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셀라스, 『경험론과 심리철학』 - 15. 사적 삽화의 논리: 사유

XV. 사적 삽화의 논리: 사유

56. 이제 우리는 앞서 제시했던 이론적 담론과 일상적 담론의 구분을 차용하여, 가상의 일화 속 라일주의 언어가 비이론적 행동주의 언어라고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앞 장에서 소개한 존스는,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을 때에도 지성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방식으로, 즉 지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순전한 원인이 아닌 규칙, 특히 이유에 따라 행동하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유를 제시하고 정당화하는 활동은 다름 아닌 언어적 활동이다. 인간은 발화행위를 하지 않을 때에도 어떻게 동물과 다르게 합리적으로 행동하는가? 존스의 의문은 이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공적 발화들이 내적 삽화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과정의 결과라고 설명하는 이론을 창안하는데, 내적 삽화의 개념을 창안하고 설명하는 이론의 모형은 바로 공적인 발화 행위로부터 구성된다. 존스의 모형에 따르면, 관찰되는 행위들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상정되는 내적 삽화는 일종의 ‘내적 발화’(inner speech)와 같은 것이다.1 존스의 이론에 의하면, 누군가 “배고프다”는 말을 하면서 햄버거를 먹는다고 해도, 이 행동의 참된 원인 즉 이론적 원인은 이 “배고프다”라는 문장의 (공적 발화가 아닌) 내적 발화이다.

57. 존스의 이론이 지니는 첫 번째 특징은, 발화 모형에 기반을 두고 있듯이 공적 발화에 적용되는 의미론적 범주들을 내적 삽화에도 적용 가능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존스는 발화된 어떤 문장이 이러저러한 것을 의미한다(means)거나 이러저러한 것에 대한(about) 것이라고 말하듯 내적 삽화에 대해서도 ‘의미한다’, ‘~에 대한’과 같은 개념을 사용하여 기술하게 된다. 두 번째 특징은, 존스의 이론이 모형을 수반하기는 하지만 모형과 동일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존스의 이론에도 다른 과학 이론과 마찬가지로 모형에 대한 제한 조건이 붙는다. 내적 삽화가 발화에 비유되기는 하지만, 내적 삽화는 실제 발화처럼 입술의 움직임이나 음성을 동반하지 않는다.

58. 발화와 마찬가지로 의미론적 범주들로 기술될 수 있고, 문장과 마찬가지로 담론적인(discursive) 성격을 지닌 내적 삽화에 존스는 ‘사유’(생각)라는 이름을 붙인다.

(1) 이 이론은 아직 여러 가지 발전의 가능성을 열어둔 기초적인 이론으로, 존스의 이론이 반드시 데카르트적 실체이원론과 같은 특정한 구체적인 형태를 띤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2) 내적 삽화들은 이론적 존재자로서 비경험적인 대상들이다. 사유가 비경험적인 것은, 사유가 형이상학적으로 선험적인 특성을 가져서가 아니라 이론상의 필요에 의해 방법론적으로 도입된 존재자여서이다. 사유들은 기체 속의 분자가 관찰적 대상이 아닌 것과 같은 이유에서 관찰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발화와 사유의 구별은 사유를 물질과 구별되는 형이상학적 실체로 상정하거나 하지 않으며, 후일 사유가 뉴런의 신경 신호와 같은 신경생물학적 이론 구성물과 동일한 것으로 밝혀질 가능성을 애초에 배제하지도 않는다.

(3) 존스의 이론에서 내적 발화는 원인인 시작점에 위치하고 외적 발화는 결과인 끝점에 위치하지만, 그렇다고 양자의 관계가 표현 의도와 표현 수단의 관계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오해는 마치 외적 발화가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며 외적 발화의 습득 없이도 사유가 가능하다는 식의 오류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사유는 공적 발화에 대한 학습 없이는 습득될 수 없으며, 공적인 언어 사용에 숙달하고 나서야 외적 발화 없이도 생각을 할 수 있다. 내적 발화와 외적 발화, 사유와 언어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선행하는 관계가 아니다. 언어는 사유를 원인으로 해서 일어나는 결과이며, 사유는 언어 학습을 통해 비로소 형성되는 내적 삽화이다.

