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셀라스, 『경험론과 심리철학』 - 8. 경험적 지식은 토대를 갖는가?

VIII. 경험적 지식은 토대를 갖는가?

32. 소여의 신화 중 한 버전은, 비추론적으로 알려지면서 다른 어떤 지식도 전제하지 않는 지식이 있으며, 이러한 지식이 모든 지식의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최종 심급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셀라스가 공박하고자 하는 생각이 비추론적 지식이 아니라, 다른 어떤 지식도 전제하지 않는 지식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혹자는 전자와 후자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셀라스에 의하면 그런 생각이 바로 소여의 신화의 일부분이다.

지식의 구조에 특권적인 계층, 즉 토대가 있다는 발상은 널리 퍼져 있지만 문제를 내포한다. 그것은 토대적 지식이 비추론적이고 궁극적이면서도 하나의 지식으로서 권위(authority)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측면을 정합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시도는 다음과 같은 설명 방식을 취한다.

모든 지식에 대한 진술은 단순한 믿음이 아닌 지식이기 위해 권위 즉 신빙성을 지녀야 한다. 문장이 신빙성을 지니는 한 가지 방법은 다른 신빙성 있는 문장들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되는 것이다. 이때 추론적 지식은 다른 문장과 논리적 관계에 들어서 있다는 점에 의해 이행적으로(transitively) 신빙성을 부여받으며, 따라서 이들이 권위를 획득하는 원천은 추론의 근거가 되는 기초 문장들이다.
추론적 문장들에 권위를 부여하는 원천인 기초 문장들, 즉 토대적 지식에 대한 진술들은 다른 문장들로부터 추론될 수 없다. 기초 문장이 다른 문장으로부터 도출된다면 그것은 토대적 지식이 아닌 추론적 지식이며, 신빙성을 지니기 위해 추론의 근거가 되는 다른 문장을 요청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장의 권위의 원천은 계속해서 후퇴하게 된다. 따라서 토대적 지식은 다른 진술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권위를 획득해야 한다.
비경험적 문장들의 경우 추론적이든 비추론적이든 신빙성의 출처를 설명할 수 있다. 먼저 분석 문장의 경우 다른 문장들로부터 도출되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로 신빙성 있다는 점에서 내재적으로 신빙 가능하다고 할 수 있으며, 비추론적인 토대적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분석 문장들로부터 추론되는 진술들은 자연히 분석 문장의 권위를 인계받는다. 그런데 경험적 진술들은 분석적이지 않은 까닭에 내재적으로 신빙성을 지니지 않는다. 경험적 추론적 지식은 비추론적인 경험적 지식에 의해서만 신빙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때 신빙성의 토대가 되는 비추론적 경험적 진술이 어떻게 신빙성을 획득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관찰 보고(observation report) 문장들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붉다” 같은 관찰 보고 문장은 내재적으로 권위 있지도 않고, 다른 문장들로부터 추론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 문장들은 지표적 내지 개항 재귀적(token-reflexive) 표현을 포함하는 까닭에 발화되는 매 경우에 신빙성을 보증받지도 못한다. 발화 상황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비지표적 문장들은 다른 여러 상황에서 발화되어도 같은 의미를 지니는 반면, 지표적 문장들은 발화 상황이 바뀌면 다른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비지표적 문장 개항들은 문장 유형에 의해 권위를 부여받는 반면, 관찰 보고 문장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면 경험의 토대적 지식은 어디에서 그 궁극적 권위를 획득하는가? 그것은 바로 진술이 발화되는 상황에 의해서이다. 관찰 보고 문장들이 포함하는 지표적 표현들은 진술과 개별 발화 상황을 연결하는 기능을 한다. 관찰 보고 문장들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발화되었다는 사실에 의해 그 권위를 획득한다. 예컨대 “이것은 붉다”는 표준적인 관찰 조건 아래 붉은 대상을 보고 발화되었을 때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신빙성 있는 문장이 된다. 이렇게 봤을 때, 비추론적 경험적 진술은 다른 종류의 문장들과 반대로, 진술 개항으로부터 그 유형의 권위가 보증된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모든 지식의 신빙성은 두 가지 원천을 지닌다. 하나는 (1) 분석 문장의 내재적 신빙성이며, 다른 하나는 (2) 관찰 문장 개항의 신빙성이다.

33. 여기서 관찰적 지식에 대한 진술인 관찰 보고 문장의 권위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다음처럼 생각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관찰 보고는 분석 문장과 한 가지 유사성을 지니는데, 바로 참이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진술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일상적인 경험적 문장이 참이 아니더라도 올바르게 진술될 수 있는 반면, “이것은 붉다”를 사용해 올바르게 보고하는 일은 “이것”(this), “은”(is), “붉다”(red)의 사용 규칙을 올바르게 따르는 일과 동일시된다. 이 유혹에 관해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이 지적되어야 한다.

