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셀라스, 『경험론과 심리철학』 - 3. '보임'의 논리

III. ‘보임’(looks)의 논리

10.앞서 말했듯 고전 감각자료 이론은 두 가지 발상에 기초해 있다. (1) 대상을 감각하기 위한 필요조건인 선천적이고 비개념적인 내적 삽화들이 존재한다. (2) 경험적 지식의 증거로 기능하는 비추론적 지식으로서 내적 삽화들이 존재한다. 일단 (1)과 (2)에 공통적인 개념인 내적 삽화(inner episode)에 대해 검토해보자.

어떤 소여의 신화 비판자들은 각 개인이 특권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내적 삽화라는 개념 자체가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여의 신화는 내적 삽화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삽화들이 경험적 지식의 토대를 이룬다는 생각에 기초하며, 따라서 내적 삽화 개념을 거부하지 않더라도 소여의 신화를 공박할 수 있다. 이 생각은 소여의 신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형태이지만, 신화의 핵을 구성하는 논제는 이와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언어 학습이 공적인 영역과 공적인 제재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적 과정인 반면, 삽화는 사적인 것으로서 공적·이성적 담화를 벗어나 있다는 논제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물리적 대상 x가 시점 t에서 개인 S에게 붉게 보인다”는 식의 사실이 소여라는 신화에 빠지게 된다.

11.철학자들은 종종 “x는 S에게 Φ로 보인다”(x looks Φ to S)의 형식을 지닌 문장이 “보이다”(looks)를 “Lxyz”처럼 3항 관계의 일종으로 파악함으로써 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 3항 관계를 감각자료의 용어로 설명할 수 있다고 간주했다. 감각자료가 보임-문장을 분석한다기보다 설명한다는 입장을 택할 경우, 대상이 누군가에게 이러저러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가 자신에게 보이는 것이 감각자료라고 믿을 필요는 없다.

한편 감각자료 이론을 거부하는 철학자들은 “x는 S에게 Φ로 보인다”가 더 이상 환원 불가능한 사실이며, 감각자료 개념은 이에 대해 분석도 설명도 할 수 없다고 본다. 이른바 ‘현시 이론’(theory of appearing)을 받아들이는 철학자들은 “x는 S에게 Φ로 보인다”(x looks Φ to S)가 “S는 Φ인 x와 일종의 관계에 있다”(s stands in some relation to something that is Φ)를 함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옳은 지적이다.

12.“보임”에 대한 본 논문의 관점은 “Φ로 보이다”(looks Φ)와 “Φ이다”(is Φ)에 포함된 속성 Φ가 같은 의미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사과가 붉게 보인다고 말하고 사과가 정말 붉은지 물을 때, 우리는 전자의 붉음이 후자의 붉음과 같은지를 묻는 것이다. 여기서 술어를 “붉게-보이다”(looks-red)로 보고 이를 더 이상 분석 불가능한 술어로 간주하자는 제안은, ‘붉게 보인다’(looks red)과 ‘붉다’(is red)의 ‘붉음’이 같은 의미라는 점을 은폐한다. ‘보임’이 개인, 대상, 속성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는 점은 그러한 제안에 큰 뒷받침이 되지도 못한다.

우리는 ‘~이다’(is)가 ‘~보이다’(looks)보다 논리적으로 단순하며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개념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게 봤을 때, 우리는 다음의 문장이 필연적 진리라는 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X는 붉다≡X는 표준적 조건에서 표준적 관찰자에게 붉게 보인다.

