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셀라스, 『경험론과 심리철학』 - 6. 인상과 관념: 역사적 논점

VI. 인상과 관념: 역사적 논점

26. 전통적 경험론의 입장에서는 한 경험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알아내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다. 전통적 경험론자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추상하거나 반성함으로써 이 경험이 어떤 종(kind)의 경험인지 알 수 있다. 한편 이런 방식으로 얻어진 지식을 가지고 타인과 소통 가능한지는 다른 문제로 남는다.

이런 식의 제안에서는 직접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소여의 신화가 개입하고 있다. 소여의 신화는 봄과 보임에 공통된 기술적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셀라스의 물음을 두 개로 나눠버린다. 하나는 (1) 경험이 어떻게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종으로 분류될 수 있는가, 다른 하나는 (2) 내가 나의 의식 속에서 갖고 있는 경험의 분류 방식이 어떻게 상대의 분류 방식과 같다고 보장할 수 있는가이다. (1)은 전혀 문제가 아닌 반면, (2)는 해결이 불가능한 물음이다. 그런데 두 번째 물음은 첫 번째 물음에 대해 소여를 끌어들임으로써 발생한다. 소여의 신화의 신봉자들은 경험의 종류(sort), 정확히 말하면 종적인 종류가 아닌 특정적인 종류가 직접 경험과 더불어 당연히 주어진다고 전제한다. 소여의 신화는 전통적 개념주의에서는 감각을 일종의 잡다하고 복합적인 사유로 간주함으로써 나타난다.

특히 전통적 경험론자들은 감각에서 보편적 성질을 직접 인식할 수 있다고 전제함으로써 이 신화를 구체화한다. 현대 경험론자들이 다루는 보편자 인식 가능성의 문제가 특정 가능한 반복자(determinable repeatables)와 특정적 반복자(determinate repeatables) 모두를 포괄하는 반면, 전통 경험론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보편자는 전자뿐이었다. 영국 경험론자들에게 후자의 특정적 반복자는 자연히 인식되는 것이었다.1) 로크, 버클리, 흄이 골몰했던 문제는 선홍색, 다홍색, 진홍색 등의 개별 관념으로부터 붉은색이라는 종적인 일반 관념이 성립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개별 경험으로부터 선홍색, 다홍색, 진홍색처럼 특정적 성질을 인식하는 능력은 당연하게 전제한 채 의문시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로크, 버클리, 흄 등에게 추상 관념은 고립된 감각 또는 상과 동일시되었으며,2) 이들에게 붉음(의 개념)이란 곧 붉은 것의 상을 고립시킨 것이었다. 이렇게 영국 경험론자들이 의식이 경험과 인상으로부터 종적인 일반 관념을 형성하는 추상 능력에 대해 말할 때, 이들은 그 근저에 개별 경험을 (세세하게 규정되었을지라도) 보편적 성질로서 인식하는 능력을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다.

로크는 속성 A의 관념에 다른 속성 B를 연언지로 추가하여 A 관념을 특정적인 형태로 나타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A에 B를 연언으로 묶어 ‘A이면서 B임에 대한 관념’(the idea of being A and B)을 표상함으로써 A를 더 세부적으로 특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특정 가능한 반복자와 특정적 반복자 사이의 관계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은 로크의 물음이 특정적이 아닌 종적인 속성만을 향한 것임을 드러낸다. “추상 관념에 대한 그의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종적인 성질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Sellars, 1997: 60)

27. 로크에게 특정적 반복자에 대한 인지가 문제시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버클리도 구체적인 감각적 성질 자체는 문제 삼지 않은 채 이로부터 유적인 성질의 성립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로크가 하위의 종적인 성질들 없이 유개념을 가질 수 있다고 본 반면, 버클리는 유개념이 그 하위의 종으로 “수축”(contract)3) 또는 한정되는 한에서만 유개념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에 의하면 유적 속성은 종적인 속성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어떤 것은 진홍색이거나 다홍색 등이지 않고서느 붉은색일 수가 없는 것이다.