(1) ‘보고’라는 개념은 일상적으로는 보고자와 피보고자라는 두 명 이상의 사람을 필요로 하는 하나의 발화 행위이다. 그러나 인식론의 전문 용어인 ‘보고’(혹은 슐리크[M. Schlick]의 표현으로는 ‘확증’[Konstatierung])는 두 명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공공연히 발화될 필요도 없는 특수한 의미로 쓰이는 개념이다.

(2) 일상적 의미에서 모든 보고는 하나의 행위이지만, 확증의 의미로서 보고는 행위일 필요가 없다. 확증의 올바름을 평가하는 기준은 행위의 올바름에 대한 평가 기준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당위(ought)가 행위 당위(ought to do)이지 않고, 모든 올바름이 행위의 올바름이지도 않다”(Sellars, 1997: 72)

(3) 만일 ‘규칙 따르기’라는 표현이 단순히 정규성(regularity)을 표현하는 약한 개념이 아니라 보다 강한 규범적 의미를 지닌다면(예를 들어 강한 규칙 따르기 개념에 의하면 번개가 치고 천둥이 치는 것은 규칙 따르기라고 할 수 없다), 이때 행위를 이끌어내는 것은 순전히 이러저러한 사실이 아니라, 사실이 이러저러하다는 지식 혹은 믿음이다.

34. 위의 이해에서 보고가 행위로 생각되고, 보고의 올바름이 행위의 올바름과 동일시되고, ‘규칙 따르기’가 규범적인 의미로 쓰인다면, 이 설명은 소여의 신화를 명시적인 형태로 드러낸다. 그것은 확증의 권위가 관찰 상황에 대한 비언어적 인지로부터 얻어진다는 입장을 내포한다. 이에 따르면 이 대상이 붉다는 사실에 대한 비언어적 삽화는 내재적 혹은 자기 입증적(self-authenticating)으로 권위를 지니며, “이것이 붉다”라는 발화는 삽화에 대한 표현이다. 소여의 신화에 따르면 이 자기 입증적 삽화가 경험적 지식 전체의 토대를 이룬다. “경험적 지식이라는 구조물이 의지하고 있는 이 자기 입증적 삽화들이 코끼리가 올라 서 있는 거북이를 구성할 것이다.”(Sellars, 1997: 73) 셀라스는 특정한 토대 위에 경험적 지식 전체가 의존하는 ‘거북이 등 위에 올라선 코끼리’의 토대론적 그림을 거부한다.

35.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셀라스는 한 가지 제안을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이 제안에 의하면, 현전하는 붉은 대상에 대해 “이것은 붉다”라는 발화가 관찰적 지식이라는 말은, 해당 문장이 붉은 대상에 대해 “이것은 붉다”라는 문장을 발화하는 반응 성향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붉다” 문장 개항은 관찰적 지식이다 ↔ “이것은 붉다”는 붉은색 대상이 표준적 조건 하에 보일 때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해당 문장을 발화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이때 관찰 문장이 ‘규칙에 따라’ 사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규칙’이란 언어 사용자의 인과적 성격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규범성이 아닌) 정규성의 의미만을 지닌다. 여기까지는 VII장 31절에서 비판받았던 “온도계 관점”과 다를 바 없는 제안이다.

대안은 이 온도계 관점에 일련의 수정을 가함으로써 얻어진다. 먼저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관찰 문장 개항의 권위이다. 관찰 문장이 권위를 지니는 것은 누군가의 관찰 보고로부터 관찰 대상의 현전을 추론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앞서 지적했듯 관찰 보고는 하나의 규칙 지배적인 행위(action)로 간주될 필요가 없다. 관찰 보고의 올바름은 행위가 아닌 행동(behavior)의 올바름이며, 이 행동 성향의 올바름은 다른 언어 공동체의 일원들에 의해 적절히 교정될 수 있다.

다음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관찰 문장의 권위가 타인뿐만이 아니라 보고자 자신에 의해 의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붉은 대상에 대해 적절하게 “이것은 붉다”라는 문장으로써 반응할 줄 아는 지각자는 신빙성 있는 반응 성향을 지니고 있지만, 그가 발화하는 “이것은 붉다”가 한낱 자극에 대한 맹목적인 반응이 아니라 하나의 지식이려면, 그의 언어적 행동이 붉은 대상의 현전을 나타내는 신빙성 있는 징후(symptom)임을 지각자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두 번째 조건이 지각적 지식에 관한 셀라스의 이론을 내재주의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36. 두 번째 조건에 의하면 발화된 관찰 문장이 관찰적 지식이기 위해서는 지각자 자신이 해당 종류의 관찰 문장의 신빙성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은 이상하지 않은가? 셀라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여러 다른 지식들을 알고 있어야만 관찰적 지식을 지닐 수 있다. 그리고 이때 관찰적 지식에 전제되는 지식은 X가 Y에 대한 신빙성 있는 징후라는 명제적 지식(knowing that X is a reliable symptom of Y)이다. 신빙성에 관한 명제적 지식을 관찰적 지식의 조건으로 제시함으로써 우리는 전통적 경험론으로부터 탈피한다. 이 주장은 개별적 사실의 축적을 통해 X가 Y의 징후라는 일반적인 가설에 다다른다는 전통적 경험론의 논제와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다음과 같이 반론할 수도 있다. X가 Y의 신빙성 있는 징후라는 지식은 다시 이를 뒷받침할 개별 사례들에 대한 관찰적 지식을 전제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관찰적 지식의 전제로 신빙성 지식을 전제하는 것은 무한 퇴행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이 반론은 ‘S가 p임을 안다’(S knows that p)라는 형식의 명제적 지식에 대한 오류에 기인한다. 앎이라는 것은 단순히 어떤 상태에 대한 비인식적 기술이 아니라,1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유를 묻고 답하는 공간인 이유의 논리적 공간(the logical space of reasons)에 위치한다. “어떤 삽화나 상태를 앎의 삽화 혹은 의 상태라고 특징화할 때, 우리는 그 삽화나 상태에 대한 경험적 기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유들의 논리적 공간, 말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공간에 위치시키고 있는 것이다.”(Sellars, 1997: 76, 원저자 강조)

