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셀라스, 『경험론과 심리철학』 - 13. 이론과 모형

XIII. 이론과 모형

51. 그러나 이런 삽화란 무엇이며, 라일주의 언어의 사용자들은 이 삽화들의 존재를 어느 시점에서 인지하는가? 셀라스에 의하면, 그 시점은 바로 이론 언어와 관찰 언어의 구별이 생기는 지점이다. 이론과 관찰의 구별이 이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론을 구성한다는 것은, 거칠게 말하면 특정한 근본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이론적 존재자들의 영역을 설정하고 그 이론적 복합체를 비-이론적 사태 내지 관찰 가능한 사실들과 연고나 짓는 것이다. 이론과 관찰적 사태 사이의 연관은 이론 언어와 관찰 언어 사이의 이행을 가능케 해주는 임시적인 가교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기체의 압력과 온도 변화를 분자들의 운동으로 설명하는 이론에서는, 어떤 기체가 이러저러한 상황에서 몇 도의 온도와 어느 정도의 압력을 지닌다는 경험적 진술을 해당 기체 내 부피 비 분자 수에 관한 이론적 진술과 연결한다. 이론 언어와 관찰 언어의 연결은 관찰 가능한 일반화된 경험적 법칙들을 적절한 이론적 상대역(counterpart)에 연관 지음으로써 이론이 경험적 사실을 설명할 수 있게 한다.

위의 설명은 과학 이론의 본성에 관해 기껏해야 피상적인 그림만을 제시하며, 실제 과학자들의 이론적 활동과 들어맞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이 설명에 관해 두 가지 논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1) 이론의 토대가 되는 근본적인 발상은 순수 논리주의적인 수학적 연산으로부터가 아니라 보통 일상적인 사물들로부터 모형(model)을 구상함으로써 얻어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일상적인 사물에 착안한 모형이 이론적 존재자들에 대해 갖는 설명력은 제한된다.1 모형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이론과 대응되는 부분은, 모형 영역의 사물들 자체가 아니라 그 작용 방식에 대한 기술이다.

(2)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런저런 이론적 가설을 도입해서 경험적 현상을 설명하는 ‘가설-연역적’(hypothetic-deductive) 설명 방식은 현대 과학에 이르러 비로소 창발된 것이 아니며, 현대 과학의 이론적 설명은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합리성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이다. “과학자가 경험적 현상들을 설명할 길을 찾는 방식은 지성의 여명기에서부터 평범한 사람들이─얼마나 거칠고 도식적이든 간에─그들을 둘러싼 환경과 동료 인간들을 이해하려 시도했던 방식의 세련[된 형태]이다.”(Sellars, 1997: 97)2

내적 삽화 개념 자체가 이론적 개념은 아니지만, 여하간 내적 삽화의 발명에는 이론적 담화와 관찰적 담화의 구별이 연루되어 있다.

52. 위와 같은 논점들을 고려했을 때, 내적 삽화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고 말하는 일이 단순히 범주 오류로 치부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관찰 불가능한 이론적 존재자들이 (일상적) 세계 내에 있다고 할 때, 이 ‘내’라는 말은 이론적 담론과 일상적 담론 사이의 연결의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예컨대 수많은 분자들이 대기 속에 있다는 말은, 망치가 공구함 속에 있다는 의미에서 ‘속’에 있다는 말이 아니라 분자들이 대기 현상을 구성하고 관여한다는 의미로 새겨야 하는 것이다.

앞질러 이야기하자면, 라일주의 언어에서 이 다음으로 추가되는 것은 이론적 담론이다. 변형된 라일주의 언어 사용자들은 관찰 가능한 성질들과 인과적(이론적) 성질들을 변별할 수 있다고 상정될 것이다.


1)이를테면 다윈은 농부가 개체들을 선별해 교배시켜 원하는 특성의 종을 얻는 방식으로부터 자연 선택에 관한 이론을 착안했고, 보어는 원자의 구조를 행성계의 모습과 유비했다. 한편 품종 개량은 자연 선택 이론, 행성계와 원자론은 유비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deVries & Triplett, 2000: 133).
2)이런 관점에 따르면 신이나 정령, 마나 등을 도입하는 신화적인 설명들도 하나의 이론적 설명이며, 현대 과학은 신화의 시대부터 있어 왔던 ‘이론적’ 설명들의 세련된 형태인 셈이다. 대표적으로 콰인이 이런 생각(의 실용주의적 버전)을 보여준다. “물리적 대상들은 편리한 매개물로서, [……] 인식론적으로 호메로스의 신들에 비견할 수 있는 환원 불가능한 설정물로서 상황에 개념적으로 도입되었다.”(Quine, “Two Dogmas of Empiricism”, From a Logical Point of View, 2nd ed., New York: Harper Torchbooks, 1961, 20-46, 44.) “과학은 상식의 연속이며, 이론을 단순화하기 위해 존재론을 부풀리는 상식적인 방책을 계속한다.”(Quine, 1961: 45) 판이한 철학 전통의 텍스트이지만 다음의 지적도 참고할 만하다. “신화는 보고하고 명명하며 원천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로써 서술하고 붙들어 매고 해명하려고 한다.”(Adorno, Th. W., Horkheimer, M., Dialektik der Aufklärung, Frankfurt: Fischer, 196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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