp. 3–18). Felix Meiner.

『엔치클로페디』 제1권 초두의 예비개념 부분에 등장하는 ‘객관성에 대한 사고의 세 가지 태도’는 사변논리학의 관점을 해명하고 인도하기 위해 서술되었다. 그러므로 세 가지 태도에 대한 서술은 사변논리학의 기획을 이해하고 이 기획이 헤겔이 설정한 목표를 충족시키는지를 평가하는 데 중요하다. 헤겔이 세 가지 태도를 다루는 방식으로부터 사변논리학의 문제가 어떻게 개진되는지를 미리 예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사변논리학의 문제설정을 개략적으로 서술하고 이를 체계적 구상으로 해석한다.

헤겔이 서술하는 세 가지 태도는 사실적, 발생적인 순서로 등장한다. 첫째 태도인 형이상학은 사유와 대상의 대립에 대한 의식 없이 숙고를 통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지닌다. 형이상학은 사유의 내용을 순진하게 대상에 대한 내용으로 취급하고 이들을 진리로 포착하는 데에 만족한다. 사유의 근본규정은 곧 사물의 근본규정으로 간주된다. 사유의 규정들을 대상 자체의 객관적 규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은 내용적으로 진리를 담지하고 있으나, 한편 형이상학적 사유는 그 객관성을 자기가 아니라 오직 대상들의 존재 속에서만 찾는다는 점에서 “자기망각”(Selbstvergessen)의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태도는 경험론과 비판철학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앎의 객관성을 대상이 아니라 사유에서 찾는다는 데에 그 특징을 지닌다. 사유가 객관성을 보증한다는 점을 꿰뚫어본다는 점에서 둘째 태도는 참된 측면을 지니지만, 문제는 이 태도가 자기의 논리를 일관적으로 견지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그 결과 이 태도는 사유와 대상 사이의 추상적 대립 속에 머무르고 양자의 구체적인 통일에 이르지 못한다. 대표적으로 칸트는 양자의 대립을 매개하고자 했음에도 이 매개를 추상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데에 그친다. 특수자는 범주들이라는 “오성형식에 […] 결속되어 있”지만, 범주들은 사유 자체로부터 도출되지 않고 “추상적 형식성”을 띤 채 머물러 있다(Flach, 1978, p. 8).

야코비로 대표되는 셋째 태도인 직접지는 사고가 본성상 직접적으로 객관성을 띤다고 주장한다. 헤겔은 셋째 태도가 사유를 “한낱 특수자의 활동”(Enz. §61)에 제한시킨다고 비판한다. 셋째 태도에서 주장되는 직접지는 매개를 배제하는 배타적인 의미에서의 직접지이며, 따라서 추상적 자기 관계 혹은 자기 동일성에 불과하다. 이 점에서 셋째 태도는 (그 자신은 둘째 태도를 극복했다고 생각하지만) 둘째 태도와 같은 유한성의 지반에 머무른다. 직접지의 패착은 인식이 규정이고 매개라는 점, 그리고 이 매개를 통해서 비로소 구체적인 사유가 가능하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데에 있다. 이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직접지는 한낱 무규정적인 것일 뿐이다.

이 셋째 논점은 단순한 비판에서 나아가 사변논리학의 주된 문제를 설정한다. 인식이 일면적 매개 속에서도 일면적 직접성 속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논리학의 과제이며, 나아가 철학 전체의 과제이다.

이제 이로부터 사변논리학의 구상을 체계적으로 서술해야 한다. 첫째, 사변논리학의 요구는 모든 종류의 지식에 결부되어 있다. 둘째, 이 지식은 의식의 규정이면서도 확실하게 자기의 (객관적) 내용을 담보해야 한다. 셋째, 이 요구는 인식에 대한 일종의 초월론적-논리적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사변논리학의 주제에서는 “논리적 형식성의 총 복합물, 즉 전 ‘모든 논리적-실질적인 것의 계기들’이 그 총체성 속에서”(Flach, 1978, p. 11) 다루어진다.

앎의 문제를 진리와 확실성의 두 극으로 와해시키는 입장은 진리를 앎과 대상의 일치로 간주하고 진리를 주어진 자립적인 내용과 등치하며, 한편 확실성을 앎과 의식내용의 일치로 간주하고 확실성을 자립적 형식과 등치한다. 그러나 양자 모두 앎의 계기이며, 둘 중 어느 것도 앎과 독립적인 무엇으로 간주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사변철학은 1) 대상이 앎 속에서만 성립하며 따라서 앎과 대상이 추상적인 대립 속에서 포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 2) 의식이 역시 앎 속에서만 성립하며 따라서 진리를 의식에 자립적인 내용으로 간주한 채 확실성과의 외적인 관계 속에서 상호 비교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3) 진리와 확실성은 앎의 계기일 수밖에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양자의 불일치가 결코 극복될 수가 없다는 점을 통찰한다(Flach, 1978, p. 12).

