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셀라스, 『경험론과 심리철학』 - 1. 감각자료 이론에서의 애매성

Sellars, Wilfrid, 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 with an Introduction by Richard Rorty and a Study Guide by Robert Brandom,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7.

I. 감각자료 이론에서의 애매성

1.소여 또는 직접성이라는 철학적 관념의 비판자 중에 지금까지 아무도 추론하기와 보기(관찰하기)의 차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소여(the given)라는 표현은 단순히 관찰된 것을 넘어서 특정한 이론적 언질(commitment)들을 함축하며, 이런 이론적 의미에서 ‘자료’(data)가 주어진다는 주장은 합리적으로 거부될 수 있다.
감각 내용, 물질적 대상, 보편자, 명제, 제일원리, 소여성 자체 등 많은 것들이 소여로 일컬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소여성의 구조틀’(framework of givenness)이라 불릴 수 있는 이해 방식을 구성할 수 있다. 이 구조틀은 비판적 독단론과 회의적 경험론을 포함하여 많은 철학자들(칸트와 헤겔까지도)을 옭아매었다. 이제껏 철학사에서 공박되었던 소여들은 직관적 제일원리나 “종합적 필연적 연결들”(synthetic necessary connections)이며, 최근의 공박들도 감각자료만을 겨냥하고 있다. 반면 여기서 이루어지는 감각 자료 이론에 대한 반박은 소여성의 구조틀 전체에 대한 비판의 시작일 뿐이다.

2.감각자료 이론은 인지 작용(act of awareness)과 인지 대상을 구분한다. 고전 감각자료 이론은 이 감각작용이 단순해서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감각작용이 분석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작용(act)이 아닐 것이다. 감각함(sensing)이 과연 작용인지에 대한 의심은 고전 감각자료 이론의 중심적인 두 가지 생각 중 하나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만, 여기서는 “x가 감각된다”고 할 때 x가 어떤 작용의 대상이라는 형식을 띤다고 가정하자.
감각자료는 감각되는 항목(item)의 관계적 속성이다. 이것이 감각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 방식으로 감각되는 항목을 지칭하려면 다른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감각 가능자(sensible)는 감각되는 항목이 감각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결점이 있다. 감각내용(sense content)이 아마 중립적인 용어일 것이다.
감각작용에는 시각적 감각, 청각적 감각 내지 직접 봄, 직접 들음 같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들을 통칭하는 종(species)으로서의 감각함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또 “x는 시각저거으로 감각된다”가 “x는 감각되는 색깔이다”와 같은지도 확실하지 않다. 후자의 경우 시각적 감각 등은, 감각자료가 감각내용의 관계적 속성인 것처럼 감각작용의 관계적 속성일 것이다.

3.소여라는 인식론적 범주의 요점은 경험적 지식이 사실에 관한 비추론적 지식을 토대로 삼는다는 입장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때 감각되는 것은 놀랍게도 특수자(particular)이다. 비추론적인 층위에서조차 지식은 사실, 즉 무엇이 이러저러하다거나 다른 것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각내용을 감각하는 것은 지식을 구성할 수 없을 것이다. 감각자료 이론가는 다음의 두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듯 보인다.

(a) 감각되는 것(sensed)은 특수자이다. 감각함(sensing)은 앎이 아니다. 감각자료의 존재는 지식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함축하지 않는다.
(b) 감각함은 앎의 한 형태이다. 감각되는 것은 특수자가 아니라 사실이다.

(a)에서는, 감각내용이 감각되었다는 사실은 감각내용에 관한 비인식적 사실이다. 그러나 (a)가 감각내용의 감각과 비추론적 지식의 습득 사이에 논리적 연결을 아예 차단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비약일 터이다. 감각 내용의 감각이 비추론적 지식의 습득을 함축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역은 성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b)에서는 감각내용을 감각하는 것이 비추론적 지식의 습득을 논리적으로 함축한다. 그러나 이때 감각되는 것은 특수자가 아니라 사실이다.

4.그러나 감각자료 이론가는 감각되는 것이 특수자이며 동시에 감각함이 앎이라고 주장하려 할 것이며, 두 가지 논제를 동시에 주장하는 일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이 논리적 정합성은 ‘알다’(know)라는 단어의 애매성을 통해 보장된다. 감각자료 이론에 의하면, (1) 무언가를 감각한다는 것(예컨대 사과)은 (2) 그것이 이러저러한 특성을 지님을 감각한다는 것(붉은 것으로서의 사과를 감각하는 것)이며, 이는 (3) 그것이 이러한 속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아는 것(사과가 붉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위의 규정들을 받아들인다면, 어떤 특수한 무언가를 감각한다는 점은 특수한 사실이 감각된다는 점과 감각함이 비추론적 앎이라는 점을 논리적으로 함축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알다’에는 “철수를 알다”나 “그 친구를 알다”에서와 같은 용례에서의 의미가 암묵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이 용례에서 ‘알다’는 ‘친숙하다’(be acquainted with)와 같은 뜻인데, 이처럼 친숙함이라는 의미가 앎에 대한 유용한 은유로서 이 ‘알다’라는 전문용어에 스며들게 되었다.1)