어떤 이론가들은 이 문장이 물리적 붉음을 붉게 보임에 의해 정의하는 문장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장을 그렇게 간주할 경우 앞서 ‘붉게-보임’을 최소 단위의 술어로 보는 무리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변의 문장에서 ‘붉음’(red)이 독립적인 의미를 지닐 경우, 피정의항에 위치하여 정의를 요하는 개념이 다시 정의항에 출현하는 것이며, 정의는 순환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13.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x는 S에게 붉게 보인다”가 x, S, 붉음이나 x, S 사이의 관계를 포함하는 문장이 아님을 보여야 한다. 셀라스에 의하면, “보임”은 전혀 관계가 아니다. 물론 “보이다”를 포함한 문장은 진정으로 관계 술어를 포함한 문장들과 문법적으로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른 평범한 관계 문장들과는 다른 특징들을 지녔으며, 이 특징은 “보임”을 관계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14.셀라스는 “보임”이라는 술어가 갖는 본질적인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가상의 일화를 도입한다. 넥타이 가게에서 일하는 존은 평범하게 색깔과 관련한 개념들을 평범하게 배웠으며, 인공 조명이 발명되기 전이라 표준적인 조명 외에 다른 환경에서는 사물들을 본 적이 없다.

이제, 이야기의 이 시점에서 전깃불이 발명되었다고 가정하자. 존의 친구들과 이웃들은 새로운 조명 도구에 빠르게 적응하고 전깃불이 가져오는 문제들과 씨름한다. 그러나 존은 최후까지 전깃불에 적응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의 가게에 조명이 설치된 바로 후에 그의 이웃 중 한 명인 짐이 들어와 넥타이를 산다.
“여기 멋있는 초록색 넥타이가 있어.” 존은 말한다.
“하지만 이건 초록색이 아닌데.” 짐은 그렇게 말하고 존을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음,” 존은 말한다. “저기서는 초록색이었는데, 지금은 파란색이네.”
“아니지,” 짐이 말한다. “넥타이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져간다고 색깔이 바뀌지 않는 거 알잖아.”
“하지만 아마도 전기가 넥타이 색을 바꾸고 햇빛을 쬐면 다시 색이 돌아오는 것일 수도?”
“넥타이 색깔이 그런 식으로 바뀌는 건 이상하지 않겠어?” 짐이 말한다.
“그런 것 같네.” 존이 당황해하며 말한다. “하지만 우리 저기서는 넥타이가 초록색인 거 봤잖아.”
“아니, 저기서 넥타이가 초록색인 걸 본 게 아니지. 넥타이는 초록색이 아니고, 초록색이 아닌 걸 초록색이라고 볼 수는 없으니까!”
“어, 이거 참 곤란하네.” 존은 말한다. “뭐라 말할지를 모르겠어.”
다음에 존이 가게에서 이 넥타이를 고르고 누군가 그에게 넥타이가 무슨 색이냐고 물을 때, 그의 첫 번째 충동은 “이건 초록색이야”라고 말하려는 충동이다. 그는 이 충동을 억누르고 일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해내며 “이건 파란색이야”라고 말한다. 그가 넥타이가 파란색임을 본 것은 아니고, 넥타이가 파란색임을 봤다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무엇을 봤는가? 존에게 물어보자.
“뭐라고 말할지 모르겠네요. 넥타이가 파란색인 걸 몰랐다면─이걸 인정하지 않고 다른 주장을 한다면 확실히 이상하겠죠─초록색 넥타이를 보고 있었고 넥타이가 초록색이라는 걸 봤다고 장담했을 거예요. 마치 넥타이가 초록색이라는 걸 본 것 같아요.” (Sellars, 1997: 37-38)

“이것은 초록색이다”와 같은 문장은 사실을 진술하는 용례(fact-stating use)와 보고하는 용례(reporting use)를 모두 지닌다. 존이 처음에 넥타이를 보고 “이것은 초록색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다른 어떤 문장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이 문장을 통해 보고를 한 것이다. 반면 존이 같은 넥타이를 보고 전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며 “이것은 파란색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이 문장으로 보고를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추론의 결론으로서 이 문장을 사용하여 사실을 진술한 것이다.

15.이제 존에게 이 넥타이가 무슨 색인지 묻는다면 그는 “그건 초록색처럼 보이는데, 한번 밖으로 가져가서 보세요”처럼 말한다고 하자. 이 문장에 대해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넥타이가 특정한 상황에서 존에게 초록색으로 보인다는 객관적인 최소 사실을 이 문장이 기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설명은 논문의 앞에서 거부된 설명이다.

