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역사적으로 유일무이한 것은 마키아벨리의 천재성과, 그의 천재성을 시대의 사상을 운명 (fortuna)과 비르투 (virtù)를 통해 이탈리아의 구원자이자 회복자가 될 군주의 상징으로 결정화하게 한 특이한 상황의 성향이다.
1 Biographical Circumstances - Machiavelli and Guicciardini.
마키아벨리와 귀차르디니는 공화주의적 성향과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적 견해를 공유했지만, 귀치아르디니는 정치를 이론화하기보다는 역사의 흐름을 현재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귀차르디니에게 정치는 일상적인 권력 투쟁과 외교, 군사적 행동으로 축소되었으며, 이 때문에 그는 마키아벨리보다 냉소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마키아벨리에 대한 평가는 중요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2 The Problems of the Age. The Trauma of 1494.
마키아벨리는 당대의 권력 정치 문제를 일반화된 사변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유일한 사상가였지만, 이러한 문제들 자체는 그의 독창적 발명이 아니었다. 귀차르디니나 필립 드 코미네스 같은 동시대 또는 이전 시대의 사상가들의 저작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이 때로는 더욱 현실적으로 다뤄졌다.
중세의 기독교 세계가 교회와 국민국가로 분열되는 현상은 영적, 세속적 영역 모두에서 공동체 정신의 쇠퇴를 의미했으며, 법적 관할권의 분리, 권리에 대한 고집, 그리고 전체 질서의 파괴를 무시한 채 개인과 제도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15세기 중반 이탈리아의 정치 체제는 4국과 교황령 간의 세력 균형에 기반했으며, 이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외교적 노력으로 1492년까지 유지되었고, 그의 사후 밀라노를 견제하기 위한 나폴리와 피렌체의 비밀 동맹이 프랑스의 개입을 초래하여 1494년 이탈리아 침공으로 이어졌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가 통합된 군주국들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무너진 경험을 통해, 도덕적 원칙과 무관한 행동의 합리성과 효과적인 군사 조직의 중요성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문제의 해결책으로 통합된 국가의 건설과 군사 개혁, 특히 공화주의적 애국심에 기반한 국민 민병대의 창설을 주장했다.
3 The Italian Tradition.
a. 알보르노스 추기경 [힐 알바레스 카리요 데 알보르노스]
1353년 교황 특사 알보르노스 추기경이 도착하여 평화 정착 임무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357년 파노 의회에서 교회국의 새로운 헌법인 '콘스티투치오네스 (Constitutiones Sanctæ Matris Ecclesiæ)'가 제정되었고, 이는 수 세기 동안 지속되다 1816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알보르노스는 그의 콘스티투치오네스와 능숙한 외교 활동을 통해 마키아벨리적 군주의 역할을 수행하여 혼란스러운 이탈리아 영토를 평화롭게 만들고 통합했다. 그의 활동은 1362년 교황 우르바노 5세의 로마 일시 귀환을 가능케 했지만, 마키아벨리의 이상과는 달리 교정적 헌법을 가진 군주제로 귀결되었다.
b. 콜루초 살루타티
귀차르디니와 사상적으로 유사한 가진 콜루초 살루타티는 1400년에 쓴 폭군에 관하여 (De Tyranno)에서 치옴피 반란 이후 피렌체의 혼란을 배경으로 군주제적 지도자를 통한 질서 확립 문제를 다루었다. 살루타티는 정치를 기독교 세계관에서 분리하고 신학적 고찰을 배제한 채, 국가를 자율적이고 절대적인 역사적 현상으로 다루는 새로운 현실주의적 정치 분석을 발전시켰다.
그는 카이사르의 권력 장악을 사례 연구로 삼아 당시의 정치 상황이 군주제를 역사적으로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카이사르가 폭군이 아니라 내전의 혼란을 종식시킨 정당한 통치자였다고 평가했다.
c. 인문주의적 역사학
살루타티와 함께 인문주의적 학문이 피렌체 정부에 도입되면서, 인문주의적 스타일이 외교 관계의 형식을 결정하고 인문주의적 역사서술이 외교 활동의 일부가 되었다.
