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셀라스, 『경험론과 심리철학』 - 12. 우리의 라일주의적 조상

XII. 우리의 라일주의적 조상

48. 사유가 직접 경험도 아니고 언어적 상이나 언어적 행동도 아니라면, 사유는 어떤 의미에서 내적이면서 언어적인 삽화인가? 이와 관련된 문제에 답하기 위해 셀라스는 (14절에서 그랬듯) 가상의 일화를 하나 도입한다.

먼 옛날에는 마음 상태를 기술하기 위한 어휘들이 없었다고 해보자. 이 옛 조상들의 언어를 셀라스는 라일주의적 언어(Rylean language)라고 부른다. 라일주의적 언어는 시공간 내에 존재하는 공적인 대상들과 성질들을 충분히 명료하게 기술할 만한 풍부한 어휘(편의상 연언, 선언, 부정, 가정법적 조건문도 이 언어에 포함된다)를 갖고 있지만, 여기에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사적인 내적 상태에 관한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철학자들은 라일주의적 언어에 가정법적 조건문을 도입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사유와 경험에 관해 라일주의적으로 기술할 길을 열어준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셀라스의 일화의 의도 중 하나는 라일주의적 언어가 우리의 심적 상태를 기술하기에 불충분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49. 여기서 셀라스의 관심사는 다음의 물음이다. 사유, 관찰, 느낌, 감각 개념 및 이와 관련된 기술적 어휘들을 성립시키려면 라일주의적 언어에 어떤 요소들이 추가되어야 하는가? 일단 이 언어에 “‘red’는 붉음을 의미한다”, “‘the moon is round’는 달이 둥글 때 그리고 오직 그 때에만 참이다”와 같은 의미론적 진술들을 가능케 하는 어휘들을 도입해야 한다. 카르납(R. Carnap)은 의미론적 어휘들이 이미 형식 논리의 어휘에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셀라스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1

따라서 라일주의적 선조들은 이제 언어적·비언어적 사태와 서로의 언어적·비언어적 행동을 원인과 결과의 관점에서 기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거나 참, 거짓이라는 진술을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의미하다’를 사용하는 의미론적 진술이 인과 관계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되고 인과 관계를 함축한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red’는 붉음을 의미한다”라는 진술은 영어 공동체 화자가 ‘red’를 발화하는 원인 및 발화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결과가 한국어 사용자의 ‘붉음’을 둘러싼 인과 관계에 상당하다는 점을 함축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미론적 진술이 언어적 발화에 대한 인과적 진술의 축약어처럼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50. 의미론적 어휘들의 도입과 더불어 라일주의 언어가 우리의 언어와 똑같이 사유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유혹이 다시 한번 대두된다. 사유의 본질적인 특징은 지향성, 지시(reference)인데, 언어 표현에 관한 의미와 지시에 관해 이야기하는 의미론적 담론이 바로 이와 비슷한 지향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점을 바탕으로 사유가 언어적·비언어적 행동을 뒤섞어 놓은 일련의 진술로 분석될 수 있다는 변형된 라일주의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셀라스의 의도가 아니다.

사유에 관한 고전적 (심리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언어적 삽화들이 의미론적 용어로 기술되는 반면, 내적 삽화들은 언어적 삽화들의 층위 너머에 존립하면서 지향적 용어로 기술될 수 있다. 또한 전자의 언어적 삽화들에 관한 의미론적 담론은 심적 삽화들의 지향성에 관한 어휘들로 분석될 수 있다. 이제 셀라스가 당면한 문제는 다음 두 가지 논제를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이다.

(1) 내적 삽화로서의 사유는 외적·내적 언어 삽화와 구분되면서 지향적인 특성을 지닌다.
(2) 지향성의 범주는 근본적으로 의미론적 범주이다.


1)Sellars, W., “Empiricism and Abstract Entities”, The Philosophy of Rudolf Carnap, ed. Paul Arthur Schlipp, La Selle, Illinois: Open Court, 1963, 431-46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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