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셀라스, 『경험론과 심리철학』 - 5. 인상과 관념: 논리적 논점

V. 인상과 관념: 논리적 논점

24. 세 가지 경험에 공통된 요소인 기술적 내용을 철학자들은 종종 ‘경험’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 ‘경험’(experience)이라는 단어는 애매성을 지닌다. 즉 ‘경험’은 경험작용이라는 의미와 경험내용이라는 의미를 모두 지닌다. 경험작용은 ‘경험함’(experiencing)인 반면 경험내용은 ‘경험됨’(experienced)이다. 전자와 후자는 철학적 혼동을 막기 위해 구별되어야 한다. S가 x가 붉다는 것을 보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지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한편 S에게 x가 붉게 보인다는 사실은 경험되는 것이지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x가 붉게 보인다’의 명제적 내용이 만일 참이라면 그 사실은 x가 붉다는 것을 보는 일과 같을 것이므로 경험작용이 되겠지만, 보임 자체는 경험함이 아니라 경험됨이다.

셀라스는 봄(seeing)과 보임(looking)에 공통된 기술적 내용이 경험내용이 아니라 경험작용일 뿐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술적 내용이 경험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어떤 종류의 경험내용인가? 앞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그것은 ‘붉은 경험’이 될 수는 없다. 이때 ‘붉은’은 물리적 대상의 속성을 부당하게 전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직접 경험을 기술하기 위해 ‘붉음’이라는 단어에 새로운 용법을 부여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 용법은 봄과 질적, 존재적 보임에 공통된 경험내용을 기술하기 위한 용례 외에 어떤 쓸모를 지니겠는가? 더 나은 방법은 이 공통적 경험내용에 한정 기술구가 아니라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다. 일상언어는 이런 종류의 경험에 붙일 이름을 갖고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감각(sensation)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이 ‘붉은 경험’이 아니라 ‘붉음에 대한 경험’이라면, 이 붉음에 대한 경험은 ‘붉음에 대한 감각’을 상정하는 전통적인 설명보다 나을 것이 없지 않은가? 붉음에 대한 감각의 존재는 붉은 물리적 대상의 존재를 함축하며, 따라서 여기서 ‘붉음’의 의미는 다름 아닌 물리적 대상의 속성이다. 그렇다면 감각내용에 관한 이론으로 회귀해도 문제가 없지 않은가?

이 반박을 빠져나가는 한 가지 방법은 “S는 ~에 대한 감각을 지닌다”(S has a sensation of)의 용법을 “S는 ~를 믿는다”(S believes in)와 동일시해버리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믿는 대상의 존재를 함축하지 않는다. 누군가 유니콘을 믿는다고 해서 그로부터 유니콘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붉은 삼각형에 대한 감각을 지닌다고 해서, 붉은 삼각형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그로부터 도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각에 관한 위의 표현이 대상의 존재를 함축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굳이 “믿는다”와 같은 동사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심리주의적 동사들은 비외연적인(nonextensional) 맥락들을 산출하지만, 모든 비외연적인 맥락들이 심리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논리적 논점이 문제가 되는 한, “~에 대한 감각을 지니다”(have a sensation of)와 “~를 믿다”(believe in)를 동일시할 어떤 이유도 없다.

25. 그러나 철학사적으로 “~에 대한 감각”(sensation of)이나 “~에 대한 인상”(impression of)이라는 표현은 “~를 믿다”, “~를 욕망하다” 등의 심리주의적 맥락과 동일시되었다. 이를테면 데카르트에서 ‘생각’이라는 단어는 판단, 추론, 욕망, 감각, 느낌, 상(像) 등을 모두 포괄하는 단어이며, 로크 역시 ‘관념’ 개념을 비슷하게 사용한다. 전통적인 개념주의적 사유 방식에 따르면, 붉은 삼각형에 대한 감각을 지닐 때 ‘붉은 삼각형’이라는 ‘대상’이 우리의 외부가 아닌 사유 내부에 있는(즉 비외연적인) 이유는,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사유할 때 대상이 외부가 아닌 사유 안에 ‘표상적 존재’(objective being)1)로서 있다고 간주하는 이유와 동일하다.

이 감각의 ‘대상적 존재’를 감각의 내용 혹은 ‘내재적 대상’이라고 부른다면 다음처럼 말할 수 있다. 감각이 지니는 특성에 대해서는 합리론자들과 경험론자들이 입장을 달리했지만, 그 차이란 감각의 내용이 모호한 사유라고 봤는가 아니면 단순하다고 봤는가의 차이에 불과하다. 그리고 양자가 공유하던 그 가정이 바로 철학사에 오래된 착오이다. 사유와 감각이 비외연적이라고 해서 양자가 동종의 것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1 여기서 ‘objective’는 ‘형상적’(formal)과의 대립쌍으로 사용되는 개념이다. 가령 형상적 실재성(formal reality)은 그 존재 자체로 지니는 실재성을 뜻하는 반면, 표상적 실재성(objective reality)은 어떤 관념이 무언가를 표상함으로써 지니는 실재성을 뜻한다. ‘objective’의 이러한 용법은 칸트 이전의 초기 근대 철학에서 통용되던 용법이다. 예컨대 수아레즈(F. Suarez)의 『형이상학적 논의』(Disputationes Metaphysicae) II.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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