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셀라스, 『경험론과 심리철학』 - 2. 또 다른 언어?

II. 또 다른 언어?

8.에이어에 의하면, 감각자료에 관한 담화는 “s가 초록색으로 보인다(looks)”, “붉고 삼각형인 물체가 저기 있는 듯하다(seems)”와 같은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인식론자에 의해 발명된 언어이다. 감각자료에 관한 어휘들은 물리적 사물이나 그 속성들을 기술하는 일상 어휘에 내용적으로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는다.

X는 S에게 Φ 감각자료를 현시한다

라는 형식의 문장은

X는 S에게 Φ로 보인다

라는 형식의 문장과 같은 의미를 지니도록 약정되어 있다.

이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감각자료에 관한 어휘가 누군가에 의해 도입된 것이라면, 그것은 “~로 보인다”(looks) 등의 어휘를 표기하기 위한 일종의 부호(code symbols)이다. “사과가 S에게 붉게 보인다”를 “사과가 S에게 붉음이라는 감각자료를 현시한다”로 옮기는 것은, “~로 보인다”라는 표현을 “감각자료”라는 부호로 표기한 것이고, 원 문장의 구조를 알아볼 수 있게 부호 내적으로 이런저런 표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마치 원 문장이 논리 기호로

Las(Lxy: x가 y에게 붉게 보인다, a: 사과, s: 주체)

처럼 표기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후보들 간의 논리적 연결 관계는 전적으로 원 문장들 간의 논리적 연결 관계에 의존한다.

9.감각자료 ‘문장’들은 마치 일상언어의 문장처럼 구성되어 있고 진짜 문장들처럼 독립적인 논리적 연결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들은 단지 그 자체 고유한 언어처럼 착각하기 쉽게 생긴 부호일 뿐이다. 예를 들어보자.

(A) 사과는 S에게 붉은 감각자료를 현시한다.
(B) 붉은 감각자료가 있다.
(C) 사과는 S에게 특정한 붉은 빛깔을 지닌 감각자료를 현시한다.

여기서 (A)가 그 자체 하나의 문장으로서 (B)와 (C)를 함축한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A)로부터 (B)나 (C)가 따라나오는 것은 세 가지 ‘문장’이 각각 다음의 원 문장들에 대한 부호일 때만 가능하다.

(α) 사과가 S에게 붉게 보인다.
(β) 무언가가 누군가에게 붉게 보인다.
(γ) 사과가 S에게 붉은 빛깔을 지닌 듯 보인다.

9 bis. 감각자료와 이와 관련된 어휘들이 부호라면, 감각자료 관련 발화들은 “x가 Φ로 보인다”나 “x가 Φ이다”에 대해 유의미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감각자료 발화가 유의미한 설명을 제공하는 듯 보이는 것은 그것이 일상언어와 굉장히 쉽게 혼동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원자의 운동에 관한 발화가 기체의 압력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듯 감각자료 발화를 일종의 이론 언어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자와 같은 이론 언어는 부호와 달리 언어로서 자율성을 지닌다. 똑같이 고안된 것이더라도, 이론 언어는 설명적인 기능을 하며 “잉여 가치”(surplus value)를 지니는 반면 부호는 그렇지 못하다.

감각자료의 존재가 직접지의 존재를 필함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감각자료를 별개의 이론적 존재물로 간주하기 꺼릴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감각내용이 붉다는 점을 직접적으로 안다는 것은 이론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각내용(sense conent)이 이론적 존재물이라는 생각은 일견 이상한 생각으로 보이지 않아서, 감각내용의 어휘를 직접지의 관점에서 도입하는 학자들도 감각내용을 이론적 존재물로 생각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한 맥락에서 도입된 감각내용 개념은 사실 감각적 성질이 아닌 감각자료(sense data)의 의미에 가깝다. 이런 가정 위에서 감각자료 이론가들은 감각내용에 대한 감각작용을 비인식적 사실이라고까지 여기게 되는 것이다.

감각자료 이론가들이 “또 다른 언어” 해석으로 이끌리는 것은, 감각자료의 언어에서 물리적 대상과 의식 사이의 간극을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의 독창성은 감각자료에 관한 진술들을 검토하는 것보다, 물리적 대상들에 관한 진술을 감각내용에 관한 진술로 번역할 방법을 고안하는 데에 있다.

만일 에이어의 제안대로 감각자료 언어가 단순히 부호에 불과하다면, 감각자료 이론이 제공할 수 있는 가치는 물리적 대상과 그 지각에 관한 일상적 담화들의 논리적 연결을 명료하게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즉 물리적 대상과 지각에 관한 담화가 우리의 “봄”(look)이나 대상의 “나타남”(appear)과 같은 어휘 및 그와 관련된 구문론적 구조를 지닌 진술들에 의해 표현된다는 점을 명료히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주장은 항상 해결 불가능한 난점에 부딪히는데, 이는 “봄”과 “나타남”의 언어적 역할이 올바로 이해될 때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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