5.감각내용이 자료라는 사실로부터 비추론적 지식의 성립을 논리적으로 도출하는 것은, 감각내용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감각내용의 사실에 대한 비추론적 지식의 용어로 정의할 때에만 유효하다. 많은 감각자료 이론가들은 감각내용의 소여성을 이론에서 기초적, 원초적인 개념으로 간주한다. 감각내용이 주어진다는 것을 원초적인 개념으로 가정함으로써, 감각내용에 대한 감각작용과 비추론적 지식의 습득 사이에 성립해야 할 터인 연결 관계를 설명하기보다 단절한다. 감각작용은 “하나의 독특하고 분석 불가능한 작용”(Sellars, 1997: 18)으로 간주된다. 한편 감각자료 이론가들이 감각작용을 분석 가능한 사실이라고 간주한다면, 이들은 감각자료와 비추론적 지식 사이에 자신들이 단절해버린 논리적 연결을 다시 이끌어오는 셈이다. 특히 “x는 붉은 감각자료이다”를 단순한 요소들로 분석한 결과가 “x는 비추론적으로 붉다고 알려진다”를 환원한 결과와 같다면 말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무어의 「관념론 반박」에서부터 1938년경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시도된 감각작용에 대한 분석은 비인식적 용어들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감각내용에 대한 감각작용은 보통 시공간적 병치나, 연접이나, 기억의 인과 등의 관계로 설명되고는 했는데, 여기서 인식적 용어만은 분석에 사용되지 않았다. 인식적 용어들은 보다 높은 복잡도를 지니고 따라서 ‘감각작용’과 마찬가지로 보다 단순한 개념들로 분석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인식적 사실들이 비인식적 사실로 남김없이 분석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근본적인 착각이다. 그것은 (나중에 다루겠지만) 윤리학에서 말하는 “자연주의적 오류”와 비슷한 종류의 오류이다. 감각내용의 소여성이 비인식적 용어들로 분석 가능하다고 생각하든 일련의 환원 불가능한 작용들로 구성된다고 생각하든, 고전 감각자료 이론가들은 공통적으로 소여들을 근본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6.이들은 소여를 어떤 학습이나 자극-반응 연결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사실로 간주함으로써, 내용을 감각하는 일을 의식하는 일과 동일시했다. 이들은 감각적 지식을 얻는 능력이 개념 형성 과정을 통해 후천적으로 습득된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한편 이들은 감각 내용을 감각하는 능력, 예컨대 고통을 느끼거나 색깔을 볼 능력은 후천적으로 습득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감각 능력이 선천적인 능력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감각자료 이론가는 “x가 감각내용을 감각한다”는 명제를 분석하기 위해 후천적인 개념 형성 및 지식 습득 능력에 관한 개념들을 활용할 수 없게 된다. “x가 붉은 감각내용 s를 감각한다”를 능력의 관점에서 분석하기 위해서는 “x는 s가 붉다는 것을 비추론적으로 안다”도 선천적인 능력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경험론적 상식을 지니는 철학자들이라면 피하고자 하는 귀결이다. 대상을 분류하는 능력, 무언가가 이러저러하다는 내용의 명제적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 또는 특수자를 보편자에 포섭하는 능력은 생득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학습을 필요로 한다. 고전 감각자료 이론은 다음의 세 가지 명제로 이루어진 비정합적인 믿음을 동시에 주장해야 한다.

A. x가 붉은 감각내용 s를 감각한다는 점은 x가 비추론적으로 s가 붉다는 것을 안다는 점을 함축한다.
B. 감각내용을 감각하는 능력은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C. x가 Φ라는 형식을 지니는 사실을 아는 능력은 습득되는 것이다.

여기서 A&B는 ~C를 함축하고, B&C는 ~A를 함축하며, A&C는 ~B를 함축한다. 그렇다면 고전 감각자료 이론가는 A, B, C 중 하나를 파기해야 한다.

(1) A를 파기할 경우, 감각내용을 감각하는 작용은 비인식적 사실이 된다. 물론 감각작용은 비추론적 지식의 필요조건이 될 수도 있지만, 지식을 구성하지는 못한다.
(2) B를 파기할 경우, 고통, 간지러움, 심상 등을 느끼기 위해 특별한 학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상식에 위배된다.
(3) C를 파기할 경우, 경험론적 전통의 유명론적 성향을 저버리는 셈이 된다.

7.고전 감각자료 이론은 두 가지 발상의 혼합으로 보인다.

(1) 학습이나 개념 형성 과정 없이도 (붉음이나 C# 등의) 특정한 내적 삽화(episode)들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특정 대상을 보거나 듣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2) 특정 내적 삽화들은 ‘x가 Φ이다’(가령 어떤 대상이 붉다거나 어떤 소리가 C#라는)라는 비추론적 앎이며, 이 삽화들은 다른 모든 경험적 명제들의 증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경험적 지식의 필요조건이다.