“이것은 나에게 초록색으로 보인다”는 무언가 보고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사실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문장은 무엇을 보고하는가?

16.무언가가 초록색처럼 보임을 경험하는 것과 무언가가 초록색이라는 것을 보는 경험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후자는 단순한 경험을 넘어서 대상이 초록색이라는 점을 주장하는 일, 대상이 초록색이라는 주장을 승인하는 일을 포함한다. “S는 x가 Φ임을 본다”(S sees that x is Φ)라는 문장은 “x는 Φ이다”라는 명제적 주장을 S의 경험에 귀속시킬 뿐만 아니라 그 주장을 승인한다. 이것이 셀라스의 핵심 주장 중 하나이다.

16 bis. 물론 무언가가 초록색임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그렇게 주장하는 것 그 이상을 수반하며, 그 부가적인 요소가 바로 철학자들에 의해 ‘감각 인상’ 또는 ‘직접적 감각 경험’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도록 하고, 일단은 이것이 지닌 명제적 특성에 주목하자.

라일이 ‘성취 동사’(achievement verb)라고 표현한 바 있는 ‘보다’(see)와 같은 동사는, 특히 “S는 x가 Φ임을 본다”처럼 쓰였을 때, “그 경험에 의미론적 진리 개념을 적용하는 것”(Sellars, 1997: 40)이다.

“X는 S에게 초록색으로 보인다”(X looks green to S)가 “S는 X가 초록색임을 본다”(S sees that X is green)와 다른 점은, 후자가 “X는 초록색이다”를 S에게 귀속시키는 동시에 승인하는 반면, 전자는 그러한 명제적 주장을 귀속시키기는 하지만 승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S가 전자의 문장을 발화할 때, S는 자기의 경험이 실재 X가 초록색임을 보는 참다운(veridical) 경험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없음을 보고하는 것이다.

한편 “보다”(see), “보이다”(look)라는 특별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표면화되는 것은 “X는 초록색이다”를 승인할 것인지 승인하지 않을 것인지의 문제이며, 이는 “X는 초록색이다”를 승인하기 주저할 어떤 이유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나의 감각 경험을 의심하고 주장을 보류할 이유가 없다면, 보고자는 굳이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X는 초록색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17.보이다-발화(looks-talk)에 대한 위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X는 S에게 Φ로 보인다” 꼴의 문장이 수반하는 경험은 “S는 X가 Φ임을 본다”가 수반하는 경험과 동일한 유형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 앞서의 넥타이 가게의 존의 사례에서 만일 존이 “이 넥타이는 나에게 초록색으로 보인다”라고 말한다면, 그 문장을 통해 보고할 때 그의 경험은 “이 넥타이는 초록색이다”를 발화할 때 수반하는 경험과 다르지 않으며, 두 문장을 참으로 만드는 증거란 넥타이가 초록색임을 보는 것이다.

이런 식의 설명이 지니는 첫 번째 장점은 ‘질적인’(qualitative) 보임과 ‘존재적’(existential) 보임을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무가 굽어 있는 듯 보인다”고 말할 때 나는 나무의 성질에 대해 승인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무의 존재에 대해서는 승인하고 있다. 반면 “저기에 굽어 있는 나무 같은 것이 보인다”고 말한다면 나는 나무의 존재에 관한 주장에 대해서도 승인을 보류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장점은, 사물들이 어떻게 해서 보다 규정적(determinate)이지 않고 단지 유적으로(generically) 보일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감각 경험에 수반되는 명제적 주장은 “이것은 붉다”처럼 덜 규정적일 수도 있고, “이것은 선홍색이다”처럼 더 규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핵심은, 더 세부적인 규정들에 관한 진술들을 승인하지 않고서 유적인 감각 경험 믿음을 견지하는 일이 “보이다”라는 동사와 관련해서도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는 점이다.