헤겔이 비판한 전통 논리학(나아가 칸트와 피히테 철학)의 제한적 성격은 진리와 확실성을 추상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하지 않음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양자의 관계는 사변논리학의 구체적 통일성, 다시 말해 “자립적 직접성과 자립적 매개를 지양하는 일치의 사변적 관계”(Flach, 1978, p. 13)이다.

논리학에서 개념을 통해 구성되는 순수지는 두 가지 불가분한 주제를 포함하는데, 그것은 존재와 의미라는 주제이다. 존재의 관점에서 앎은 객관화하는 사고이며, 여기서 주제화되는 것은 직접성이다. 한편 의미의 관점에서 앎은 자기 반성하고 확신하는 사고이며, 여기서는 매개가 주제로 제시된다. 직접성은 개념의 자체존재(Ansichsein), 매개는 개념의 독자존재(Fürsichsein)를 나타내며, 양자로부터 개념의 자체독자존재(Anundfürsichsein)로서의 구체적 통일 혹은 자기로 머물러 있음(Beisichsein)이라는 표현이 성립한다. 결국 진리와 확실성, 직접성과 매개, 자체존재와 독자존재라는 이 양 계기가 사변논리학의 체계적 요소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주제가 불가분하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특히 개념의 관점에서 양자는 앎에 대한 어떤 독립된 주제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개념이 이루는 근원적 통일성의 두 가지 측면일 따름이다. 이 점에서 개념은 앎의 두 가지 주제를 총체적으로 통합하는 최고의 관점이다. 이에 다라 논리학의 과제는 참과 확신이라는 앎의 규정을 파악하는 일이다. 『정신현상학』의 서문 등에서 제시된 “실체철학을 주체철학에 통합하려는” 헤겔의 부가적인 의도 역시 대상과 사유 양 측면 모두의 규정, 따라서 앎의 완전한 자기규정을 획득하려는 과제와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이 점에서 당연히도 사변논리학은 그 (외재적이 아닌) 내재적 시작을 갖는 체계이다. 이는 칸트의 초월론적 논리학 이래 제기되어왔던 “모든 […] 규정적 앎의 최후정초라는 사고”(Flach, 1978, p. 16)를 변화된 형식 속에서 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변논리학은 초월론적-논리적 귀결을 갖는다. 앎을 진리와 확실성, 직접성과 매개, 존재와 의미라는 두 가지 측면 속에서 포착하는 것, 이 요구를 양자의 일치 문제로 가져오는 것, 이중적 규정을 객관화와 반성이라는 두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 방법적 측면과 사태의 측면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문제로 고찰하는 것은 모두 사변논리학이 초월론적 논리학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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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ürsichsein이 전에는 보통 대자존재로 번역되었던 것으로 아는데, 독자존재로 번역하시는 이유 혹은 최근에 그렇게 번역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Ansichsein을 의식없는 상태, Fürsichsein을 의식의 상태, Anundfürsichsein을 대상을 의식하되, 의식하는 대상과 의식이 대립되지 않고 통일을 이룬 상태(대립을 포괄하는 개념의 진리를 의식하는 상태)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해에 대해서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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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이유로는, "an sich"와 "für sich"의 일상적 의미인 "그 자체로는", "있는 그대로는", "그것만 놓고 보면" 등의 뜻을 좀 살리고 싶었습니다. 헤겔은 일반적인 독일어에서 자주 쓰이는 저 두 용어를 전유해서 고유의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한편, 두 단어를 원래의 일상적 의미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 텍스트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an sich"와 "für sich"가 어떤 문맥에서 전문용어로 쓰였고 어떤 문맥에서 일상적 용어로 쓰였는지 무 자르듯 판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제 경험상으로는 양쪽으로 읽는 게 모두 가능할 때가 매우 많았습니다.)

한편 "즉자존재"와 "대자존재"는 오로지 학술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용어이다 보니 일상적으로는 쓰이지 않는 용어입니다. "자기에 즉하다/접하다"와 "자기에 대해 있다"는 문자 그대로의 뜻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장점도 있습니다만, 앞서 설명되었듯 "an sich"와 "für sich"가 지니는 전문적/일상적 의미 중 전자만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저와 비슷한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체존재"와 "독자존재"를 각각 번역어로 채택한 연구 문헌들을 봤고, 우리말에서도 일상어와 유리되지 않은 채 철학적 의미를 부여해서 쓸 수 있는 좋은 용어라고 생각해서 저도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주 거칠게 말하면 저는 "자체존재"를 주어진 대로 직접적으로 있는 상태, "독자존재"를 타자와의 매개적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있는 상태, "자체독자존재"를 타자와의 관계 속에 있으면서도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으로 있는 상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해해도 큰 틀에서 옳다고 생각하지만, 해당 개념들이 의식에 국한되지 않고 범주나 사태 일반에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표현이라는 점을 상기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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