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V. 방법론적 행동주의 vs. 철학적 행동주의
53. 이제 라일주의 언어 사용자들 사이에 존스(Jones)라는 천재 행동주의 심리학자가 한 명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행동주의는 방법론적 행동주의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행동주의는 종종 일상의 심리적 개념들을 공연한 행동들로 분석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행동주의는 이미 존재하는 심리적 개념들에 대한 분석에 관한 논제가 아니라 새로운 개념들을 구성하는 데 그 의도가 있다. 방법론으로서 행동주의는 의심, 소망, 추론, 믿음 등 심리 상태에 관한 일상적 개념들이 일련의 행동들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우리가 각자의 마음 상태에 대한 특권적 접근을 지닌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특히 행동주의는 우리가 내성(introspection)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내성’의 ‘내’(內, intro-)가 (52절에서 지적한 것처럼) 일상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지 않는 한, 행동주의자는 우리가 일상적 담론에서 심리주의적 개념들을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내성해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한편 일상의 심리주의적 담론은 행동주의자가 구성하려는 이론에서 모형 정도의 의의를 가지며, 행동주의자는 관찰 가능한 행동들을 설명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이론적 구성물들을 도입하고자 한다.
54. (방법론적) 행동주의가 일상의 심리주의적 개념들을 환원한다는 오해를 떨치더라도, 혹자는 적어도 행동주의 심리학의 모든 개념들은 행동들에 관한 어휘에 의해 명시적으로 정의되어야(explicitly defined) 하지 않는가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로 어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새로 도입되는 개념들이 이런 방식으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자연과학들은 그 이론적 개념들이 관찰 가능한 속성들로 정의 가능해야 한다는 식의 자기 제한을 걸지 않는다. 이를테면 화학은 화학 개념들이 관찰 가능한 화학 물질들의 작용에 관한 어휘로 정의 가능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론이 도입될 때, 이론은 관찰되는 현상으로 환원되거나 현상에 의해 정의되는 식으로 도입되지 않으며, 이론적 개념들은 자연히 “아직까지 관찰되지 않은 존재자나 상태들을 언질하게”(deVries & Triplett, 2000: 139) 한다. 따라서 셀라스가 보기에 위의 요구 조건은, 다른 분야의 자연과학에서도 요구하지 않는 과도한 조건을 심리학에 부과하는 일이다.
55. 또한 행동주의 심리학의 이론적 개념들은 외적인 행동에 관한 어휘로 정의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신경, 뉴런, 시냅스 등의 신경생물학적 용어들로 정의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론적 구성물을 도입함으로써 행동이라는 현상을 설명하는 문제는 그 현상을 이론적 구성물로 환원하거나 양자를 동일시하는 문제와 별개이다. 물론 여러 분야의 과학들은 인간과 대한 통합적 시야를 제공하려는 하나의 “규제적 이상”(Sellars, 1997: 101)을 향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이를테면 신경생물학적 작용 관계들을 가지고 심리적 메커니즘을 추정(speculate)하는 일이 발견술적으로 유용할 수 있다는 점은 얼마든지 긍정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심리학의 일부 개념들이 신경생물학 개념들과 동일시될 수도 있다는 점도 인정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심리학의 모든 개념들이 처음부터 생리학적 개념들과 동일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이론적 개념들의 두 가지 쓰임을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a) 이론의 일부로서 현상을 설명하는 역할, 다른 하나는 (b)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일된 그림에 기여하기 위해 다른 분야와의 통합의 후보가 되는 역할이다. 셀라스에 의하면, 어떤 이론적 용어가 (b)가 될 가능성이 작을수록 (a)에 가까워진다. 예컨대 자기(magnetism)에 대한 이론은 전기에 대한 이론과 별개의 것으로 출발했지만, 후일 맥스웰 등에 의해 자기와 전기가 다르지 않은 현상으로 밝혀지면서 두 이론은 전자기학으로 통합되었다. 이때 ‘자기’라는 개념은 (a)라는 “순수 이론적 개념”으로서 역할을 하다가 (b) 다른 이론과 통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행동주의 심리학을 포함한) 심리학은 제반 과학들과 밀접한 연관 아래에서 연구되어야 하지만, 다른 과학 용어들로 정의되어야 하거나 관찰 가능한 대상들에 관한 어휘로 남김없이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