18.보임(looks)의 개념은 대상이 어떠어떠하게 보인다는 점을 파악하는 능력을 수반하는 한편, 보임의 개념은 ‘~임’(is)의 개념을 전제하며, ‘~임’의 개념은 대상이 어떠어떠하다는 점을 보고 파악할 능력에 의해 사용 가능하다. 그리고 이 능력은, 대상이 어떠한지를 확실히 알기 위해 대상을 표준적인 관찰 조건 하에 놓을 수 있는 앎을 수반한다. 예컨대 넥타이가 전깃불이라는 비표준적 관찰 조건 아래에서는 초록색으로 보이지만 표준적 조건인 햇빛 아래에서는 파란색으로 보일 경우, 우리는 각각 다음처럼 말할 수 있다. “이 넥타이는 원래 파란색이지만 전깃불 아래에서는 초록색으로 보인다.”, “이 넥타이는 파란색이고, 햇빛 아래에서는 사물들이 있는 그대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X는 붉다≡X는 표준적 조건에서 표준적 관찰자에게 붉게 보인다

는 좌항이 피정의항이고 우항이 정의항이기 때문이 아니라, ‘표준적 조건’이 사물들이 ‘있는 그대로’ 보이는 조건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필연적 진리이다. 그리고 무엇이 표준적 조건인지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일상 담화 속에서 결정된다.

19.우리는 ‘~임’이 ‘~로 보임’으로 환원 가능하다는 생각을 거부함으로써, ‘보임’과 같이 관찰 사실들에 속하는 토대 개념들이 논리적으로 독립적인 문법을 구성한다는 전통 경험론적 생각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셈이다. 그런데 이처럼 ‘보임’의 개념이 ‘~임’의 개념과 그에 수반하는 능력을 전제한다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지 않은가? 대상을 관찰할 수 있는 표준적 조건을 알기 위해서는 대상의 지각 가능한 성격을 알아야만 하는데, ‘보임’이 ‘~임’을 전제한다면 ‘~임’의 개념은 습득 불가능해지는 것이 아닌가?

초록색의 개념을 지닌다는 것은 단순히 표준적 조건에서 “이것은 초록색이다”를 발화하여 반응할 줄 안다는 뜻이 아니다. 주체는 이때 이 조건이 그러한 문장을 통해 반응하기 적절한 조건이라는 점을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점은, 하나의 개념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그 개념과 관련된 일련의 개념 집합들을 습득해야 함을 뜻한다. 한 개념을 아는 것은 그와 연결된 다른 개념들을 습득함으로써만 가능하며, 따라서 물리적 대상의 속성에 관해서도 그 속성과 상호 연관된 개념들의 학습 없이는 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20.논리적 원자론자의 입장에서는 다음처럼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 대상들에 관한 이론적 개념들이 상호 의존적이더라도, 그러한 개념들이 경험적 내용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이들이 보다 근본적인 개념들에, 즉 감각 내용의 개념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셀라스의 “헤겔적 성찰”(meditations Hegelliènnes)은 바로 이 점을 거부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

또 감각자료 이론가는 다음처럼 말할 것이다. 셀라스의 분석은 ‘~임’을 ‘보임’의 개념으로 환원할 수 없음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물리적 대상들의 속성이 감각 내용의 속성으로 분석될 수 없음을 보인 것은 아니다. 셀라스는 보임 개념을 경유하여 물리적 속성을 감각 내용의 속성으로 분석하는 길을 차단했지만, 그러한 우회로 없이도 얼마든지 물리적 대상을 감각 내용의 현상적 속성으로 직접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감각자료 이론가가 감각내용의 틀을 가지고 물리적 속성을 분석하고자 한다고 해도, 감각내용 같은 것이 있음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는가? 아마 설득력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이를테면 대상이 붉게 보이는 경험에 호소하는 것일 터이다. 셀라스의 분석을 통해, 감각내용의 존재에 관한 호소를 통해 ‘보임’의 지위를 보장하거나, 성향적 분석을 통해 ‘~임’을 ‘보임’으로 분석하려는 (가령 실재 대상이 붉지 않을 때에도 “x가 붉다”고 반응하는 성향을 지니는 경우를 설명하기 위해 “x는 붉게 보인다”를 도입하는) 시도는 상당 부분 설득력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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