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머-데리다 논쟁의 유의미성에 대한 소고

가다머-데리다 사이의 논쟁을 공부하기 위해 두 개의 논문과1 다른 하나의 논문에 대한 선배 Y의 블로그 글들2을 읽었다. 이 세 가지 글들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은, 가다머-데리다 논쟁이 그 이름값에 비해 그다지 유의미하거나 생산적인 토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할 것은, 내가 생각하는 유의미하고 생산적인 토론, 특히 철학자들 간의 토론에서 내가 기대하는 것은 서로의 입장이 가진 근본적인 공통점과 차이점이 드러나고 그것들에 대한 주요 논증들이 정리되는 것이다. 그런데 가다머-데리다 논쟁에서 두 사람의 입장이 유의미하게 차이났느냐고 한다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사람은 토론을 성립시키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지만 각자의 철학적 입장과 전통의 차이로 인해 서로를 너무 오해하여 논쟁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두 사람은 서로를 매우 존중하고 많은 교류를 해왔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게 놀랍지는 않지만, 내가 기대했던 논쟁의 양상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가다머-데리다 논쟁의 주제들을 다음과 같이 구분지을 수 있을 것 같다.

  1. 데리다의 해석학 비판

(1) 가다머의 해석학은 '선의지'(Guter Wille)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2) 정신분석적 인식은 일반해석학으로 통합될 수 없다.

(3) '성공적 이해'는 확증될 수 없다. vs 해체주의는 통약불가능성으로 인해 대화가능성을 부정한다.

  1.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 비판

하이데거&가다머 : 니체의 철학은 전통 형이상학에 속한다.

데리다 : 니체의 철학은 반-형이상학이다.

문제는 이 논쟁들을 분석하면 대체로 한 쪽이 다른 쪽을 오해하여 실상은 같거나 비슷한 결의 주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을 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가령 데리다가 가다머가 이해의 조건으로 제시한 '선의지' 개념을 칸트적인 개념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칸트에게 있어 선 의지란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할 절대적인 형식을 가진 의지로서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이는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 체계의 핵심이 되는 개념이다. 데리다는 이처럼 가다머가 칸트의 형이상학적인 선 의지 개념을 차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제기한다. 그러나 가다머는 자신이 제시한 선 의지 개념은 칸트적인 것이 아니라, 대화의 태도에 관련된 플라톤의 "eumeneneis elenchoi", 타자의 진술이 "분명하게 이해됨"으로부터 온 것임을 제시한다. 여기서 분명하게 이해된다는 것은 타인의 지식이 전부 단번에 이해된다는 것이 아니라, 선에 대한 타자와의 입장차이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 의미가 산출된다는 의미에서의 선 의지다. 즉, 결코 차이를 제거할 수 없지만 끝까지 타자에게 열려있고자 하는 대화의 태도로서 선의지가 활용된 것이다. 데리다 입장에서 이런 의미의 선 의지 개념을 부정할 이유가 없다.