첫 번째 발상은 감각 지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할 때 나타난다. 이 발상에 의하면, 감각자가 “나한테 붉은 삼각형이 보인다”라고 말할 때, 그의 의식에는 붉은 삼각형에 대한 감각인상이 있다. 그의 외부에 실재로 붉은 삼각형인 물체가 있는지 없는지와는 별개로 이 감각인상이 그러한 경험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인상이 인식적 사실이라고 가정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우리는 감각인상을 지향적 대상과 동일시하려는 유혹을 떨치고 감각인상이 물리적인 것도 인식적인 것도 아닌 고유한(sui generis) 것임을 인정할 수 있다. 감각인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발상 자체는 정당한 생각이지만, 다음과 같은 문제적인 생각을 뒷받침하는 전제로 기능해 왔다.

“현시적 봄”(ostensible seeings) (가령 어떠한 대상이 붉다는 것을 본다는 것) 중 어떤 것은 그에 대응하는 실재 대상을 지니며,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 즉 현시적 감각 중에는 참다운(veridical) 것과 참답지 않은 것이 있다. 그런데 이처럼 참답지 않을 가능성을 내포하는 현시적 감각으로부터 비추론적 지식이 성립한다고 말하는 일은, 경험적 지식의 근간이 불안하며 회의론의 가능성을 포함한다는 말이다. 설령 비추론적 지식을 구성하는 현시적 감각의 범위를 보다 신빙성 있는 쪽으로 제한하더라도, 이를 통해 참답지 않은 현시적 감각이 존재할 가능성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으며, 경험적 지식은 결국 온전히 참인 감각 경험에 기초한다고 보장할 수 없게 된다.

대다수는 이런 식으로 제시된 결론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그 대우를 받아들일 것이다. 즉 경험적 지식의 토대가 현시적 감각과 같은 사실들에 관한 비추론적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경험적 지식의 토대는 참답지 않은 현시적 감각들을 포함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이처럼 노골적으로 진술되기 전에. 감각인상의 문법은 지향적 사유의 문법과 동일시된다. 즉 “x는 붉은 삼각형을 본다”의 문장 형식이 “x는 천국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의 문장 형식과 동류의 것으로 취급되며, 이는 감각과 사유 모두 인식적 사실들이라는 생각으로 귀결된다. 이렇게 감각인상과 사유에 대한 혼동은, 외부의 물리적 대상보다 감각인상이 우리의 심적 과정에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전자보다 후자에 접근하기 쉽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애초에 “참답지 않은 감각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Sellars, 1997: 24). 이러한 혼동은 모든 감각자료 이론가들에 귀속되는 것은 아니고 이것이 감각자료 이론가들이 저지르는 착오의 전부도 아니지만, 이는 종래의 감각자료 이론에서 핵심적인 논제이며 그에 따른 난점들을 불러일으킨다.


1)독일어나 프랑스어에서 지식적인 앎을 뜻하는 단어(“wissen”, “savoir”)와 “친숙함”을 뜻하는 단어(“kennen”, “connaître”)가 따로 구분되어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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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소여'가 '주어진 것'보다 좋은데요. 왜냐하면 '주어진 것'은 '소여'보다 글자수가 두 배나 되고, 문맥에 따라 일일이 '주어진 것'으로 옮기면 거추장스러운 상황들이 생각보다 많이 발생하거든요. 반면 '소여'는 한자어라 쉽게 명사로 옮길 수 있어서 번역할 때 문장이 훨씬 매끄러워집니다.

국한문혼용을 하지 않을 뿐, 한자어는 여전히 현대 한국어에 속하고 실제로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비교하여 실정에 맞지 않다는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네요. '즉자 뭐시기하는 일본산 번역어들'은 일본인들 입장에서도 거의 쓰이지 않는 생소한 전문용어일텐데요.
'별'의 형태를 통해 별을 추론한다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소여'는 '별'처럼 한 단어입니다. '주어진 것'이 직관적인 이유는 '쌍둥이 별'과 같이 우리가 이미 익힌 두 단어를 합성했기 때문인데 마찬가지로 우리가 '소여'만 익힌다면 '감각소여', 감각소여이론', '소여의 신화' 등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단어의 의미가 형태로 추론되어 질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이 사례에서 부당해 보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런 면에서 한자어가 용이하고 훨씬 경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물리학 교양서에서 '항성'->'붙박이 별', '행성'->'떠돌이 별'식으로 한자어를 풀어 서술했는데, 개인적으로 읽기가 더 불편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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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자어 단어(소여)는 추측이 가능해야 하지만 우리말 단어(별)은 그렇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1. "~이 직관적인 이유는 의미를 추측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어반복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 어려움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제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는 단어의 결합이기 때문으로 보는게 타당하다 생각합니다.

  2. 또한 사용빈도를 언급하시는건 결국 사용맥락에 의존적임을 함축하므로 핵심 주장과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3. 3을 피해서 한자어휘의 사용맥락이 아닌 각 음절에 해당하는 한자어의 맥락으로 바꿔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근데 '항', '행', '성' 만큼이나 '소', '여' 역시 잘 사용됩니다(소정, 소관, 소임, 급여, 대여, 기여). 이때 무지한 이가 '행성'을 추론하는 수고와 '소여'를 추론하는 수고에 어떤 차이가 있을지 의문이네요. 결국 3의 문제로 돌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