(4) 공적 발화가 사유 이론에 의해 설명되고 사유가 공적 발화와 마찬가지로 의미론적 성격을 지니지만, 이는 발화행위의 의미가 사유의 지향성에 의해 분석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앞 절에서도 지적되었지만 사유의 의미론적 성격은 언어의 의미론적 성격에 착안하여 이론적으로 도입된 것이다.

(5) 사유는 내적 삽화로서 도입되는 것이지 직접 경험으로 도입되는 것이 아니다. 라일주의 언어 사용자들에게는 직접 경험이라는 개념이 없으며, 직접 경험은 사유와는 별개의 이론적 이유에서 도입될 것이다. 사유가 직접 경험의 일부라는 견해가 출현하는 것은 가장 나중의 일이다.

59. 끝으로 사유와 관련된 개념들은 관찰적, 보고적 용법(reporting use)을 얻게 된다. 존스의 이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에 관한 일련의 증거들로부터 그가 P를 생각하고 있다는 결론을 추론하는데, 보고적 용법은 이들이 ‘생각하다’라는 술어를 자기 자신에 대해 적용하면서 등장한다. 존스의 이론에 숙달하면서, 사람들은 굳이 자신의 외적인 행동을 관찰하지 않고도 “내가 P를 생각하고 있다”라는 문장을 신빙성 있게 발화할 수 있게 된다.

이론적 용어인 사유가 보고적 용법을 획득하는 과정은, 타인이 결코 알 수 없는 직접 경험이라는 소여의 신화 없이도 내가 나의 생각에 대해 어떻게 직접적으로 알 수 있게 되는지를 설명해준다. 특권은 ‘~는 P를 생각한다’라는 개념 사용의 숙련에 따라 얻어지는 특권이지, 의식 상태의 내밀한 경험에 의해 얻어지는 특권이 아니다. 즉 각자가 자기의 사유에 대해 지니는 인식적 특권은 절대적 특권이 아니다. 따라서 용어 사용에 미숙한 사람은 자기 기술에 오류를 저지를 수 있으며, 타인에게 교정 받는다. “존스는, 거칠게 말하자면, 행동적 증거들이 ‘딕은 p임을 생각하고 있다’라는 이론적 진술을 강하게 지지할 때 ‘나는 p임을 생각하고 있다’는 딕의 발화에 박수를 보내고, 증거들이 이 이론적 진술을 지지하지 않을 때 ‘나는 p임을 생각하고 있다’는 발화에 인상을 찌푸림으로써 이를[딕이 행하는 자기 기술의 신빙성을] 만들어낸다.”(Sellars, 1997: 106-107)

또한 사유 개념이 비추론적인 관찰적 용법을 얻게 된다고 해서 그것이 이론적 용법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자기 기술을 뒷받침하는 행동적 증거들은 자기 자신에 의해 암시적으로(implicitly) 인지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자신이 P를 생각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에 대해 묻는다면, 이들은 그 행동적 근거들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여 답할 수 있다.2

존스의 신화를 통한 셀라스의 설명은, ‘사유’를 비롯한 내적 삽화들의 개념이 상호주관적이면서도 한편으로 사적인 개념이라는 점을 정합적으로 설명한다.


1)내적 발화는 우리가 앞서 배제했던 언어적 심상(verbal imagery)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상정되는 라일주의 언어에는 ‘심상’(image)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2)사유 개념의 이론적 용법과 관찰적 용법의 관계는 다음처럼 적절하게 예시될 수 있다. 새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새의 깃털, 부리, 날개 등으로부터 자신이 보는 대상이 새라는 점을 추론해야 하지만, 새를 많이 봐서 숙달된 사람들은 새를 볼 때마다 번거롭게 추론할 필요 없이 “저기 새가 있다”라고 신빙성 있게 말할 수 있다. 이때 새에 관한 관찰적 진술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은 암시적으로 의식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숙련자들에게 왜 저것이 새라고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 이들은 저 동물에 깃털, 부리, 날개가 있다는 점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진술을 뒷받침할 수 있기 때문이다. deVries & Triplett(2000: 15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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