정신분석학적 인식을 완전히 성공적인 이해를 부정하는 증거로 제시하는 데리다의 비판도 가다머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 봤듯 가다머는 완전한 이해, 완전한 합의로서의 대화와 지평융합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끝없는 대화의 과정, 인간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겸손으로서 이해 개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다머는 정신분석학을 완전한 이해로서의 일반해석학에 포섭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지조차 않는다. 가다머는 리쾨르의 해석학적 작업이 정신분석학이 해석학으로서 온전하게 작동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주장한다. 리쾨르에 따르면 정신분석학은 주어진 의미의 은폐된 원초성을 탈은폐하고 해체하는 개별적 해석학으로 취급한다. 주어진 의미가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아닌 이상, 이런 정신분석학적 이해를 해석학 진영에서 거부할 이유가 없고 해체주의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3)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가다머는 완전하고 성공적인 합의 개념을 상정한 바가 없다. 그리고 역으로 가다머가 우려한, 데리다가 통약불가능성 논제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데리다가 이해는 이해의 실패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할 때도 이것이 강한 의미에서, 타자가 우리의 언어 바깥에 실재한다는 의미에서의 통약불가능성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타자를 우리의 이해에 완전히 포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무한한 대화를 특정 시점에 완성된 것으로 고정할 수 있다는 것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고 이해해야 한다. 즉, 두 사람은 매우 유사한 입장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사람의 입장에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아주 거친 요약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내용의 왜곡이 없다면 두 사람은 매우 유사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각자가 서 있는 철학적 전통의 차이로 인해 서로를 오해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보인다. 최소한 여기에서는 내가 기대한 '유의미한 토론'이 벌어진 것 같지 않다.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 대한 견해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하이데거와 가다머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 개념이나 '영원회귀' 개념 등을 전통 형이상학 개념으로 이해하고 이 개념들을 기반으로 니체가 전개한 철학이 의지의 형이상학, 전통 형이상학의 복권으로 이해했다. 반면 데리다는 하이데거가 니체의 개념들과 철학을 하나의 완결된 체계로 해석한 것이 부당하고, 하이데거와 니체가 제기한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 개념들은 실상은 형이상학의 해체에 사용되는 개념들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여기서 누구의 해석이 니체의 철학을 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지의 문제에 답할 능력도 없고, 더 솔직히 말하면 내 관심사가 아니다. 그리고 더욱 내 흥미를 끌지 못하는 이유는, 이들이 모두 '전통 형이상학의 거부'라는 대명제에 찬성한 채로 니체의 철학이 전통 형이상학의 연장인지 해체인지에 대한 해석의 차이만을 드러내고 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철학자 해석의 문제에 전부 관심을 안두는, 학문적 게으름에서 비롯된 성향때문에 이렇게 평가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비트겐슈타인을 칸트적으로 해석할 것인지, 헤겔적으로 해석할 것인지, 아니면 자연주의적으로 해석할 것인지 문제는 단순 주해와 해석의 문제를 넘어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상이한 입장 차이를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의 철학자 해석 논쟁을 좋아한다. 하지만 최소한 가다머와 데리다 사이의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 논쟁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철학적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논쟁이라기 보다는 니체의 철학적 입장에 대한 지정학적 토론에 불과하다고 여겨진다. 즉, 니체를 우리편으로 볼 것인지 상대편으로 볼 것인지의 문제에 그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흥미없다고 해서 이 둘의 토론이 진짜 무가치하고 공부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오히려 두 사람의 토론을 통해 현대 해석학과 해체주의는 서로 각자 다른 철학적 전통에서 출발한 유사한 입장을 가진 두 철학적 입장으로 같이 갈 수 있는 파트너라는 점을 드러낸 토론이라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하고 가치있다. 다만, 가다머-하버마스 논쟁처럼 매우 다른 입장을 가진 두 학자가 서로의 입장을 비판하기 위해 제시하는 논증들을 평가하고 내 의견을 제시하는 연습을 함에 있어서는 두 사람의 논쟁은 그리 좋은 교재가 아니다.

그래도 이러한 생각은 해볼 수 있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동일성에 입각한 차이가 아닌 '차연', 근본적인 복수성과 차이성을 담지한 이 개념에서 대화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지를 제기할 수 있다. 대화라는 것은 결국 상호이해와 같은 개념적 도식을 공유한다는 전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이것을 부정하던가, 부정하지 않고 긍정한다면 '이해는 이해의 실패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 논제를 데리다는 보다 상세하게 해명할 필요가 있다. 더 강하게 말하자면, 데리다는 서양 전통 형이상학을 부정하기 위해 너무 강한 주장을 한 것 아닌가? 완전한 합의, 형이상학적 실재에 입각한 선의지를 비판하기 위해 데리다가 대화의 최소 조건인 최소한의 합의, 상대방을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고 그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선의지 내지는 관용의 원칙을 도외시한 것 아닌가? 해체주의가 최소한의 합의, 그리고 대화 파트너를 인정하는 관용의 원칙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면, 내 입장에서는 해체주의가 그렇게 독특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 입장인지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가다머가 주장하고 데이비슨이 주장한 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들을 극단적으로 표현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킬 뿐이기 때문이다.


  1. 이윤미. (2021). 가다머와 데리다의 갈등과 상호간 대화 가능성. 현대유럽철학연구, 60, 133-180. 그리고 정기철. (1995). 현대 해석학의 논점: 해석학과 해체주의: 가다머와 데리다의 논쟁. 해석학연구, 1, 277-313.

  1.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 원 논문은 정연재. (2005). 대화와 해체, 그 간극을 넘어서. 해석학연구, 16, 17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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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동의할 만한 주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다머-데리다 논쟁이 유의미하거나 생산적이지 않다는 표현은 다소 과격한 게 아닌가 합니다. 이 논쟁을 통해 가다머와 데리다가 자신들의 입장이 지닌 함의를 좀 더 명료하게 파악하게 된 면모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특히, 가다머는 (그리고 가다머 연구자들은) 가다머-데리다 논쟁을 통해 '합의'라는 개념에서 어떻게 해야 오해의 소지를 없앨 수 있는지를 알게되었거든요. 사실, 가다머는 합의 개념을 다소 애매하게 사용한 면이 있죠. 즉, 이 개념을 종종 (1) 찬성/반대 중 어느 한 쪽으로의 의견 일치라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고, (2) 두 입장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서로 간의 의견 일치라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데리다가 (1)을 비판하였기 때문에 가다머는 (2)야 말로 자신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어한 '합의' 개념이라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그러니까, 토의 상황에서 두 대화자가 반드시 어느 한쪽 의견에 손을 들어주는 방식으로 합의를 이루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이해'가 성취되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둘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의견 대립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합의해야 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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