37. 무한 퇴행 반론은 ‘X가 Y의 징후이다’의 명제적 형태를 띠는 신빙성 지식이 관찰 보고 문장의 발화에 앞서 시간적으로 선행해야 한다는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다. 어떤 언어 사용자가 어릴 적 학습 과정 중 특정한 조건에서 “이것은 붉다”를 맹목적으로 발화하다가 나중에 커서 자신이 붉은 사물에 대해 신빙성 있게 반응할 능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깨닫더라도, 시간상 앞서는 발화 사례들은 신빙성 지식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다시 제시될 수 있다. 그는 신빙성 문장을 습득한 시점에서 이전의 관찰 보고들을 신빙성 지식의 근거로 제시하면 될 뿐이며, 그가 모든 관찰 보고를 하기 앞서 신빙성 지식을 미리 습득할 필요도 없고 어릴 적에 이루어졌던 모든 관찰 보고를 지식으로 간주할 필요도 없다. 신빙성 지식은 관찰 보고에 논리적으로 선행하지 시간적으로 선행할 필요는 없다.

38. 관찰이 의미론적 규칙에 따라 행해지면 자기 입증적인 비언어적 삽화로부터 권위를 얻어 언어적 행위로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 이것이 바로 소여의 신화의 핵심이다. 소여란 다름이 아니라 이 자기 입증적 비언어적 삽화들이 갖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언어적 삽화에 있다고 상정된 이 권위가 소여의 신화에 궁극적인 “부동의 원동자”(Sellars, 1997: 77)로서 ‘현전하는 사태에 대한 앎’을 구성하고, 현전 속의 앎이 다른 모든 경험적 지식을 기초 지운다는 발상이 감각적 지식을 경험적 지식의 토대로 간주했던 전통적인 경험론의 신화이다.

비언어적 삽화의 권위를 부정한다고 해서, 관찰이 내적이고 비언어적인 삽화라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점들은 인식론적 소여라는 발상에 대한 어떤 뒷받침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 셀라스의 논점이다. 논문의 또 다른 목표이자 논문의 말미에 해결될 과제는, 소여의 신화에 빠지지 않고서 내적 삽화, 직접 경험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관찰, 사유, 언어표현을 성공적으로 구별하는 일이다.

또한 셀라스는 경험적 지식에 토대가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식은 어떤 의미에서는 관찰 보고 명제들에 의존하며, 관찰 보고 명제들이 다른 명제들에 의존하는 방식과 여타 명제들이 관찰 보고 명제들에 의존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한편 토대라는 은유는 후자의 논리적 차원만을 조명하고 전자의 논리적 차원은 은폐한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 특히 토대론의 그림은 지식에 대한 정적인(static) 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 경험적 지식의 합리성은 모든 부분이 수정 가능성에 열려 있다는 동적인 성격에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토대론의] 그림은 그 정적인 성격 때문에 오도의 소지가 있다. 사람들은 거북이 위에 서 있는 코끼리의 그림(무엇이 거북이를 지탱하는가?)과 꼬리를 입에 물고 있는 위대한 지식의 헤겔적 뱀(어디서 시작되는가?)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강요받는 듯 보인다. 둘 중 무엇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경험적 지식이 합리적인 것은─그 세련된 외연인 과학과 마찬가지로─토대를 가져서가 아니라 어떤 주장도─한 번에 모두는 아니지만─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자기 수정적 과업(a self-correcting enterprise)이어서인 까닭이다. (Sellars, 1997: 78-79, 원저자 강조)


1)“어떤 상태를 앎이라 부르는 일이 그에 대한 경험적 기술을 제시하는 일이라는 것을 셀라스가 부정할 때, 그는 빠져나올 수 없는 평가적인 혹은 규범적인 차원이 지식에 존재한다는 점을 의미한다.”(DeVries, Triplett, Knowledge, Mind, and the Given,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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