브루니의 역사서를 모델로 한 새로운 역사 서술 방식은 리비우스를 본받아 전쟁과 혁명 같은 극적인 사건에 집중하고 개인을 행동의 중심에 두었으며, 이는 마키아벨리와 귀차르디니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4 The Asiatic Background
a. 아시아의 그림자
중국 제국의 형성과 흉노 제국과의 전쟁, 흉노의 서진은 게르만 부족을 서쪽으로 밀어내었다. 이는 410년 로마 약탈과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의 아틸라 패배로 이어졌다. 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아시아의 압박이 게르만 왕국들에 계속되었다.
13세기 말부터 시작된 오스만투르크의 부상은 1354년 유럽 최초의 정착지 설립,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정복, 1529년 비엔나 도달로 이어졌다. 비잔틴 제국의 몰락과 오스만 제국의 부상, 티무르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퇴장은 15세기 서구인, 특히 이탈리아 역사가들에게 세계적 규모의 권력 현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b. 포조 브라촐리니
포조 브라촐리니 (1380-1459)는 군사적 행동과 문학 활동 중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지 결정하지 못하지만, 역사가들의 기록 부족 탓에 군사적 업적으로는 지속적인 명성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의 초기 포르투나 개념에는 이교도적 고귀함이 있었으나, 종교 개혁과 경쟁 사회의 영향으로 이후 세대에서는 사라졌다. 19세기, '적자생존'이라는 생물학적 공식이 르네상스 시대의 운명 개념을 대체했고, 승리와 가치의 차원이 일치하면서 행동의 흐름은 비극성을 잃고 진보적이 되었다. 한편 그는 고대와 고전에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기 시대의 위대함을 찬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조의 고전에 대한 아이러니한 태도는 문명의 영광이 무자비한 힘에 의해 쉽게 파괴될 수 있다는 비관적 통찰을 반영한다. 로마-기독교적 보편주의와 역사 구성은 아시아 세력의 등장과 아시아의 "평행" 역사에 의해 심각하게 흔들리게 되었다.
c. 티무르 전기
'티무르 전기'라는 표준화된 전기 (Vita)의 창시자는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 (후에 교황 비오 2세가 됨)였다. 15세기 인문주의자들은 역사적 인물의 전기를 작성할 때 의도적으로 소재를 선택하고 왜곡하여 신화적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d. 결론
오스만 제국의 부상과 티무르의 등장은 서구의 정치 개념에 충격을 주었다. 이탈리아인들은 1494년 이전에 허무주의적이고 합리적인 권력 개념을 형성했다. 이러한 근동의 사건들로 인해 서구 역사의 기독교적 의미가 밀려나면서 인문주의적 세속주의가 강화되었다. 이는 마키아벨리의 사상 형성에 중요한 지적 배경이 되었다.
5 The Vita di Castruccio Castracani.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정치적 굴욕을 극복할 영웅적 인물의 필요성을 신화적으로 표현했다. 신화 자체는 오직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에서만 완전하고 명료하게 (consciously) 펼쳐졌다.
이 저작은 표면과 달리 실제로는 비르투로 위대한 국가를 세우려 했으나 운명 (포르투나: fortuna)에 의해 좌절된 이상적인 이탈리아 영웅의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사실을 선별, 각색한 작품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로써 운명과 덕성/비르투가 영웅의 삶을 형성하는 방식에 대한 교훈적인 예시를 제공하려 했다.
마키아벨리는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실제 역사를 변형하여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이탈리아 영웅상을 창조했다. 마키아벨리는 카스트루초의 성격을 요약하며 그를 친구들에게 사랑받고 적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인물로 묘사한다.
티무르 전기에서 보이는 ira Dei (신의 진노) 요소, 즉 승리한 군주가 ultor peccatorum (징벌자)이 된다는 것을 이 전기에서 소개한다. 군주론이나 리비우스에 관한 논고에서조차 권력과 비르투에 따른 섭리적 (providential) 정치 질서의 의미를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