28. 흄 역시 로크 및 버클리와 마찬가지로 특정 가능한 즉 유적인 반복자만을 인상과 구별했을 뿐, 특정적인 반복자의 인식 가능성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로크, 버클리와 다른 점은 특정 가능한 반복자에 대한 사유의 발생(occurrence)을 부정했다는 점이다.

29. 그런데 여기서 흄의 입장을 조금만 비틀면 완전히 다른 관점에 도달한다. 먼저, 경험의 기본 요소가 인상과 같은 심적 상태라는 흄의 주장을 바꿔서 경험의 기본 요소가 속성적 개별자라고 말한다면, 이를테면 경험의 기본 단위가 심적인 붉은 감각 인상이 아닌 실재의 붉은 특수자(red particulars)라고 본다면, 우리는 종류(sort)에 대한 모든 의식이 단어와 유사한 특수자 집합의 결합을 전제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때 이 입장이, 인지가 단순히 유사한 특수자의 발생뿐만이 아니라 “이것들은 유사한 특수자이다”라는 명제적 의식을 수반한다는 주장이라면, 개념주의적 소여의 신화는 고전적 감각 자료 이론과 같은 실재론적 신화로 바뀐다.

다음으로 이 실재론적 흄주의에서 의심 없이 상정된 선천적인 인지 능력을 탈각시킨다면, 즉 단어와 사물의 결합이 직접 인지 능력을 통해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셀라스가 지지하는 심리적 유명론(psychological nominalism)의 입장에 다다른다. 그것은 “종류, 유사성, 사실 등, 요컨대 추상적 존재자들에 대한 모든 인지는─실로 특수자에 대한 인지까지도─언어적 사건”(Sellars, 1997: 63, 원저자 강조)이라는 입장이다. 심리적 유명론에 의하면 언어의 습득은 직접 경험을 통한 유적 개념의 인지를 전제하지 않는다.

심리적 유명론에 대해 두 가지 언급이 이루어져야 한다. (1) 심리적 유명론은 감각적 반복자나 감각적 사실에 대한 비언어적 순수 인지가 있다는 신화를 회피한다는 장점이 있다. (심리적 유명론은 단순 개념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아직 불충분하다.) (2) 심리적 유명론에 따라 감각과 상이 인식적 지향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빠진다면, 언어와 세계가 반드시 직접 경험을 통해 연결되어야 한다는 가정을 도입할 필요 역시 없어지며, 이와 더불어 ‘붉음’이라는 단어가 사적인 실재의 물리적 대상이 아닌 사적인 심적 상태와 결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견지할 필요도 사라진다. 이때 (2)를 찬동한다고 해서, 세계와 단어의 결합 과정에서 의식의 사적 삽화들(private episodes)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붉음’이 붉은 감각 인상을 의미한다는 소여의 신화에 빠지지 않고서도, 우리는 단어 ‘붉음’이 붉음에 대한 감각을 통해 인과적으로 세계 속의 붉은 사물과 연결된다는 생각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1)특정적 반복자는 완전히 세세하게 규정된 감각적 성질인 반면, 특정 가능한 반복자는 특정적 반복자보다 일반적인 성질 즉 종적(generic)인 성질이다. 예컨대 선홍색, 진홍색, 검붉은 색, 다홍색이 특정적 반복자라면 붉은색은 특정 가능한 반복자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는 DeVries, W., Triplett, T., Knowledge, Mind and the Given: Reading Wilfrid Sellars’s “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2000, 53 참조.
2)일반 관념을 로크는 개별 관념을 추상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라고 보고, 버클리는 여러 개별 관념들을 환유적으로 대표하는 상이라고 보며, 흄은 추상 관념이 생생한 인상을 반성한 희미한 심상이라고 주장한다. 세 철학자 모두 일반 관념을 감각적 상(image)의 일종으로 봤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3)“수축”은 둔스 스코투스의 용어이다. 이 용어는 예컨대 본성이 이것성(haecceitas)에 의해 개체 내의 본성으로 ‘수축’된다는 식으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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